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동화’란 드라마 하나로 일약 방송계 마이다스 손으로 떠오른 PD가 후속으로 ‘여름향기’를 내놓아 방송된 바 있다.
그가 만든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과 여운을 주었던 것은 그 안에 특유의 순수와 아름다움이 배어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드라마 속의 배경 화면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에 만들었던 드라마 ‘여름향기’에는 전라북도의 자연풍광이 어느 정도 담겨있던 작품이었다. 더위가 기승을 불기 시작하는 시기에 보기에도 시원스러운 덕유산 무주리조트를 메인 무대로 해서 남원 일대 등지의 녹색 경관이 빼어난 곳을 촬영하여 담아 냈는데 이 드라마가 지난 2003년 7월 초부터 안방에 소개됐지만 ‘가을동화’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의 자연환경을 얘기하고자 하면서 방송 드라마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방송을 통한 홍보가 때때로 폭발적인 광고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관광공사에서는 한때 이 드라마의 가치를 1,800억 원으로 계산해 내고 해외 홍보 전략을 짠 바 있었다. 말하자면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 이 드라마가 판매되어 방송되면 전북을 포함한 한국의 명소(?)를 보기 위해 이전의 ‘가을동화’나 ‘겨울연가’ 때처럼 적지 않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그 정도의 돈을 쓰고 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대중성 있는 드라마의 광고수입 흡인력은 그만큼 위력을 가진다 하겠다. 겨울연가가 방송된 이후의 효과를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지금의 전라북도의 생활 형편을 살펴보자. 전북의 경제 규모는 전국의 3%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기 그지없고 재정자립도는 겨우 18% 남짓에 머무르고 있을 만큼 초라하다.
그렇듯 가난한 경제구조에서 한 발자국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며 단합된 의지를 모아 그동안 새만금 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아직도 중단이냐 계속이냐 하는 소모적인 논란이 그치지 않은 채 겨우 겨우 공사를 이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전북 경제 활성화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믿고있는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인 군산 경제자유구역 지정이나 양성자 가속기 사업과 연계한 방사성 폐기장 유치, 김제공항 건설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도 아직 뚜렷한 비전 없이 모두가 지지부진 상태로 표류하고 있다. 무주의 태권도 공원 유치와 지방분권과 관련한 몇 개 중앙 부처 기관의 도내 이전만이 희망을 줄 따름이다.
그렇듯 생산적인 생활 기반이 부족하고 보니 전북의 상주 인구는 1년마다 5만명이상씩 빠져나가 드디어는 200만 명 선마저 붕괴되어 버렸다.
김제 심포 앞 바다의 너른 갯벌
이런 시점에서 잠시 눈을 돌려 전북에는 때묻지 않은 자연이 있고 자연과 어울려 만들어 낸 소중한 문화가 있으며 그 안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예술성과 창의성을 갖춘 심성 좋은 사람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잠재되어 있는 좋은 자원의 활용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과 문화는 기본적으로 원형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일정부분의 자연스러운 변형 말하자면 친환경적인 개발 또는 현대생활과의 접목 같은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내가 PD신분으로 전국을 쏘다니며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자주 낙담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봄에 봐 두었던 풍광이 가을에 다시 찾아가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는 황당함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정겨운 오솔길이었던 것이 폭넓은 시멘트 도로로 바뀌고 정겨운 토담과 창살무늬가 있었던 집들이 헐려 나가면서 국적 불명의 야릇한 형태의 집으로 변해 가는 모습, 하천 변을 시멘트 옹벽으로 처리하여 민물고기가 살 수 없게 만든 모습 등 그런 것들을 보면 그저 참담하다는 느낌뿐이었다.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나 현대 생활과의 접목 같은 명제는 당연하지만 원래의 가치나 시대정신이 사라지고 없어 실망할 때가 많았다. 땀과 혼으로 명예를 지켜야할 장인(匠人)은 작품완성 기간의 단축과 대량생산을 위해 각종의 현대식 기계에 의존해 있었고 고유민속 같은 것은 시상금이나 시연사례에 눈이 멀어 어줍잖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었으며 복원해 놓은 문화재는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 것과 같은 그런 사례는 참으로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개발이나 현대생활에의 접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TV화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자연 속에 풋풋하고 순수하게 때로는 의연하게 존재해 있는 모습, 자연과 문화와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그래야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도처에서 전화를 걸어오며 길 안내를 부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도 우리 전북에는 아직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를 깬 야릇하고 험상궂은 모습이 아직은 덜하다. 그것이 자랑이자 행복이다.
지리산이나 덕유산 같은 어느 산이라도 그렇고, 도시를 끼고 돌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섬진강이 그렇고, 만경평야 같은 너르고 너른 들녘이 그렇고 외변산 앞의 맑은 서해바다 등 사방을 둘러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천혜의 자원들이 그렇듯 모두를 유혹할만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 자연과 문화의 순수함은 계량화할 수 없는 큰 자산인 것이다.
모 방송사에서 방송된 바 있는 ‘올인’이란 드라마로 인해 제주의 섭지코지가 어느 날 갑자지 최고의 관광지로 자리 매김 되고 또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 전역에 방송되면서 화면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춘천일대와 남이섬이 관광지로 급부상하여 생각 밖의 외국인 관광객과 수입까지를 끌어들인 경우를 우리는 보았다. 이 두 경우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갖고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얼마 전 우리 취재카메라에 잡힌 전주천 생태 관련 화면을 보니 수풀 사이로 갈겨니, 칼납자루, 그리고 쉬리 같은 우리 민물고기가 싱싱하게 뛰놀고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전주천을 친환경적으로 조성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주는 지금 문화영상산업의 수도를 지향하며 전주 문화산업단지 조성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고 부안군에는 오픈 세트인 영상 테마파크가 만들어졌으며 이로 인해 변산반도 일대의 빼어 난 자연경관과 함께 우리 지역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이 땅에 찾아올 것이고 우리가 필요한 만큼 이상의 돈을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의 근간이 되는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어떻게 친환경적인 모습으로 어떻게 더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자 부담으로 남는다.
오래 전 어느 도시의 시(市)승격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그곳 시장의 느닷없는 도시발전 청사진 발언에 황당해 한 일이 있다. ‘지금의 전원도시로는 비전이 없다. 높은 굴뚝들이 우람하게 솟아있는 공장들을 유치하여 반드시 소득 높은 잘사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넓은 들녘에 자운영을 심고 수만 마리 나비를 풀어놓아 봄마다 전국 각지에서 수백만의 관광객을 일시에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젊은 군수가 있었다.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 수준이 차츰 나아지게 되고 주 5일 근무제도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앞으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볼거리와 휴식을 위해 집 밖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아마 그들의 상당수가 TV와 같은 영상매체의 영향을 받고 행선지를 선택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때문이라도 우리의 자연과 문화는 보다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꼭 인기드라마가 아니더라도 TV프로그램 또는 영화, 인터넷 동영상, 홍보비디오, DVD등 다양한 영상매체를 통해 다양한 내용으로 밖으로 소개되는 기회가 자꾸 자꾸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역경제가 살아난다.
나는 주말마다 즐겨 이 땅의 산천을 찾는다. 때묻지 않은 우리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며 그것의 전이 방법과 함께 우리 지역의 밝은 미래를 그 길에서 그려보는 것이다. 자연이 곧 우리의 희망 아니겠는가.
(2003, 7. 문화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