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신문화관광재단 발행 "예인열전"에 수록)
운명의 동자승이 되다
미륵산 아리랑고개 너머로 겨울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익산시 금마면 산북리 산자락의 한 종가(宗家). 사람도 살림살이도 없이 마치 폐가처럼 방치된 집에서 홀로 산고를 치르던 여인은 마침 인근을 지나던 탁발승에 의해 가까스로 혼절을 면할 수 있었다.
신음소리와 아이울음에 놀란 스님은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 가 물을 덥히고 탁발했던 쌀로 미음을 만들어 정성으로 산모와 아이를 보살폈다. 온기라고는 엄마의 체온뿐이던 차가운 방에서 태어 난 아이는 다행히도 건강했다. 1935년 음력 정월의 일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전주 이(李)씨 회안군파 21대 종손이었지만 그동안 낳았던 일곱 자식 거의를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유아시기에 잃어야 했던 충격으로 실의에 빠져 집밖으로 떠돌았다. 방랑객 남편을 둔 몰락한 집안의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여덟째를 낳게 된 것이다.
탁발승은 그런 딱한 가정 형편을 알게 되면서 측은지심에 모자를 돕는다. 우선 아이의 이름을 인호(仁鎬)라 지어주고는 탁발 길에 수시로 아이 집에 들러 먹을 것과 생활용품을 챙겨주며 아이의 무탈함을 위해 날마다 지성으로 불공드릴 것을 아낙에게 주문한다.
탁발승의 보살핌과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아이는 여섯 살이 지나도록 건강함을 유지하며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더는 나아질 게 없는 집안 형편이었고 보니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었다. 가난을 피할 수 있는 뾰족한 방책이 없는데다 아이의 생존마저 장담할 수 없는 터라 안정적인 성장과 장래를 위해 스님은 결국 자신을 따라 아이의 입산을 권유한다. 아낙은 이런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고마워하기 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일곱 살의 아들 인호는 그동안 가족처럼 친근해진 탁발승을 따라 어머니 품을 떠나게 된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너른 땅을 지나 당도한 곳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금산사는 역사 깊은 규모 있는 대찰이었지만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등 몹시 어려웠던 시기를 겪으며 절 살림을 꾸려가야 해서 자급자족 형태로 승려생활을 하는 형편이었는데 어린 인호의 보호자 신분이 된 그 탁발승은 바로 이 금산사에 적을 둔 소진산(蘇眞山, 1960년 입적)스님이었다. 진산스님은 당시 금산사 금어(金魚) 신분으로 불교 선종 9산중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 후에 근세불교 예술계의 태두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뛰어난 화상(和尙)이었다.
그렇게 하여 인호는 아버지 같은 스님과 함께 절에서 생활하는 동자승이 되었다. 인호의 눈에는 스님이 하는 일이 모두 새롭고 신기하게 보여 자신도 스님을 따라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여 어린 인호는 진산스님의 보살핌 속에 불교 범패, 법고, 승무 등이 제례의식과 불화, 단청, 한지공예 등의 다방면의 불교예술을 직접 또는 어깨너머로 배우며 성장한다. 또 산수화, 사군자, 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두루 익힐 수 있었다. 손재주가 좋다 보니 그림뿐만 아니라 불상을 만드는 조각 일에까지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서 나름의 공력을 쌓아간다.
불우했던 가정생활
금산사에서의 동자승 인호에게 두 해가 흘러 9살이 되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려면 더 늦어지기 전에 학교교육이 필요했다. 어디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냐하는 스님의 물음에 인호는 엄마와 집터가 보고 싶다고 답하자 스님은 일단 귀향시켜 금마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다. 집에 아버지가 돌아 와 있었으나 경제력이 없었고 쇠약해진 어머니 때문에 공부와 친구대신 가사에 조력하느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도 남들보다 늦게 겨우겨우 졸업하게 되었고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더 이상은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마음 둘 곳 없던 인호는 나무 땔감을 시장에 파는 등 힘들게 생계를 유지해 갔다. 그러면서도 틈이 생길 때마다 혼자 그림을 그렸다. 화가를 환쟁이로 멸시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럴 때면 부모가 여지없이 꾸지람을 하고 화구들을 불태워버렸지만 인호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를 살리겠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세 차례나 깨물어 피를 마시게 한 효심을 보였지만 어머니의 죽음 앞에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인호는 다시 금산사로 돌아 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시자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다시 고향집을 찾아오곤 했는데 6.25의 혼란기가 끝나갈 즈음 다시 귀향한다.
1952년에 인호는 18세의 나이로 결혼하게 되는데 중매를 통해 만난 아내는 그보다 한 살 위인 여산 땅 파평 윤(尹)씨 집안의 윤옥례(현 88세). 시아버지 시누이와 함께 4식구가 종가에서 살아야했던 아내는 돈벌이는 없었지만 성품이 좋은 남편에 의지하며 고생길의 시집살림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 좋은 남편은 신혼이랄 것도 없이 첫 딸을 얻은 후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한다.
