책 내용 중에서...

첫 실증공개 '금동향로'

소나무 01 2010. 1. 19. 22:11

 

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별 것이 없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1998년 내가 지은 책 이름이다. 제목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뾰쪽한 수가 없어 출판사 맘대로 하라고는 나 몰라라 했다. 그랬더니 당시의 유명한 영화 제목을 패러디해 그리 작명한 듯 싶었지만 어떻든 그냥 내 버려 뒀더니 결국 그리 되었다.

 

 책 내용은 내가 취재했던 프로그램의 뒷 얘기랄 수 있는 문화유산 답사기였다. 그런데 책 내용이 부실한데다  당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이 인기 절정이어서 내 책은 사실 서점가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 채 소리없이 사라져야 했다.

 하여 지금은 아예 절판이 되어 버렸지만 나로서는 어떻든 간에 내 이름을 걸고 책을 하나 만들어 냈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혹 이 책 내용이 궁금하여 살펴 보려 한다면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같은 곳을 찾아가야 볼 수 있는 희귀본(?)이 되어 버린 상태이니 그리 아시길.

 

 내 책을 내 블로그에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었기에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보니 그냥 버려 두기가 아깝기도 하여 이곳 블로그에 주제별 내용이라도 한번 올려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원래의 파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원고는 내가 연필로 쓴 상태로 넘겼기 때문에 나에게도 파일이 존재하지 않아 블로그를 위해 다시 작업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저 내 마음 속에 있는 책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도 한 두개 주제 정도는 소개하고 싶었다. 혹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름대로 생각하다가는 책에 실려있는 여러 내용 가운데 결국 한 가지 주제만 여기에 옮겨 와 담아보기로 했다. 그게 '금동향로'다. 그 많은 양을 다시 파일화 하기엔 너무 벅찬 것 같아서... 이 나마도 워딩 속도가 빠른 아들 녀석의 힘을 빌려 왔다. 부끄럽지만 내가 만들었던 수 십개의 다큐 프로그램들은 지금도 비디오로 담겨 일반안을 대상으로 판매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역시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총 332쪽에 달하는 내 책에는 성철종정의 다비. 인각사, 화장과 미인, 신 청산별곡, 시제. 겨울 향로봉, 한옥의 창호, 금산땅의 농가월령가, 구림대동계, 고성반도의 봄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인의 벗은 몸매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실체 중에서 정말이지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매우 아름답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내가 쓴 책의 표지)

 

 

 

 

 

 

첫 실증공개 < 금동향로 >

 

 저녁을 물리고 뉴스 시간에 맞춰 습관처럼 TV 앞에 앉아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전투구(泥田鬪狗)처럼 느껴지는 판에 박은 정치판 뉴스 대신 오늘은 엉뚱한(?) 내용을 방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야, 저런 유물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땅 속에 묻혀 있을 수 있었지?"

 93년 12월 21일 KBS 9시 뉴스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백제시대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 국보급 금동향로가 출토되었음을 첫머리로 보도하며 조형미와 보존 상태로 볼 때 백제 유물 가운데 단일 출토품으로는 최고의 걸작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는 출토 당신의 모습과 한 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힘차게 비상하는 뚜껑 부분, 또 비파, 피리, 북, 거문고 등을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비롯해서 산악, 인물, 동물상 등의 화려한 문양이 보이는 몸통 윗부분, 연꽃잎과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는 몸통 아랫부분, 한 마리 용이 살아 생동하는 듯한 형상을 한 받침대 부분 등 실로 경이로운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 주었다.

 

 이튿날 신문보도도 마찬가지였다. 금동향로의 출토는 그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향로를 살펴본 국립중앙박물과 정양모 관장은 며칠 후 이것을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고 정식으로 이름 붙였고 이후 그 이름을 별 이의 없이 그대로 쓰게 되었다. 처음 발굴 당시에는 뚜껑 부분이 드러난 상태를 보고 투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향로의 상반신을 보면 영락없이 투구처럼 생겼다.

 발굴을 담당한 국립부여박물관 신광섭 관장이 들려 준 발굴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부여박물관에서는 93년 10월 26일부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읍 능산리 392의 1번지 일대 3천여 평 부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지는 지난 83년부터 연꽃무늬 수막새 2점을 비롯해서 기와편, 토기류 등이 발견되어 백제권 문화유적 정비 사업의 하나로 조사 작업이 진행되어 왔던 터였다. 처음에는 왕궁의 건물지인 것으로 추정했으나 발굴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소토(燒土)층에서는 주로 기와나 토기 같은 유물이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는 금동공예품들이 발견되어 심상치 않았다. 이를테면 인동초(忍冬草) 문양의 금동 광배(光背)가 나오고 유리구슬이나 풍탁(風鐸)에 부착하는 바람판 같은 쇳조각들도 심심치 않게 나와 현장을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발굴 현장이 논밭으로 사용되던 저습지인대데다가 눈까지 자주 내리는 까닭에 토층이 뒤섞이거나 붕괴되지 않도록 야간에는 비닐을 덮어 놓는 쇳조각들도 심심치 않게 나와 현장을 최대한 보존해야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던 12월 12일 일요일 오후, 발굴 작업을 계속하던 현장에서 이상한 낌새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와 발굴 조사팀이 어스름 무렵에 현장에 급히 도착해 보니 몸통 부분 가장자리 약간과 뚜껑 부분이 조금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얼핏 보면 왕관 같기도 하고 투구 형상 같기도 했으나 전혀 낯선 형태여서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인부들은 현장에서 모두 철수한 상태였고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우리는 발굴을 강행키로 했다.

