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이야기

끝없는 유정천리

소나무 01 2009. 12. 26. 01:11

 

 

 

 

 

 전주에서의 두 번 째 가을을 맞는다. 사람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어 가을이면 누구나 고향생각이 각별할 진데 전주에서의 직장생활로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와 있는 셈이다. 내가 줄곧 학창시절을 보냈던 익산이나 이곳 전주나 지금은 이 두 곳이 불과 30분 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고향의 서정을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이면 누런 들판 저 멀리로 발갛게 노을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 시려 보기도 하고 산자락에서 만나는 구절초의 청초한 모습에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내가 가장 많이 찾았던 미륵산의 산자락에 사시는 팔순의 할머니는 당신께서 수확한 콩이라며 한 바가지를 통째로 내밀며 가서 밥에 넣어 먹어라 했다. 수확 때까지 당신의 손이 얼마나 갔을까 싶어 미안한 마음에 거절에 거절을 거듭해도 사람 정이 그런 게 아니라며 까칠한 손으로 한사코 팔목을 붙잡는 바람에 가슴이 저몄다. 그래도 끝내 마다하고 돌아섰지만 지금 생각하면 받아왔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정하게 한 것 같아 후회하고 있다. 할머니의 ‘주는 즐거움’을 외면하여 괜히 가슴을 아프게 해 드린 것 같아서다.

 다시 찾은 고향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런 모습들 때문에 두 분이 지금도 고향 땅에 살아 계심을 본다.

 

 아버지 어머니에겐 그럴만한 노래가 있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아리랑밖에 더는 흥얼거릴 줄 모르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나도 유향가(유행가)를 배워야겠다며 나훈아의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 세상~ ’으로 시작되는 가사와 멜로디를 열심히 익혀서는 적절한 기회에 풀어 놓으셨다. 어머니의 한 맺힘과 간절한 바람이 그 가사에 함축되어 있었지만 결국 노래의 끝이 ‘구름 머무는 고향 땅에서 너와 함께 살리라~ ’는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마무리되었고 보면 어머니의 이상향은 신석정의 시구처럼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가 저무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먼 나라였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철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직업상 떠돌이 생활을 유난히 많이 하신 때문인지 아니면 코흘리개 적 세상을 뜬 생부의 모습이 서럽도록 그리워서였던지 기회가 될 때마다 허공에 대고 나직이 부르시던 ‘유정천리’가 어린 가슴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 드네.

 

 흘러간 가수 박재홍이 불러 히트했던 유정천리는 영화 주제가였다. 서편제, 취화선 등의 영화로 잘 알려진 영화제작자 이태원이 영화를 해 보겠다고 해서 1959년에 처음 만든 영화가 이 유정천리였는데 김진규, 박 암, 이민자 등당시로서는 호화 캐스팅이었다.

가난 때문에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한 남자가 그 사이 아내가 마도로스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버리자 출옥 후 아이와 함께 새 삶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통속적인 내용의 줄거리다.

 

 그러나 영화 내용과 관계없이 이 노래에서 풍기는 가사와 박자의 애절함 때문인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처량한 듯 구수한 듯 수시로 리매이크(?)되었고 결국은 어린 나이의 아들까지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군대 시절부터는 어느 새 나의 18번이 되어 버렸고 항상 1절이면 족했던 것이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2절까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인생 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가사는 전반적으로 처량하고 애절하여 자조적인 느낌이 없지 않으나 아내도 없고 누이동생도 없는 내가 왜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아버지가 즐겨 불렀던 ‘아버지의 노래’였기 때문일 것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이 노래에서 내가 유독 목청을 돋우는 부분은 ‘감자 심고 수수 심는~ ’ 하는 대목이다. 현실에서 몸 부대끼며 사는 데까지 살아 보겠지만 언젠가는 그토록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 가 흙과 함께 살겠다는 아버지의 푸념 섞인 간절한 희망이 아들인 내 나름대로의 정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오십을 훌쩍 넘겨 어느 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사무치고 복받치는 감정이 예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가 않다. 그래서 유정천리는 지금도 나의 애창곡 상위 리스트를 변함 없이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힘들고 각박한 세상에서의 신세한탄과 현실도피를 아마 유정천리의 이 가사에서 위로 받고 싶어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수성가해야 했던 내 아버지의 좌절과 비애, 회한 같은 것이 곡조에서 애절하게 묻어 난다.

 판자 집 울타리 안의 손바닥만한 정원에 채송화, 맨드라미, 접시꽃, 족두리꽃 등 수십 종의 꽃들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심고 가꿔왔던 아버지는 자신의 어려웠던 일상과 희망을 복합시켜 다분히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을 그려왔을 터였고 그래서 그처럼 순박하게, 이기적이거나 사악하지 않고 그저 욕심 없이 살기를 기원하셨을 것이다.

 

 결국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건방지지만 나로서도 평소의 일상에서 행여 욕심이 넘쳐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분수에 넘칠까 경계하였다.

고향에서의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 가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으로 살고 있는 가운데 지금 전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만의 조그만 땅뙈기라도 마련해 두고 싶었다.

 한적한 곳의 배산임수를 택하고 싶었지만 노후의 생활 편리성을 무시할 수 없어 여러 곳을 답사하다가 드디어는 익산의 미륵산 아래로 터를 정했다. 당장 집을 짓고 밭을 일궈 ‘감자도 심고 수수도 심고’ 싶었지만 아직은 경제적인 것도 시간적인 것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주말이면 부지런히 내 땅을 찾아 진한 땀을 쏟으며 과수를 심고 고추, 옥수수, 상추, 호박 같은 채소를 가꿨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삶의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요즘 유럽사회의 다운쉬프트(Downshift)족과는 좀 차이가 있다. 아버지가 꿈꾸어 왔던 이상향을 실천함으로서 아버지가 끝내 못 이룬 꿈을 대신 보상해 드리고자하는 간절함의 실천이었으며 아들에게는 그렇듯 아버지의 유정천리 그 노래 하나로 인하여 삶의 방향이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이런 저런 핑계로 노래방 가는 기회도 잦아졌다. 직장에서의 관리자 신분과 어느 새 인생 선배가 되어버린 처지 때문에 함께 어울리는 손님은 대개 나보다 젊은 층이 주를 이룬다. 퀘퀘 묵은 노래라고 원망들을 것 같기도 하고 내 감춰진 생각을 들킬 것 같기도 하여 나는 애써 ‘유정천리’를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대타로 택한 것이 이장희가 부른 빠른 박자의 ‘한잔의 추억’인데 후렴으로 계속되는 ‘마시자~ 한잔의 술 마셔 버리자~ ’를 발악하듯 쏟아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대면 그런 대로 왕따는 면할 수 있어 좋았다. 이쯤 되면 나로서는 상당히 망가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든 세상사를 잊고자하는 취중추태도 가끔 없지 않으나 내가 마시는 술잔의 절반은 눈물이라고 한 김현승의 시 ‘아버지’가 유정천리를 불렀던 내 아버지의 얼굴과 점철되어 내 폐부를 관통하고 있음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아버지가 소망했던 이상향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절규를 그처럼 허공에 내 뿜곤 하지만 다만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는 결국 유전천리의 종점에 완전하게 가 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2004,11. 문화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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