집과 가까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군복무를 하게 된 그는 그림 솜씨와 손재주가 좋았던 탓에 군 생활은 대우를 받는 편이었다. 환경미화와 군복염색 기타 막사 안팎의 시설과 보수 등에 수시로 그의 솜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군 생활에서 다져진 솜씨와 경험은 제대 후의 고향생활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금마의 면소재지 우체국 앞 쪽에 조그만 가게를 내고 소규모의 시설과 보수공사를 맡아 일을 했는데 그의 작업 능력을 인정하는 군부대에서 일감을 주기도하여 어려움 없이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끼’가 많았던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동네에서 연극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20대의 청년이고 보니 머릿속에는 항상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떠나지 않아 홀로 불쑥 상경해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며 얼마간의 시일을 보내곤 했다.
그런 사이에 아버지가 타계하고 26세가 되던 해에는 그토록 따르던 스승 진산스님이 입적한다. 그에게는 인생의 스승이이면서 생명의 은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기에 가슴 한 쪽이 허물어지는듯하여 마음 의지할 곳이 없었다.
보다 넓은 세상 속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7시간이 걸려 다시 서울에 도착했지만 마땅히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영화사의 배우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다. 영화를 보게 되는 기회가 있으면 그때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멋지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시험장에서 슬픈 연기를 한 번 해보라는 주문에 엉거주춤 흉내를 냈는데 뜻밖의 합격통보를 받는다. 그에게 분명 예(藝)의 끼가 잠재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쁨 속에 홀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27세가 되던 1961년 일이다.
신상옥 등 유명 감독 밑에서 ‘박서방’, ‘춘향전’, ‘활빈당’ 등 여러 편의 영화에 단역이나 조역으로 출연하곤 했는데 한갓 시골뜨기에 불과한 자신이 당시 인기스타였던 최무룡, 박노식, 김승호 등과 같은 톱스타 대열에 합류하여 같이 활동하고 있다는 기쁨 때문에 가슴이 벅찼다. ‘관세음보살’이란 영화에서는 출연과 함께 조감독을 맡아하며 성공한 영화인이고자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화려함 뒤에는 늘 그늘이 있기 마련, 마치 허공에 뜬 것 같은 배우생활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것이어서 그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선금 없이 개봉 후에야 받게 되는 출연료 수입이 일정치 않았고 엑스트라 역할마저 차츰 끊기게 되자 낙담하여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넓은 곳에서 날갯짓을 하고 싶어 하던 그의 꿈은 단지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었다.
좌절과 의욕상실 속에 서울생활을 버틸 수 있는 다른 뭔가를 찾아 막연히 종로거리를 배회하던 중 상여를 만들어 파는 가게를 발견하게 된다. 순간 감춰져있는 자신의 손재주를 생각하며 이것이다 싶었다. 예상대로 그의 솜씨는 곧바로 주인의 인정을 받았다. 그가 종이로 꽃을 만들어 장식한 꽃상여는 유난히 돋보여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가게는 날로 번창해 갔다.
최연소의 문화재 화공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지자 그는 고향의 가족을 불러 올려 서울 금호동 변두리에 단칸방을 얻어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알뜰히 벌어 모은 돈을 종자돈 삼아 파고다공원 앞에 자신의 아호를 딴 ‘인도불사(引導佛寺)’를 내고 상여를 비롯한 탱화 등의 불교 관련 그림과 조형물들을 만들어 팔았다.
그의 솜씨는 소문이 나기 시작해 조금씩 여유가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판소리 박초월 명창 문하에 들어 가 판소리 다섯마당과 민요를 사사받았고 그런가 하면 마치 영혼으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같은 춤사위에 매료되어 승무와 법고를 함께 배웠다. 박명창의 해외 공연 일정이 있을 때면 일본, 베트남, 태국 등지에 따라가 관중 앞에서 자신의 기예를 선보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듯 서울생활을 통해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단청에 관한 것이었다.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5색을 기본으로 사찰과 고궁, 사당 등의 건축물에 여러 형태의 무늬와 그림으로 아름답게 꾸며지는 일에 매료되어 불교 예술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싶어졌다. 이미 남산 팔각정의 단청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으로 자신을 얻었기에 어디의 어떤 대상이든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것은 또 오늘의 자신이 있도록 만들어 준 스승 진산스님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 자신의 주된 진로로 결정하고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단청 하나만으로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비단 같았고 멀리에서 보면 오방색의 조화가 화려하였다. 밑그림을 그리는 초 작업부터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고 문양기법이 모두 다르기에 특유의 예술적 감각으로 정교하게 표현하는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었지만 자신만의 솜씨를 드러낼 수 있었다. 특히 안료의 접착강도 조절과 각종 성분의 배합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비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큰 포부를 갖고 의욕적으로 출발한 단청일은 그에게 큰 상처로 돌아온다. 충청도의 한 사찰 단청 작업을 의뢰받아 작업반을 꾸미고 본격적인 채색 일에 착수했는데 사찰 사정으로 공사비용을 결제 받지 못해 임금도 제대로 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작업 특성상 예닐곱 명에서부터 많게는 20여 명 정도가 함께 팀을 이루어 일하는지라 초기 자금이 적지 않게 투입되고 보니 이 때문에 사업의 진퇴를 결정해야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실의에 빠진 그의 딱한 소식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손경산(孫京山) 스님이 우연히 전해 듣고는 다른 사찰 일거리를 주선하여 재기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에게 맡긴 서울 적조암 단청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그의 솜씨에 감탄한 경산스님은 다시 보다 규모가 큰 강원도 건봉사 단청을 맡긴다.