아무래도 중요한 유물인 것 같아 대나무칼 등 일체의 작업 도구를 쓰지 않고 직접 손으로 파내려갔다. 파묻혀 있는 곳의 토양이 사질토인데다가 물도 적당히 포함하고 있어서 손이 시릴 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략 3시간 정도의 긴장 속에 드디어 발굴을 완료했다. 정말 발굴 운이 좋았다.

   

                                                                               금동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집터 유적

 

                                                                                                 발굴 당시의 금동향로

 

 그러나 막상 발굴을 끝내 놓고도 언론에 발표를 할 수가 없었다. 신 관장은 80년부터 부여박물관에서 일해 온 백제통인데도 처음 대하는 희귀한 형태의 유물이고 보니 그 중요성을 감안해서라도 섣불리 발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발굴에 관여했던 지도위원 등의 전문가들과 접촉하고 행정조처 등의 필요한 절차를 끝내고 12월 23일, 그러니까 발굴 작업을 시작한 지 열하루 만에야 종합적인 내용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금동향로는 국내에서 발굴된 향로 가운데 가장 크면서도 조각이 화려하고 정교하며 특히 왕실에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고고학, 미술학 사상 획기적인 발굴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때문에 서둘러 프로그램화를 해야 할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막상 제작에 착수하려 하니 쉽지가 않았다. 그것은 각 언론매체에서 집중포화식으로 내리퍼붓는 보도에 새로운 내용이 없었고, 금동향로의 실체가 아직은 안개 속에 싸인 채 연구 조사가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인터뷰를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향로 그림만 찍어가지고는 45분이라는 제작 시간을 도저히 채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몇 개월을 흘려보냈는데 그 기간에 관심을 끌만한 연구가 드문드문 발표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과연 금동향로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졌을까. 또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용도로 쓰인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추정할 뿐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향로 뚜껑에는 다섯 개의 단으로 모두 74개의 산봉우리를 올렸고 다섯 사람의 악사 외에 도사로 생각되는 인물,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는 선경 속의 도사, 신비로운 숲과 기품 있는 기마인물상, 말을 탄 채 몸을 돌려 활을 쏘는 모습 등 모두 15사람이 만들어져 있고 봉황과 호랑이, 사슴, 불사조 등 상상과 현실 속에 존재하는 39마리의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몸체 하단부는 연꽃이 만개해 있어 불교 색채가 짙은 조형미를 느끼게 하는데, 모든 것이 연꽃으로부터 탄생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 사상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당시는 불교의 이상형인 연화장 세계와 도교가 혼합된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단부에는 모두 26마리의 동물상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태껸 자세를 취한 인물상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봉래산 금동향로보다 수미산(須彌山) 금동향로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 금동향로를 꼭 프로그램으로 소화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은 갖고 있었으나 전체적 구상에 대한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제작이 되더라도 어렵고 딱딱한 프로그램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오리무중 상태로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결국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금동향로를 보존 처리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특별 전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전시기간에 맞춰 방송을 하게 되면 발굴 직후에 곧바로 제작에 착수해 프로그램화시키지 못했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는 금동향로의 바깥 공개를 최소화시켜 완벽한 보존 처리를 하기 위해 1994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불과 10여 일로 짧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일반 전시를 20여일 앞둔 시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담당 이상수 실장을 만났다. 그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발굴 이후의 보존 처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상수 실장은 물론 반대의사부터 피력했다. 이전에도 다른 방송사의 비슷한 요구를 모두 물리쳤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 때문이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 보존과학실에서 금동향로 실물을 처음 보았다. 금동향로는 뚜껑과 받침 부분이 분리된 채 청동병안정제인 BTA용액이 들어있는 커다란 유리용기 속에 담겨 격리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실물을 보니 정말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답게 처리된 뛰어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 탄성이 절로 나올 따름이었다.

 더욱 욕심이 생겼고 이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사람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다시 이 실장과 마주 앉았다.

