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이야기

내 마음의 숲

소나무 01 2009. 12. 25. 20:40

 

 

 

 

 숲에 들어오면 언제나 경이로운 세상이다. 봄에 하얗게 꽃피어 향기 그윽하던 때죽나무가 지금은 가지 아래로 종(鐘)모양의 열매를 잔뜩 매달았고 졸참나무엔 형제 같은 도토리들이 따글따글 여물었다. 자주 눈에 띄는 싸리나무에는 아직 자주색 꽃이 한창이어서 아직은 초록물결인 나뭇잎마다에 점점이 아름다운 수를 놓았다. 자주 찾아가는 눈에 훤한 숲 속 풍경인데도 그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목격하게되고 느낌 또한 사뭇 다르다.

 

 산에 나무가 무성하여 신림(新林)이라 이름 붙인 동네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나로서는 산과의 인연이 필연인 듯 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편이다. 집을 나서면 곧바로 호젓한 오솔길로 연결이 되고 그 길을 따라가면 평소 창 밖으로 늘 대하는 호암산이다. 이곳엔 주로 소나무나 신갈나무 같은 참나무 류가 숲을 이뤄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계절마다 색다른 감흥을 선물한다. 생강나무의 샛노란 꽃이 맨 먼저 봄을 알리면 팥배나무, 병꽃나무에서 연달아 꽃이 피고 나무들 사이로 애기나리, 각시붓꽃, 산괴불주머니같은 야생화들이 다투어 피어나 나는 그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녹음으로 한껏 푸르러진 여름 숲 속에서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피톤치드같은 방향성 살균물질에 매료되어 심호흡을 거듭하게 되고 작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청정수에 때묻은 마음까지 말끔히 씻어내기를 반복하면 산은 서서히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빨갛게 익은 청미래덩굴이나 보라색의 노린재나무열매도 정겹지만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건너 편 산자락의 오색단풍을 감상하는 기분이 황홀하다. 겨울이면 겨울대로 가지마다에 피어 난 순백의 눈꽃 향연 속에 허리 아래로 낮게 날아다니는 박새의 몸짓 같은 것에서 산에 존재하는 뭇 생명체들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된다. 복잡하고 삭막한 인공의 서울에 살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언제부턴가 산이 터전인 나무들이 저마다 들어 와 살고 있게 된 고마움 때문이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면 우리네 집들은 산과 산 사이에 자리하거나 산줄기가 기다랗게 에두르고 있어 세상 모습이 아늑하다. 산은 녹색의 띠를 이루며 집을 감싸고 집은 산의 품안에 의지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무연히 서있으면서 욕심부리지 마라 타이르며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지혜를 말없이 가르쳐 준다.

 

 숲 속에 들어 와 나 혼자만의 생각들과 몸짓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서 나무들과 대화하면 그것만으로도 공허한 마음에 위안이 되고 가끔씩 버겁다고 느껴지는 삶이 구름처럼 가벼워지곤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고 다시 오르고 내려오는 힘겨움과 희열의 반복 속에 인생의 질곡이 또한 거기 있음도 알게 된다. 숲이 보여주는 묵언의 교훈이다.

창세기에 창조주가 맨 처음 하늘과 땅을 지어낸 후 사흘 째 되는 날에 땅에서 푸른 움이 돋도록 하여 꽃과 열매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데 조물주가 만들어 낸 초록의 신비스러운 작품 앞에 다만 겸허할 따름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노력이 보태져서 우리 주변의 숲이 더욱 건강해지고 있음을 본다. 허허로운 민둥산이기에 가슴 아팠던 과거 수 십 년 전의 산들은 이제 길이 아니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해져서 산마다의 그 푸른 모습이 늠름하고 자랑스럽다.

  

 

 내 집 앞산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해 전 비탈진 허술한 곳과 빈터에 심어졌던 잣나무들이 어느 새 우람하게 자라 빼곡이 숲을 이뤘다. 약수터 옆으로 나뭇가지를 찔러놓은 것 같았던 밤나무들도 몇 년 사이에 큰 나무로 성장하여 토실토실한 밤송이가 올해엔 많이도 열렸다. 얼마 안 있으면 인근의 상수리나무 밑을 포함하여 밤,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무가 우리에게 먹거리까지 제공해 준다는 점도 좋지만 다람쥐나 청설모같은 야생동물에게 요긴한 양식을 만들어 주기에 더욱 소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시 한 켠에서 그런 살가운 산촌정경을 대할 수 있다는 것에서 마음이 훈훈하고 따뜻해진다.

 

 사람에게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이른 바 자연 귀속 본능이다. 몇 년 후 서울생활을 정리하게 되면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미륵산이라 이름한 남쪽 고향마을 산자락에 정착하여 살겠노라고 준비하고 있다. 나는 수시로 아내와 함께 찾아 가 소나무와 자귀나무, 단풍나무 등이 서로 형제처럼 자라고 있는 그 곳에 다시 감나무와 호두나무, 살구 같은 과수를 심어 가꾸고 있다. 나무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어 건강하게 자라 주변을 더욱 푸르게 만들어 주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훌쩍 커져서 주변 숲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보여 줄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투명한 햇볕이 단풍잎에 내려앉아 문득 산길을 걷고 싶어 집을 나서면 거기 가을 숲에서 또 다른 많은 나무들과 새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나는 그 때마다 그 앞에 머무르면서 서로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며 언제나처럼 상념에 잠길 것이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산과 숲 그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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