1964년의 이 단청 작업이 훌륭하게 진행되어가자 어느 날 건봉사 강단에서 대법회를 가진 스님이 그 자리에 모인 불자들에게 설법했던 내용 중에서 ‘끌 인(引)’과 ‘이끌 도(導)’ 두 자를 그에게 아호로 내려준다. 어렵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의 중생들을 종교적인 예술을 통해 밝게 이끌도록 하라는 주문이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금어화사(金魚畵師) 인도’라고 호칭하도록 별도의 계(戒)’를 함께 주었다. 또 불교국제포교 자격을 주어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착실한 불교전도자가 되어줄 것을 당부한다. 인도는 실지로 중국을 가끔 오가며 포교활동을 했고 달마선사가 9년간 면벽 수도했다는 소림사를 찾아 그의 수행정진에 감복하였다. 경산스님은 계속해서 그에서 여러 사찰의 단청작업을 맡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치 비단에 수를 놓듯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장엄하게 치장하는 단청의 세계는 사뭇 복잡 다양하고 오묘하여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청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고귀함이라는 생각에 작업에 임할 때면 육식을 삼가고 언행을 조심했으며 목욕재계한 후 깨끗한 옷을 입었다. 또한 주로 정월과 5월, 9월의 초하루나 보름에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택일을 엄격히 하며 단청 일에 매진했다.
건봉사 단청은 그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후 대략 1965년부터 1978년까지 그의 단청 솜씨는 전국 곳곳으로 진출하며 후세에도 부끄럽지 않겠다는 다짐과 자부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는데 서울 덕수궁 대한문, 공주 마곡사, 아산 현충사, 밀양 표충사, 삼천포 운흥사, 춘천 봉덕사, 해남 대흥사, 광주 장열사, 여수 우수영 충무공 사당, 제주 법화사, 서울 화계사, 익산 천마사(그의 고향인 군부대 법당) 등 전국 각지의 고궁과 사찰, 서원 등을 오가며 작업했다.
그의 단창솜씨는 수원 용주사 단청작업에서 더욱 빛난다. 용주사 단청불사 중에 단청시공에 대한 전문 기능인 자격을 취득하게 되는데 시험에 통과하여 정부의 ‘문화재 화공 164호’로 지정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 이던 1969년, 전국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가 인정하는 단청인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의 뛰어난 솜씨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단청을 배운 단청장 양용호(서울 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제자 10여 명이 현재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들을 가르친 스승에게는 그런 명예로운 장인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는 문화재 화공 칭호만으로 남들이 인정하는 독보적 위치에 올라 서 있는 것이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신분상승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서 대략 80여 명의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불교계에서는 종단에서 정한 불교문화재 185호로 등록하여 그를 단청 장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백태달마(百態達摩)
중국 소림사에서 특히 마음에 새기게 된 달마와의 인연은 그를 유명한 달마작가로도 입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선승 달마는 소림사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선종(禪宗)을 창시했기에 불교계에서는 깨달음과 선(禪)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 숭배한다. 무심한 듯 혹은 수심에 찬 듯 묘한 얼굴 표정에 짙은 눈썹과 부릅뜬 눈, 텁수룩한 수염 모습을 한 달마의 형상은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와 광고 등을 통해 우리에게도 친근해진 인물이다.
달마의 인물도는 액운을 물리치고 좋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민간에서도 그의 그림을 많이 선호하고 있는데 달마를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필법이나 구성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무심(無心)과 자유, 절대 공(空)과 같은 세계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므로 마음 수련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선의 세계, 작가정신이 철저히 녹아들어가야 하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인도 이인호는 동진(童眞) 출가하여 늘 깨끗한 마음과 몸을 유지했던 사찰 수행과정과 무관하지 않기에 달마를 누구보다도 잘 그려낼 수 있었다. 그동안의 보아왔던 천편일률적인 수많은 달마도 형태에 그는 그동안 축적한 자신만의 단청기법을 응용하여 채색기법을 도입하고 기하학적 문양을 시도해서 역시 그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담아냈다.