"보존 처리 문제로 그 동안 여러 매체의 취재에 응하지 않으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제 그 동안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시에 들어갑니다. 금동향로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자세히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지요? 바로 직전에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야 전시 자체도 효과가 있지 않겠어요? 박물관 측으로서도 지금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

 

 이 프로그램은 전시 기간을 겨냥해서 제작되는 것이며 전시에 앞서 관람자들이 금동향로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고 봐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면 방송이란 매체가 그 정보전달에 가장 적합하고 바로 내가 만들고자 하는 프로그램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일반관람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면 TV프로그램을 통해 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계속 몰아 세웠다.

 

 안경알 너머로 나를 멀거니 쳐다보던 이 실장은 내 말이 그럴 듯하다 싶었는지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송을 꺼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염려 때문이었다. 금동향로의 발굴에서 보존 처리 직전가지 국보급 문화재를 너무 함부로 취급했다는 매스컴의 질타를 이미 많이 받아 그런 문제로 더 이상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현재 안정처리중인 금동향로에 촬영하면서 조명등이 가해지면 청동병이 확산될 염려가 크다는 것이다. 출토 후 모두가 흥분한 상태에서 각 방송사의 촬영용 조명등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어 유물에 손상이 갔던 것이 보존상의 실수라고 지적된 바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HMI라는 조명기구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특수조명은 강한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지 않아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자 처음 들어본다면서 국내에 그런 조명기구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 다음부터는 촬영 전반에 걸친 모든 문제에 대해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촬영 도중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유물이 금동향로이니 만큼 그 향로에서 향불이 피어오르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 실장님, 향로에다 향불을 피워야겠는데요."

이 실장은 느닷없는 나의 제의에 정신 나간 놈이 아니냐는 듯 한참 동안을 쏘아본다.

"지금 보존 처리 중이라서 우리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데, 저 용기를 꺼내오는 것만 해도 큰일인데 거기에다 불을 피워요?

"예, 화면 구성에 꼭 필요합니다. 좋은 방법을 한번 강구해 볼게요."

"안 돼요. 그 동안 정밀 촬영을 몇 번 했으니 금동향로 촬영은 이제 끝난 걸로 합시다."

"어떻게 한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의 금동향로 뚜껑부분 촬영

 

 요즘 같으면 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법을 사용하여 훌륭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때는 장비도, 시간도, 제작비도 모두가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이 실장의 양해를 얻어 검은 공간 속에 금동향로를 갖다 놓고는 향로 뒤쪽으로 향을 피워 올려 그 효과를 얻어내는, 말하자면 트릭을 써서 촬영했는데, 생각보다 그림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방송 후 그 그림 좀 얻어 쓰거나 구입할 수 없겠느냐는 문의전화를 몇 차례 받은 바 있다. 누구라도 다시는 그런 조건으로 촬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 나는 시간이 되는대로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을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고 이왕에 취재에 응한 터이고 보니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도 모든 근무자들이 성의껏 도와주었다.

 

 촬영 기간 동안에 얻어낸 금동향로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금동향로는 전체 높이가 64cm, 무게는 12kg이며 재질을 구리 72%, 주석 18%, 납8%로 구성되어 있고 그 표면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지난 1972년 공주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제관식(金製冠飾) 등 금속공예 유물은 모두 금판을 오리거나 두드려서 만든 세공제품인데 반해 금동향로는 그보다 한 단계 발전된 주조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백제 문화사 복원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특히 주조법에 의해 만들어진 금속 제품의 발굴은 백제가 당시 일본에 금속 및 불상주조기술을 전파했다는 문헌상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직후인 6세기쯤, 그러니까 백제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제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향로는 원래 중국의 전국시대 말과 한나라 초부터 사용되었는데 향로 중심 부분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을 산 모양으로 만든 것을 박산로(博山爐)라 하며 따라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금동향로는 모두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우리로서는 서해가 된다)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이 삼신산을 봉래산(蓬萊山)이란 이름으로 친근하게 불러왔다.

박산향로는 우리나라의 불교 수용과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번의 금동향로가 출토되기 이전의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금동향로는 박산로의 몸통을 받치고 있는 다리와 승반(承般)을 대신하여 머리를 들어올린 힘찬 율동의 용을 조작하여 받침을 삼았다는 것만 다를 뿐 그 위에 산을 표현한 것이라든지 꼭대기에 봉황 한 마리가 서 있는 모습 등 외형적으로는 박산로와 닮았다. 그럼에도 뚜껑 부분에 묘사된 인물상이나 주악(奏樂)상, 동물상들이 각기 독립적이고 입체적으로 서 있으며 산과 산 사이의 거리감, 깊이감, 공간감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한대(漢代)에 유행했던 박산로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그래서 이번에 발굴된 금동향로는 백제의 창안품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학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여군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산경문전(山水山景文塼)이다. 이 벽돌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면 많은 부분이 금동향로와 닮아 있다.