자신의 독창적 세계 구축을 위한 그의 치열한 탐구 자세는 그가 직접 발간한 자료집인 ‘백태달마 단청문양집’(1986년 발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만들어내기 열 달 전에 자신의 예술인생을 총정리 하는 의미에서 화집 ‘인도 이인호 예도 50년’을 발간하여 화조화, 산수화, 불화, 목각, 승무 등 그동안 자신이 펼쳐 온 예술세계를 담아낸 바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달마도였기에 얼마 후 다시 별도의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자신 그동안 달마도를 습작해 오면서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는 교재가 없었기에 오직 후학을 위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낸 사연도 있다. 책자에서는 달마의 눈과 귀, 입 그리고 손과 발 등 신체 일부분 하나하나를 수백 수천 번 묘사했고 수백 가지의 달마 모습을 표현해 보여 궁극적으로 달마선사가 추구했던 선의 세계로 다가가려 했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기교보다는 우선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마음 수행부터 해야 함을 늘 실천했기에 그가 원하는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달마도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의 작품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서울 금호동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확장하여 문을 연 ‘인도(引導) 화실’은 전국 각지에서 애호가들이 몰려 와 그의 그림을 구입할 정도가 되었고 덕분에 좀 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은 예인의 길을 걷겠다는 초심을 살리고 자신의 궁핍했던 지난 삶을 생각하며 빚에 시달리는 이에게 쌀가마를 전달하는 등 불우한 처지의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그의 그림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나눠 주거나 기증했다.
그 혼자서 10기(技) 80종(種)
그의 뛰어난 재능은 단청과 달마도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형태의 불화와 산수화, 사군자, 화조도, 서예 등 종이와 먹과 물감만 있으면 거침없이 붓을 놀릴 정도로 무한대였고 그림의 영역뿐만 아닌 조각, 법고, 승무, 제례음식, 판소리, 무용, 민요, 기악, 농악, 도자기, 한복, 살풀이, 나비춤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 때문에 어찌 생각하면 수준이 모두 고만고만하여 어느 것 하나 특출할 게 없지 않느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모두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가 능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천부적 기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1981년 서울 여의도에서 있었던 대규모 국민문화축제인 ‘국풍 81’행사에서 개막을 알리는 법고치기와 승무를 담당했을 정도였고(미망인 윤옥례의 회고에 의하면 군중 앞에서의 이 순간을 생애 중 가장 뿌듯한 일로 기억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의 마한문화축제, 익산시민회관에서 가졌던 국악공연이나 인간문화재 초청공연 등에서도 법고와 승무로 관중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또 1979년에 만들어진 ‘한국전통국악예술단’에서는 단장을 맡아 전국 주요도시 순회공연을 비롯해서 일본과 동남아 일대의 해외 공연을 갖는다. 그는 범패로부터 시작하여 나비춤, 승무, 바라춤, 살풀이, 법고, 해탈로 이어지는 불교 제례에서의 작법(作法)을 선보이는 등 전문가로서의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미국 LA에서의 한국의 날 공연을 비롯해서 일본 야마구치에서의 국악 교류공연 등의 해외 공연에서도 한국전통예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다섯 차례에 걸쳐 불경봉독 위주의 레코드 취입을 한 바 있는데 그가 부른 회심곡은 너무 애절하여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온통 기예의 끼가 넘쳐나는 가히 천부적인 능력으로 인해 그에게 10기80종의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그를 아는 주변인들이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다지도 잘하는 게 많은가?’ 라고 자주 질문해 와 어느 닐 스스로 가만히 헤아려 보니 대충 열 가지 정도에 여든 종류는 할 수 있는 것 같아 ‘10기 80종’이란 용어를 쓰게 되었는데 그게 기정사실화 되어 모두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서 그의 별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듯 그의 재능이 어디까지인지 모를 만큼 거침이 없어 자천타천 10기80종 인물이 된 셈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잘 아는 지인이 도무지 그의 능력을 검증할 수 없어 한 번은 이름난 점술가를 찾아 몰래 사주를 들이밀어 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사명대사’처럼 크게 될 인물인데 중도에 포기(환속)해서 안타깝다’고 하며 너무 많은 재주를 갖고 있어 제대로 길을 갔다면 역사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칠 손꼽는 예술가가 되었을 인물이라고 했다고 하더란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나 그런 그의 비범함이 이제는 그저 단순한 일화로만 전하게 됨이 아쉬울 따름이다.