송림이 우거져 있거나 좌우 변두리에 바위산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들어서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선경(仙景)을 표현하고 있고 상단의 산봉우리 위에 나래를 활짝 펴고 위엄을 갖추고 서 있는 봉황 한 마리도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금동향로 전체 모습

 

                                                                                    금동향로의 주악상, 동물상 등의 모습

 

 향로는 지하수가 흐르는 밀폐된 흙 속에 수백년 동안 매장되어 있었기에 표면에 얕은 부식층이 발견되었으며 도금층은 소금막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대부분 부풀어 있어 밀착력이 약해져 있었다. 또 최초의 상태에서 악성 부식인자인 염분의 농도가 20PPM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수치를 최대한 낮추는 보존 처리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금동향로 도금 상태의 겨우는 금이 7%, 구리 20%, 그리고 약간의 수은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존과학실의 박인준 연구원은 원자흡광분석기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를 보여 주며 측정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산술적인 기록 앞에 난 항상 무지한 편이었다.

 

 다음으로 제작 기법을 보면 봉황과 향로뚜껑, 연화받침, 용대 등 네 부분을 따로 주조해서 결합시켰는데 실납법(失蠟法)으로 주조했다. 실납법이란 주물 전에 밀랍을 이용해서 형태와 문양을 잡고 그 위에 열에 강한 매흙을 발라 틀을 만들어서 밀랍을 녹여 빼내고는 그곳에 다시 청동을 부어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주조 방법을 말한다. 이처럼 금동향로의 경우에는 그 복잡한 형태를(특히 용대 부분) 한 곳의 결점도 없이 완벽하게 완성해 낸 현대 기술로도 불가사의에 속할 정도의 뛰어난 주조술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삼국(三國) 가운데 백제가 가장 앞선 주조 기술을 가졌었다는 증거이다. 같은 시대 신라가 돌을 점토 다루듯 빼어난 석조문화를 이루었다면 백제는 쇠붙이를 그렇듯 훌륭히 요리하여 찬란한 금속문화를 꽃피웠을 것이다.

 

 금동향로에 관한 취재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도금 방법이었다. 금동향로는 아말감도금법으로 처리되었는데 아말감이란 용어조차 나에겐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한자 조어(造語)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수은과 다른 금속과의 합금을 뜻하는 영어 단어였다.

아말감(Amalgam)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도금술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이야 전기도금법을 사용해 도금 작업을 쉽게 끝낼 수 있지만 옛날엔 그것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 조소(彫塑) 작품을 하면서 석고로 뜬 인물상에 금분(金粉)을 칠해본 일이 있다. 그것이야 시장에서 금분을 사다가 접착제에 풀어서 붓으로 칠하면 그만이었다. 옛날에도 그런 방법으로 했을까?

 

 금동향로는 백제땅 부여에서 발굴됐음에도 취재 차는 그 도금술의 비법을 찾기 위해 신라땅 경주로 가고 있었다.

보존과학실의 이실장은 경주에 사는 금속 공예가 최광웅 씨를 소개해주면서 아마 그분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본 일이 없어 그도 매우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금동향로에 대한 미스테리는 그렇듯 보존과학실팀과의 공동작업으로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었다.

 경주 외곽 불구사로 들어서는 도로변에 사는 최광웅 씨는 50대 초반인데도 백발의 도인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고 평소 가까웠던 사람처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통금속공예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집착, 그리고 투자가 대단해 평소 모아 놓은 돈이 없을 것 같았다. 한 50평 쯤 되어 보이는 집마당 한쪽에 공방을 차려 놓고 혼자서 연구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깨끗한 환경과 맑음 마음에서 새로운 작업도 가능하다는 신조처럼 실내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또 수많은 책과 컴퓨터 등 그가 평소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 장인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공구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는 아말감도금이란 용어 대신 '손도금'이란 표현을 썼다.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 명명이었다.

손도금의 첫 과정은 금가루를 얻어내는 일이다. 옛날에는 금덩이를 줄에 갈아 가루를 얻어냈을 것이라며 바닥에 하얀 종이를 깔고 그대로 해보았다.

“선생님, 제가 준비를 차분히 하질 못해서 손도금 실험에 어느 정도의 금이 필요한지 마음을 쓰지 못했습니다. 제작비를 여유있게 가져오질 못했는데…….”

“그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금을 많이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실험적으로 방법을 보여주려고 했으니까요. 두세 돈 정도 준비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저는 그저 한 돈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정도라면 제가 값을 치르겠습니다.”

“천만에요. 제가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있으니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전혀 부담 안 가져도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동안 몇 차례 TV 출연을 제의받곤 했지만 제가 싫어서 모두 거절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죄송스런데요…….”

“무슨, 무슨……. 박물관의 이 실장님 말씀은 제가 거절할 입장이 못 됩니다. 평소 학문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이 실장님이 소개해서 뵙게 됐으니 그것 때문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멀리까지 오셨는데…….”

 

                                                              손도금 방법을 재현해 보이는 경주의 금속공예가 최광웅씨.