전시회와 작품세계
인도 이인호는 서울 생활을 시작한 후 그동안 자신이 그려왔던 작품들을 모아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갖는다. 1979년 5월 서울 신문회관에서의 첫 작품전에는 불교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고 이미 그를 후원하는 모임까지 생겨나 적극적인 호응을 받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자신의 전시회에 감복하여 인사말에서 지난 40여 년 세월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피맺힌 눈물과 역경의 고된 길을 걸어 왔음을 토로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 품을 떠나 출가한 후 자수성가하기까지의 힘들고 괴로웠던 인생역정이 한순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인내와 고통이 있었기에 보는 이의 공감과 감탄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의 탱화, 산수화, 달마도 등을 보며 선교종 종정이었던 일붕 서경보(1914∽1996)스님은 인도 이인호 작품에는 심미적 기품과 도의적이고 철학적 예술성이 담겨있어 이제 그가 금어지좌(金魚之座)에 올라 불교미술에서의 큰 별이 되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의 작품은 선이 굵고 간결하며 대담했으며 때로는 섬세하고 사실적이었다. 본그림에 앞서 미리 스케치하는 경우가 없었고 또 재칠이 없는 단필법을 사용하여 붓의 선이 선명하고 강하였다. 하여 보는 이마다 마치 비단 그 자체를 대하는 것 같다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는 또 탱화의 경우 검은 바탕 면에 금선(金線)으로 그림을 그린 흑(黑)탱화와 붉은 바탕에 그린 홍(紅)탱화를 만들어 내는 창작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어떻든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후 전주, 광주, 인천, 제주, 부산, 대구, 경주, 의정부 그리고 고향 익산 등 전국 각지에서 개인전 또는 초대전을 갖게 되며 해외에도 이름이 알려져 멀리 미국 뉴욕을 비롯한 워싱턴, 시카고 등지의 주요도시와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의 초대전시를 갖는 등 도예전과 소장품전을 포함하여 모두 40여 차례가 넘는 전시회를 갖게 된다. 전시장 한 쪽에는 별도 공간을 마련해 매번 자신의 춤을 함께 보여주는 것으로 방문객을 맞았다.
그런가 하면 KBS와 일본 NHK를 비롯한 방송프로그램에서의 출연과 신문에서의 인터뷰 등 혼자서 일정을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생활을 보내기도 했으며 요미우리신문 같은 매체에서는 그를 ‘한국의 천재예술가’라고 지칭하며 그의 작품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
단청의 경우는 1971년 수원 용주사의 단청과 벽화작업을 하면서 대웅전 후불탱화의 사실적이고도 입체적인 인물표현, 명암법을 이용한 채색법 등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았다. 백제 법왕2년(서기600년)에 창건되어 고려와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와 역사를 함께 해온 금산사에서의 화업과 그의 오롯한 불심이 합쳐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적 가치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20여 년 간의 사찰 생활 과정으로 불교문화 전반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고 주위사람들에게 술회한 바 있는데 오랜 경험이 쌓이면 기교가 절로 늘어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불화는 부처님을 일념으로 공경하는 불모(佛母)로서의 참다운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불화의 경우 보는 이의 시선이 상하좌우 어디이든 불상의 시선과 정면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고심하며 그렸다.
또 하나는 작품에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다. 어느 날 풍속화와 인물화의 대가인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던 중에 ‘그림은 기교가 아닌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니 늘 자연과 대화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듣고는 자연의 이치에 거스름이 없도록 겉치장에 신경 쓰지 않고 순리대로의 삶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의 능력과 의욕적인 활동이 알려지면서 적지 않은 단체의 직함을 맡아 공적 사회활동을 한다.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단청분과회장, 한국미술작가협의회 회장, 한국서화가협회 회장, 한국국악협회 이사, 한국전통국악예술단 단장, 국제불교전통국악예술원 원장, 한국미술작가협회 회장 등등 일일이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상의 이력도 만만치 않다. 1968년 국회의장 상을 비롯한 1977년 한국불교미술대전 대상 등 주요 신문사 대학, 단체에서 크고 작은 상을 두루 받았다. 그 가운데 자신의 불화에 대해 수준과 가치를 인정해 준 동국대 총장상에 그는 특히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평소 간절히 원했던 것들이 이루어지고 차츰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많은 영예가 짐이 됨을 느끼기 시작한다. 물질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서울생활이었으나 살림살이의 풍족함이 그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진 못했다. 그럴수록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땅이 늘 머릿속에 그려지며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에는 그를 포근히 감싸주는 나지막한 산들과 너른 들판, 그 사이에 언제나 정겨운 실개천과 고샅길이 있었고 신명나는 농악 가락과 구수한 판소리가 있었다. 마한과 백제의 후예임을 일깨우는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5층석탑도 무연히 서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 시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어져 귀향 의사를 굳히게 된다.
익산문화를 꽃 피우다
1991년, 37년간이란 긴 세월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57세가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울을 떠나 귀향하게 되면 문화원 일을 맡아 본격적으로 고향 문화발전을 위해 일을 꾸려가고 싶은 게 소망이었다. 그런 그의 계획에 당시 익산고적선양회((益山古蹟宣揚會)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채남석(현 72세)씨로 부터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고적선양회 회장은 향토사학자 송상규(1998년 작고)씨가 맡고 있었고 초대 익산문화원장 역시 송상규씨가 맡고 있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계속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과거 마한문화제 때면 어김없이 고향에 내려 와 봉사하며 고향문화를 위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이인호의 진정성을 곁에서 보면서 채남석은 문화원장 후임으로의 승계에 그를 주변에 적극 추천한다.
1991년 5월24일, 이인호는 제2대 익산문화원장으로 임명을 받아 취임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 활동하며 쌓아올린 그의 전통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업적 그리고 지역문화를 생각하는 그의 애정과 능력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직제 상 부원장직을 맡게 된 채남석은 자신의 집에서 우선 몇 달 동안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금마에서 함열 소재 문화원까지의 왕복 30여 Km 거리를 자신이 직접 운전하며 출퇴근길을 돕는다.
익산문화원은 함열읍 남당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익산군의 단층짜리 부속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는 업무공간에 예산이라고 해야 겨우 직원 인건비와 시설운영비를 충당할 정도의 미미한 액수였고 또 직원이라고는 달랑 사무국장(곽지근) 1명 뿐 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취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문화관광부로부터는 시범문화원으로 지정받아 군민회관 내에 ‘공간 사랑방’을 꾸미고 문화예술인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를 만들었는데 그는 서울 본가와 왕래하지도 않은 채 아예 문화원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며 문화원 생활에만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1992년 5월에는 제주도의 전북도민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회관 건립을 지원한다. 평소 가까이 교류하던 제주거주 지인으로부터 동향인 도민회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듣고 자신의 능력으로 건물을 지어주고 싶었다. 익산이라는 제한된 지역 안에서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있는 관련 단체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61년에 설됩된 이리문화원과 1990년의 익산문화원이 같은 해에 지금의 ‘익산문화원’으로 통합되면서 그는 통합 문화원의 초대 원장 직을 수행한다. 함열에 위치한 문화원은 접근성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형편이어서 우선 새로운 건물 신축이 절실했다. 문화원건립 계획 수립과 건립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알기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4억여 원에 상당하는 국내 유명예술가 작품을 내 놓으면서 현안문제들을 챙겨갔다. 태생적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시에 책정된 공사비 외에 자신의 미술작품까지 팔아서라도 비용을 충당해야만 했다. 새로 만들어질 건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보니 지붕에 기와를 올린 한옥 형태의 2층 건물 외관과 내부 구조의 설계 시안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1997년에 현 익산시 어양동에 넓은 면적을 확보하고 착공하기에 이른다.
1998년에는 신라고도 경주문화원과의 자매결연을 통해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전설을 축제형식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가는 등 오직 익산의 문화발전을 위한다는 그의 노력과 실천아 하나씩 실현되고 있었다.
익산문화원은 드디어 2000년 9월에 신청사 개원식을 갖게 된다. 이후로는 건물의 위상에 걸 맞는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 과제였다. 1990년 시작된 익산문화 관련 기록화 작업을 이어받아 익산 지역의 유·무형의 문화유산과 인물 등을 망라한 ‘익산농악’, ‘익산 목발노래와 삼기농요’, ‘익산의 만가(輓歌)’와 ‘익산의 전래지명고(地名考)’, ‘익산금석문대관‘, ‘익산의 절터와 전통사찰’, ’익산의 누정·서원·사원‘ 등 총 17집에 이르는 ‘익산문화총서’를 발간 해 냈다. 1997년에 발간한 제 10집 ‘고도 익산 순례’는 익산지역에 산재한 백제시대 유적을 비롯한 각종의 문화유산을 담아 이 지역 문화답사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고, 2001년 6월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자료들을 꾸준히 모아 그의 학문적 업적을 집약한 책자 2권을 출간(최승범 집필)하는 등 익산문화의 원형 탐구와 그 보존을 위한 기반을 착실히 다지며 전통문화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게 하였다. 발간에 따른 재원이 부족하여 한정 부수 밖에 발행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여건에서도 오직 고향 문화를 생각하는 사명감으로 지속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특히 우리 전통 민속에 관심이 많았다. 산업화 추세 속에 점차 사라져 가거나 명맥이 끊긴 고유의 전통문화를 발굴하는데 주력하여 일제 강점기 때 또는 196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자취를 감췄던 민속을 다시 찾아냈다. 1997년에는 ‘웅포 용왕제’를 발굴함과 동시에 그 해 제3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이듬해 1998년에는 금강 유역에서 전해오던 ‘성당포구 별신제’를 재현하고 2001년에는 고향 금마의 ‘인석달집놀이’를 재현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의 인맥을 충분히 활용하여 중앙에서 활동하는 국악인들을 즐겨 초청하여 공연을 가졌다. 한 예로 1999년 11월 익산 시민회관 공연에서는 판소리 오정숙, 줄풍류 강낙승 등을 초청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수준높은 관람의 기회를 만들어 줬고 그 자신은 승무와 법고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공연은 수시로 이뤄졌지만 2002년 인간문화재 명인명창 초청공연에서는 그 자신이 출연하여 법고춤을 선보이다가 과로로 쓰러졌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그의 고향을 위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그가 만든 ‘익산메아리’라는 노래에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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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마한 터에 문화사적 많고 많다
오늘도 문화역사 되새기면서
푸짐한 익산으로 모두 모두 모여라
문화와 멋고장 예술의 고장 우리 모두 다 같이 보존하면서
익히고 배우며 꽃밭을 이뤄 마한의 문화유산 길이 빛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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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가 노랫말을 짓고 명창 조통달이 곡을 붙였으며 이생강의 대금연주에 그가 단장으로 있던 한국전통국악에술단이 합창에 참여했는데 노래교실과 카세트로 제작을 통해 널리 보급되기도 했었다.