 

 나는 다만 고마울 따름이었다.

금가루는 눈부신 광채를 내며 바닥에 쌓인다. 줄에서 떨어져 금가루에 섞였을지도 모를 불순물(쇳가루)은 자석을 이용해 가려낸다. 다음에는 그 가루를 그릇에 한데 모아 수은과 섞는 작업이다. 수은은 물방울 같은 형태로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먼지 같은 이물질과는 결합하지 않았지만 금가루와는 쉽게 섞인다. 이때 그릇을 적당히 가열하면 수은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금과 결합하게 되며 나중에 불필요한 수은은 모두 증발하게 되어 잘 혼합된 상태를 이룬다. 아니면 창호지 같은 거름종이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했는데 혼합물을 창호지에 쏟아붓고 그것을 둥그렇게 봉합해서는 손으로 힘을 주어 짜자(마치 다린 한약재를 삼베에 부어 짜내듯) 크고 작은 수은 방울들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종이 틈 사이로 빠져 나왔다.

 실내에서 고온으로 수은을 증발시킬 경우, 수은 중독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는 이 작업을 공방 밖에서 해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을 재료삼아 하고자 하는 형태의 주물 표면에 엄지손가락으로 펴바르는 것이었다. 수은은 체온만으로도 쉽게 녹기 때문에 손가락을 사용해서 도금 작업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설명이었다. 손으로 할 수 없는 구석진 곳은 대나무칼이나 가죽끈 같은 것을 이용해서 고루 펴발랐다.

 

 이 실험을 할 때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청동불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 손도금 작업을 끝냈을 때의 불상 모습은 수은 색깔 그대로인 은색이었다. 온통 은빛인 불상을 불판 위에 올려 놓고 가열하는 작업이 다음 순서다. 뜨겁게 열을 가하는 것은 불상 표면에 붙어 있는 수은을 공중에 날려보내기 위함이다. 이 작업 역시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 해야 한다.

 필요한 온도는 대략 100~200℃ 사이로 불상 밑으로 서서히 불을 가한지 5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자 달구어진 불상은 몸 밑부분에서부터 서서히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수은이 증발하면서 불상이 금색으로 바뀌는 경이로움에 온통 넋을 빼고 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손도금을 할 때 혼합했던 수은 외에는 아무런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금가루가 청동불상에 잘 접착되었을까? 실험을 했던 청동불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손으로 비벼보고 손톱으로 긁어봐도 전혀 벗겨지질 않았다. 수은이란 금속은 금과 결합해서 그렇듯 신비한 작용을 하는 것이었다.

 청동불상은 손도금 과정을 거쳐 이제 금동불상으로 바뀌어져 있었으나 표면의 색깔은 광채가 나는 완전한 금색을 띠는 게 아니라 마치 파스텔톤의 색채 상태였다.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가해지는 작업이 그야말로 금빛을 발하게 하는 광택을 내는 작업이다. 광택은 딱딱한 것으로 문지르면 되는 것이었는데 표면이 아주 매끄러운 철봉(鐵棒)을 이용했다. 옛날에는 게의 딱딱하고 뾰족한 집게발을 이용해서 문질렀다고 하는데 그렇게 표면을 고루 문지르자 현란한 광채를 내는 금동불상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손도금. 요즘 주로 표현하는 아말감도금이었다.

“최 선생님, 정말 신기한데요. 그런데 이런 기술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정말 감탄했습니다.”

“제가 뭐 아는 게 있나요. 그저 박물관 같은 곳에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혼자 연구해보고, 또 전문가 선생님을 만나서 말씀을 들어보고……. 그렇게 혼자 해봤어요.”

“대단하십니다.”

“우리나라도 옛날 신라시대에는 훌륭한 금속예술공예 솜씨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금속공예를 별로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 섭섭할 때가 많습니다. 에를 들어 머리카락처럼 가는 금실을 만들고 깨알보다 작은 금구슬을 만들어냈단 말예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고 우리나라 얘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금실과 금구슬은 어떻게 만들었어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죠. 금은 늘어나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에 불에 달궜다가 엿가락처럼 늘여빼면 되는 것이구요. 구슬은 회전하는 물에 돌기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금물을 쏟아부으면 됩니다.”

나는 그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듣고 난 후에야 무릎을 쳤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금속의 접착기술입니다. 언젠가 연구 결과가 끝나면 제가 연락을 드릴게요.”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생겼다. 정말 훌륭한 기능인이었다. 그런데도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배우려 하지 않아 자신이 습득한 것마저도 전수시키지 못해 안타깝다고 한다.