과거는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원의 역할이 지방문화의 보존과 전승이라는 점에 소홀함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문화가 중앙집권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이제부터는 지역인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문화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익산지역에 필요한 새로운 프로그램 마련을 위해 고심했다. 그런 열정으로 그는 임기 4년의 원장직을 내리 3번에 걸쳐 연임하게 된다. 문화원장직을 맡아 줄곧 12년 동안 수행해 오는 동안 그러한 그의 마음가짐이 투영되어 문화원의 역할과 기능이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 그 위상과 존재감이 커져갔다.
이제 퇴임 3개월을 앞두고 2003년 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문화학교’로 지정받게 된다. 지역 문화예술의 활성화와 전승차원에서 민요와 사물, 한국무용 등 전통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의 강좌를 개설하고는 보다 많은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교육과 소통의 개방된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의 나이 69세. 칠십 문턱이 되도록 오직 고향의 문화 활성화만을 생각하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 새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2003년 6월30일, 문화원을 떠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의 열정과 희생으로 인해 문화원이 고향 익산의 소중한 문화의 터전으로 인식되고 자리매김 되었다면 그보다 보람된 일이 없을 것이었다. 평소 가정에의 무심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미안함도 보상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익산문화원을 시범문화원으로 육성 발전시키고 지역 고유문화의 계발과 보급, 향토문화 전반에 걸친 조사연구와 기록화 작업 수행 그리고 문화행사 발굴과 개최 등 익산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7년 4월에 ‘익산시민의 장’을 수여받게 된다. 퇴임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고향의 문화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며 고향에서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의 이름으로 증정된 것이어서 그 의미와 가치가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기부활동을 통해 고향을 도운 공로로 1984년에도 ‘익산군민의 장(공익장)’을 수상한 바가 있고 지역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6년 향토문화대상, 2004년 세계문화 예술대상, 2005년 문화부장관상 등을 수상한 바 있지만 이번의 상은 시민의 상이었기에 가장 기뻐하며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예도원’과 외길 여정의 마무리
문화원 생활을 떠난 후에도 고향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가짐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다음 해인 2004년에 고희를 맞아 그가 구입했거나 소장하고 있던 남농 허백련 화백의 그림 등 국내 저명 작가 50여 명의 작품들을 또 다시 내놓아 봉사 기금으로 활용토록 했다. 또 그가 직접 그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작품인 정방폭포 산수화 등을 전북도청을 비롯한 문화원, 농협 등 주요 공공시설에 기증하며 무엇보다도 문화를 생각하는 고향분위기를 만들어 가는데 힘을 보탰다. 그는 후배들이나 지인들에게 그가 갖고 있는 문화재산을 아무런 대가없이 물려줘서 후대에 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말해왔음을 실천한 것이다.
퇴임 후의 그에게는 “예도원(藝道苑)‘이라는 또 하나의 소중한 공간이 있었다. 고향에 내려 와 익산문화원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고, 한편으로 공적인 문화원 시설과 함께 보다 자유롭게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곳은 아무래도 본인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땅 금마에 위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지금의 위치에 입지 선정을 끝나고 공사에 들어 가 문화원장 취임 이듬해인 1992년에 완공한다. 그가 태어난 마을과 지척이며 면소재지와도 불과 1분 남짓 거리에 뒤로는 용화산이 있고 앞으로 제석사지가 있는 그의 삶의 터전이자 문화공간이었다. 자신은 문화원 업무에만 집중하느라 공사를 업자에게만 맡겨놓은 바람에 공사 중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고통이 있었지만 드디어 1월23일에 준공식을 갖게 된다. 차가운 겨울날씨임에도 문화예술인과 시민 등 천 여명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자리에서 그는 ’우리 익산은 천 여 년의 문화를 꽃피워 온 곳이다. 그러나 그 계승에 소홀함이 없지 않아 여생을 후진 양성에 바치겠다‘고 선언하여 박수를 받았다. 그가 한평생 걸어 온 길이 예도라 여겼으므로 당호를 ‘예도원(藝道苑)’이라 이름 했으며 고향땅의 문화인들을 위한 만남과 전시, 공연 장소로 탄생시킨 것이다.