최광웅 씨는 도금 작업을 모두 보여 주고 나서 시원한 수박을 권하며 이런 요지의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사찰에서 요구하는 사리함이나 공주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금제왕관장식의 복제, 그리고 금제귀걸이 등 여러 가지의 금속세공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정교함과 오묘함에 빠져들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금속공예 부문에 너무 무관심한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술이나 기능적인 면에서도 많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금속공예품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요즘 세공기술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동안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아낸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이 분야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최광웅 씨와는 지금까지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나에게 있어 경주는 불국사나 석굴암보다도 그가 있어 더욱 소중한 곳이다.

 

 아말감도금법에 대한 촬영을 끝내고 다시 충북 진천을 찾았다. 이곳에 있는 K회사에서 금동향로를 전시할 진열장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동향로는 공기 중에 노출되면 부식이 촉진될 우려가 있어 유해인자인 산소나 습기가 없는 상태에서 전시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 회사에서는 에어 타이트(Air tight)방식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서 진열장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진열장은 상단부와 하단부로 구분되는데 상단부는 전시용으로 투과명시율이 좋은 무반사 유리로 시원스럽게 사면을 둘렀으며 사각뿔 형태의 유리지붕을 만들어 미적 감각을 최대한 표출시켰다. 유리는 8mm의 두께여서 웬만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또 하단부에는 금동향로를 집어넣을 상단부에 불활성 가스를 충전시킬 수 있는 질소 가스통과 각종 측정장치, 대기장치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니까 하단부에서 밀폐 상태의 상단부로 질소가스를 집어넣으면 그 안에 있던 산소나 수분이 질소에 밀려 모두 빠져 나와 산소 0%, 수소 0%의 이상적인 유물 보존환경을 유지하게 된다는 간단한 이론이다. 나는 거의 완성 단계의 이 진열장을 촬영하고 돌아와 다시 보존과학실에서 금동향로를 세부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K회사에서 진열장 제작을 마무리하고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진열장 상단부의 사각뿔 지붕이 파열됐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시일자가 임박한 상황에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나에게 집히는 것이 있었다. 금속이나 나무로 된 지지대 없이 유리와 유리를 특수접착제로 붙였다고 자랑했으나 내가 보기엔 그 접착상태가 절대로 완벽하게 보이지 않았으며 사각뿔 지붕의 꼭지점 부분에서 만나는 유리면들이 서로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아 어딘가 엉성한 느낌이었다. 1300년 전의 금동향로는 현대기술로도 해석할 수 없을 만큼의 빼어난 기술을 가졌었는데도 오늘날은 그것을 전시할 진열장 하나마저 제대로 만들지 못해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 회사는 박물관의 진열장만을 제작해서 납품하는 전문회사였고 이번의 금동향로 전시용 진열장은 그러한 인연으로 무료로 제작해서 기증하는 것이라 했다. 성수대교 참사와 대형공사의 1원짜리 낙찰사례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전시 중에 그런 파열 사고가 일어났다면 어쩔 뻔했는지. 그나마 실험 가동 중에 발생된 사고였기에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모양을 낸 사각뿔 형태의 지붕 처리는 취소되고 그냥 유리 한 장으로 지붕을 덮어 버리는 급시공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금동향로만을 골똘히 쳐다봤겠지만 나는 그 진열장까지를 함께 봐야 했기에 착잡한 심경이었다.

 

 금동향로는 이후 무사히 전시를 마치고(보존 처리 도중의 전시는 위험하다는 반대의사도 적지 않았다) 과학적 연구조사 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다.

 중성자 및 비파괴검사, 채광술이나 야금술 등 앞으로도 연구 조사되어야 할 내용이 많아 한국원자력연구소, 산업과학연구소 등의 기관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언젠가는 금동향로의 비밀을 밝혀 줄 종합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지만 그러나 지금 당장 시원스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과연 금동향로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느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학설 중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게 와닿은 것은 영남대 송방송 교수의 고대음악사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본 조사 결과였다. 송 교수는 외국생활을 많이 한 신사답게 깔끔한 이미지였고 동그란 유리알의 안경만 쓰면 영락없이 베토벤이었다. 그런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다르게 그는 우리 고대음악사에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금동향로의 5주악상에 나타난 악기가 모두 백제시대에 연주된 악기이기 때문에 금동향로는 전래품이 아니고 바로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충남 여기군 비암사에 있는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阿彌陀佛三尊石像)을 들었다. 그 석상에 금동향로의 악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석상의 제작 연대는 통일신라 초기의 계유년인 673년 백제가 패망한 직후 정확히 13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니 같은 시대의 주악상으로 봐도 좋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고구려 안악 3호분벽화와 중국의 북사(北史)나 일본의 일본후기(日本後記) 등의 기록, 그리고 악학궤범의 기록 등 풍부한 자료들을 열거하며 금동향로의 5주악상의 악기는 완함(阮咸-발표된 비파와 비슷하나 비파가 물방울 형태의 몸통과 짧은 목을 한 것에 비해 완함은 둥근 몸통과 긴 목의 형태다), 장소(長嘯-발표된 피리는 입술에 갖다대 떨림판으로 소리를 내며 몸통이 가늘고 짧으나 금동향로의 것은 굴고 길다), 북, 배소(排簫 - 서양의 팬파이프처럼 작은 관을 나란히 묶어서 만든 것으로 발표된 소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거문고(현금-玄琴-으로 소개된 악기는 그것이 연주자의 무릎 우에 얹어 놓았다는 것과 왼손을 줄 위에 놓고 오른손으로 줄을 퉁기고 있는 모습이어서 거문고의 원형에 가깝다) 등 5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발표된 5주악상의 비파, 피리, 북, 소, 현금은 완함, 장소, 북, 배소, 거문고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비암사에 있는 아미타불삼존석상을 보고 싶었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대마다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은 풍부한 정보자료가 망라되어 있는 27권짜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인데 거기에는 풍파작용으로 인한 훼손 때문에 그 석상만 별도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전화로 확인할 것도 없이 급히 촬영협조 공문서를 만들어 박물관으로 보냈다. 박물관에서의 유물촬영은 반드시 문서가 필요했고 그것도 박물관이 휴관하는 월요일에만 가능했다. 그런데 팩스로 보낸 다음날 박물관 측 여직원으로부터 퉁명스런 말투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건 우리 박물관에 없으니 촬영 오지 마세요!”

불쑥 공문만 보낸데다가 촬영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리면 그럴까 싶어 참기로 했다.

“아니, 책자를 보니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것으로 돼 있던데요.”

“잘 아시고 하셔야죠! 그리고 원하시는 게 있으면 사전에 전시실에 와서 일단 확인하고, 품목 번호도 표시하고, 그 다음에 보내셔야 할 것 아니에요!”

거의 히스테리에 가깝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는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석상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청주박물관에 있으니 그쪽으로 알아보세요.”

 그나마 소재를 파악해 줘 고맙기도 했지만 괘씸하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비록 종이 한 장을 보내 공짜로 촬영하기는 하나 그걸 사전에 어떻게 확인한다는 말인가. 언젠가 창덕궁을 촬영할 때 사전에 정보가 없었던 나는 촬영을 포기하고 관리사무소의 아가씨와 실랑이를 벌이다 큰소리를 퍼붓고는 촬영을 포기하고 철수해 버린 일이 있었다. 알고 보니 2시간마다 꼬박꼬박 10만원씩의 촬영료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는 홍보성 내용이라 생각되어 오히려 방송국 측에서 돈을 받아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아가씨는 원칙만을 고수하고 융통성을 안 보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언론매체인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생긴 일종의 권위의식이 아닌가 싶어 반성의 시간도 가져봤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와 접촉하든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곧바로 청주박물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그 석상이 우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촬영 스케줄에 어려움이 있으니 휴관일이 아닌 평일에도 촬영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물론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으나 상대방의 어투로 보아 융통성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하는 자세가 훨씬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어떤 실마리를 붙잡고 사실 여부를 추적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인 것 같다. 역사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자기 직업에 몰두하게 되고 보람으로 여기게 되는 모양이다.

 

청주로 들어서는 진입로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언제나 멋진 정경이었다. 우람한 자태로 우뚝 서서 긴 가지들을 쭉쭉 뻗어서는 녹색의 긴 터널을 이루는 것도 장관이었지만 가을날, 자동차가 달릴 대마다 포장도로 위로 무수히 흩날리는 낙엽들의 모습도 색다를 정취를 보여준다.

 

 그 동안 많은 곳을 찾아다녔지만 국립청주박물관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길 가는 사람을 불러세워 자주 물어봐야 했다.

청주의 도심을 한참 벗어난 외곽의 조용한 곳에 국립청주박물관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아주 한적한 모습이었다. 곧바로 학예연구실로 올라가 전화로 통화했던 이(李) 연구사를 찾았다. 심성이 몹시 좋아 보이는 그는 친절하게도 계유명전씨의 아미타불비상에 대한 관련 자료를 스크랩해 주는 성의를 보였다. 고마웠다.

 

 그런데 당장 촬영을 해야 했다. 다행히 관람객이 거의 없어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실장에게 떼를 써 허락을 받아 촬영에 들어갔다. 자랑이랄 수는 없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급 유물도 진열장 밖으로 꺼내 물레에 올려 놓고 정밀 촬영하지 않았더냐. 그때 밤낮으로 날 도와준 손(孫) 연구사도 지금 이 사람처럼 심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업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 주는 마음까지도 그 둘은 비슷했다.

 청주의 이(李) 연구사는 행정처리 관례상 후에 촬영허가서까지 우편으로 보내주는 친절을 보여 주었지만 촬영을 이미 해치운 터라 나에겐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 다만 그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받은 셈이었다.