백 여 평 남짓의 공간에 2층은 자신의 화실로 사용하고, 1층은 거실을 중심으로 각 방을 칸막이 식의 부채꼴로 배치해 누구든 이용토록 했으며 필요시 소규모 공연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또 별채는 국악협회 지부, 고적선양회, 미술작가협의회 등의 업무공간으로 내 놓았다. 그리고는 그의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판소리 박동진 선생을 비롯한 안비취, 김뻑국, 고춘자 등등 국내 유명 문화인들을 초대하여 수시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마당을 펼쳤다.
판소리 명창 조통달도 그가 권유해서 그의 집 앞쪽에 전수관이 지어진 만큼 수시로 교류했다. 또 그의 예도원 바로 옆으로는 ‘익산 기세배놀이(전북무형문화재25호) 전수관’이 있다. 1976년에 발굴되고 198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그의 고향 금마의 민속이다. 그러나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하며 농기(農旗)와 용(龍旗)를 직접 제작하고 진법(陣法)을 연구해 교재로 만들어 공유하며 보다 널리 알려 함께 향유하고자 했다.
그 자신 어느 덧 노년에 접어들었기에 변변한 노인들의 쉼터가 가까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역시 사재를 털어 이리와 함열 두 곳에 노인회관을 지어 주고 전북 체육성금을 기탁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애향과 봉사의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왕성했던 사회 활동과 봉사에 비해 정작 그의 가정은 여유가 없었다. 아내 문옥례(88)여사와의 사이에 1녀 3남을 두었지만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아 집에서는 궁핍을 면할 정도의 검소한 생활로 일관해야 했고 한 때는 지인이 쌀과 연탄 등의 생필품을 구입해 줄 정도로 집보다는 바깥의 문화 활동이 늘 우선이었다. 그런 남편을 아내는 묵묵히 내조했다. 남편은 남들 다 가는 여행 한 번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지만 집으로 찾아드는 그 많은 손님들을 대접함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다. 병간호 같은 힘든 일들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는 한 때 너무 업무와 작품 제작에 몰두하는 바람에 당뇨와 고혈압으로 고생한 바 있었고 한 번은 자매결연한 곳과의 업무를 마치고 제주도에서 귀향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의사의 사망판정까지 내려졌지만 얼마 후 다시 숨을 내쉬게 된 기적을 만들었다. 그는 그 때 이승과 결별하여 사후세계를 경험했다고 들려주곤 했는데 이후 12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투병 이력이 있다. 아내는 더 이상의 문화 활동을 만류하며 이제 그만 여생을 편하게 보내자고 했지만 투병 끝에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갖게 된 그는 오히려 더 의욕적으로 변했다. 그가 가진 능력을 더욱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고향의 문화에 관광이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통망 확충으로 이웃과 생활권이 급속히 가까워졌고 경제적 여유로움으로 여가활용의 기회가 많아졌으니 익산의 역사문화 자원들이 관광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륵사지와 오금산성, 마룡지, 쌍릉을 잇는 연계 관광도로가 만들어지고 독특한 관광상품이 개발되어야 하며 쾌적한 숙박시설이 갖춰져야 한다고 내다봤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2015년 익산의 백제유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잘 간파한 것이었다.
새봄이 오자 집 앞 길섶마다 노오란 민들레가 다투어 피고 주변 야산에 연분홍의 진달래가 아름다웠다.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전시회를 위해 그는 날마다 화실에서 준비 작업에 몰두했으며 일부는 표구를 의뢰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계속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 되었을 전시회를 불과 1주일을 앞두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소천한 2012년 4월 23일 다음날, 한 일간신문에서 익산의 문화에 남다른 흔적을 남긴 ‘지역 문화예술계의 거목’이 7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그의 부음을 전한다.
익산문화야 歲月(세월)이에게 물어 봐
我人(아인) 이 곳 머물던 자리
世間(세간)만 어질러 놓고 어제 바위에 박혀
藝道(예도)를 잉태하고 있다고.
금마에서 왕궁으로 가는 도로 옆에 서있는 주인 잃은 비석이 홀로 스산하다. 음각으로 새겨져있는 시구는 그가 직접 지었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의 집 앞에 세웠다. 세월의 흐름 속에 덧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본질 문제와 자주 맞닥트리며 어쩌면 그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여기에 터를 잡아 여생을 보내겠다며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울 때 불과 십 수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인간사 꿈결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 않았겠는가.
출가하면서 평생을 부처님과 함께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게 늘 마음속 회한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불모(佛母)의 길을 평생 걸을 수 있어 행복했다는 사람 ‘인도(引導) 이인호(李仁鎬)’.
하여 지금 비록 그는 육신의 옷을 벗어 스스로 바위 속에 감췄을지라도 그의 맑은 영혼은 부처의 세계에 가 있을 것이고, 눈비 관계없이 그 어느 날이든 더러는 새가 되고, 더러는 나비가 되어 그가 그리도 사랑했던 고향의 예도(藝道) 위를 훨훨 날고 있을 것이다.
-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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