 어쨌든 박물관에서 도와준 덕분에 비암사아미타불석상을 마음껏 들여다보고 충분히 촬영할 수 있었다. 50cm가 채 되지 않는 높이의 석상 4면에 여러 가지 불상을 정교하게 조각했는데 앞면에는 당시 활발했던 아미타정토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으며, 좌우 양쪽 면에 피리, 거문고, 배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이 각각 4개씩 모두 8개가 손바닥만한 크기로 조각되어 있었다.

 연주자세가 금동향로의 것과 비슷하다. 이 역시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고 결국 백제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석질은 납질편암(蠟質片巖)으로 불리는 매우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었으며 석상의 또 다른 이름 계유명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阿彌陀佛三尊石像)처럼 조성시기와 성씨(姓氏) 등이 보인다. 여기에 나타난 전씨는 백제 성씨로 결국 이 석상은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발원(發原)으로 조성된 것임이 명백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금동향로의 주조 상황과 당시의 문화적 이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 사연을 생각하며 소리없이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다만 처연할 따름이다. 삼국 중에서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었던 백제는 여유 있고 느긋한 생활로 풍류와 멋을 즐겼을 것이다. 부여땅 부소산성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은 하나의 이상적인 바다로서 그들의 삶을 더욱 너그럽게 했을 것이다. 때문에 백제에는 도교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는데 향로의 주악상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등을 찔려 한 순간에 망해 버린 나라, 백제 유민들은 그들의 염원을 담아 석상을 세워 놓고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아 예전처럼 평온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또 기원했을 것이다. 원래 서 있던 자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비암사는 거기에 있었다. 비암사 가는 길은 인적이 뜸한데다가 날씨마저 우중충해 쓸쓸함이 더했다.

 표지판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 묻고 또 물어야 했는데 야산 사이로 난 비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 그 길의 끝에서 만난 사찰 비암사는 역시 생각대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비암사에는 대웅전 대신 극락전이 있으며 그 앞뜰에 높이 3m 정도의 삼층석탑이 있는데 그 탑의 정상 부분에 4면군상(四面群像)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국립청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계유명아미타불비상인데 앞서 이야기한 대로 비바람에 노출되어 풍화작용으로 인한 피해가 특히 심하므로 따로 박물관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혹시 책이나 안내문에 나와 있는 내용 이상의 것을 알고 있나 싶어 스님에게 설명을 청했으나 역시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나는 극락보전 뒤로 난 산길을 다라 운주산으로 올라본다. 왜 하필이면 운주산(雲住山)일까.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에는 비슷한 사연의 와불(臥佛)이 있지 않은가.

 그 와불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만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리는 바람에 그대로 누워 있게 됐다는…….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석상의 주악상

 

 옛 백제의 땅은 그야말로 비산비야(非山非野)로 멀리 한눈에 들어오는 산 능선들이 오누이처럼 다정다감하다. 정말 비암사는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되찾아 극락정토를 실현하겠다는 그들의 원을 담아 세운 것일까. 극락전과 그 앞의 삼층석탑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가정해보니 그곳은 틀림없이 옛 도읍 부여가 있는 땅이다. 나침반도 없고 주위에 물어볼 사람도 없지만 비암사는 그 원을 담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비암사 석상에 보이는 주악상이 금동향로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으로 금동향로의 주조장소와 시기 등에 대한 시대적 조명작업을 일단 끝냈다. 금동향로에 다만 몇 글자의 명문(銘文)만이라도 새겨 놓았더라면 흔적도 없이 그렇듯 철저히 망해 버린 백제의 옛 영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말이 없었다. 더구나 승리자에 의해 무참히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패배자였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로부터 1400여 년의 세월이 무심히 흐르고 끝내 역사의 불모지일 수밖에 없었던 그 땅에서 어느 날 한 잔영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취재한 금동향로에 대한 45분 프로그램의 영상편집을 끝내 놓고 나는 방송 원고를 작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쓰고 싶어졌다. 금동향로의 공예품적 우수성도 그렇지만 나라를 잃음으로써 그 땅의 문화까지도 무참히 짓밟힌 참담함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방송 후의 여러 반응이 있었지만 일본 아사히 TV 서울지사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의 한 재야 사학자가 금동향로가 백제시대에 주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면서 그것이 말하자면 중국의 전래품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별히 역사를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도 금동향로의 취재를 해오면서 어떤 가능성만을 제시했을 뿐 ‘이게 틀림없이 백제의 유물이요, 백제의 역사다.’ 라고 단정짓지는 못했다. 역사에 대한 추리와 단정은 그만큼 신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나 어느 만큼의 세월이 지나야 그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 줄 수 있을까.

 누가, 어떤 방법으로…….

 금동향로는 땅에서 잠시 나와 그 참았던 숨을 한번 들이켰을 뿐 다시 박물관의 밀폐된 사각 보존실에 갇혀 못내 답답해하고 있을 것이다.

 

                                                                                          (1998.11.25. 1판 2쇄 발행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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