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회원들과의 만남
전주에서의 산행은 회사 산악회 회원과의 만남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산악회장을 맡고있던 보도국의 박부장이 어느 날 시산제를 겸하여 회원들과의 동반산행을 제의해 왔다. 업무파악 등으로 아직은 경황이 없는 시기였지만 처음 대하는 우리 직원들과의 친목을 위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과 또 새 자리로 옮겨오면서 시간이 될 때마다 전주 인근의 산들을 올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회원은 10명이 조금 넘는 숫자가 되고 행선지는 진안군에 있는 천반산(天盤山, 해발647m)이라 한다. 생소한 산 이름이었다.
아직은 차가운 2월의 일요일 아침, 회사 마당에 8시 30분까지 집결하기로 하여 적당히 배낭을 꾸려 사택을 나선다. 회원들 서로가 산행에 필요한 것들을 분담하여 챙기기로 했으니 음식 같은 것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동행만 하라 했지만 혼자 내려와 있는지라 딱히 마련해 갈 형편도 못되었다. 그저 달랑 술 한 병만 챙겼을 뿐이다.
회사 마당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관 안으로 잠시 들어서자 꽤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인사를 건넨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저 우리 직원인가 싶었다. 부임한지 한달 정도이고 보니 2백 명 가까운 직원들의 얼굴을 아직 익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해 전에 퇴직한 전직 보도국장 출신이면서 전북산악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는 산 사람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회사 직원들의 산행을 위해 길잡이로 나섰다는 설명이었는데 부드러운 면모이면서도 매우 야무진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날씨는 흐렸으나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같이 가게 돼서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버스에 올라 함께 가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어 보지만 아직은 서로가 서먹한 분위기다. 회원들은 넓은 버스 안에 드문드문 떨어져서 혼자씩 앉아 있었다.
오래 전 열차의 3등 칸을 타면 옆 사람과 세상사는 얘기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2등 칸을 타면 그저 행선지 정도만 물어 보면 그게 끝이었고, 비행기를 탈 때는 아예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는 게 당연한 것 같은 풍조였다. 그게 어떤 성격이나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학식이나 부(富)의 정도에 따라 품격이 달라야 한다고 인식하는 경향, 아니면 개인주의화되고 배타적으로 변하고 있는 사회흐름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그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떻든 나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어서 나도 결국은 붙임성 없이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지만 지위 높은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해서 오히려 이들이 더 불편해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같이 가면 직원들이 불편해 하지 않겠어요?”
이미 박부장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들 하죠 저희들이- ”
“오히려 나 때문에 방해가 될 것 같은데 … , 그냥 같은 동료처럼 생각해 주면 좋겠지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평가하는 것은 상대자의 몫이다. 어떻든 동행하고 있는 직원들과 빨리 친숙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천반산의 여름 풍광. 산을 끼고 흐르는 금강 상류뒤로 천반산 정상이 보인다.
시산지(始山地)가 된 천반산
버스는 시가지를 빠져나와 26번 국도를 타고 장수쪽으로 향하다가 진안군 천천면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 연평리 신기마을에서 멈춘다. 진안은 평소의 취재활동 때문에 가끔 들렀던 곳이라 낯설지가 않은 곳인데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오고 보니 아주 생소하다. 그러면서도 산간오지 특유의 신선함이 느껴져 반갑다. 버스가 한 바퀴 돌아와서 그렇지 천반산 산행의 초입은 지금 도착한 곳의 맞은 편에 있는 가막리라는 마을이 된다. 천반산 등정의 실질적인 입구가 되는 곳이다.
입구에는 수 백년의 세월을 견뎠을 법한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고 사람이 사는 듯 비어있는 듯한 당집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마치 셋트처럼 보이는 흑백사진 속 같은 풍광이어서 세월을 역류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이 일대가 정감록에서 예언한 10승지 중에 한곳에 속해서 인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안온한 기운이 있다.
본격 산행에 나서면서 김 부회장이 앞장서 걷는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꽤 무거워 보이는 묵직한 배낭을 들쳐 매고 스틱 두개를 양손에 쥔 채 나이에서 보여지는 나약함 없이 힘차게 걷는다. 리더로써 일부러 기운 찬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산행을 하면서 배낭을 거의 매어 본 일이 없었다. 서울 인근에서는 잘 알려진 산길을 따라 걸었던 편이었고 그것도 대개 서 너 시간 안팎으로 끝나는 산행이어서 도시락과 물 정도만 담을 수 있는 소형 쌕 정도가 전부였다. 전문 알피니스트들이 사용하는 스틱도 나에겐 어줍잖은 것 같아 그냥 맨손으로 오르거나 아니면 산에 오르다 버려진 나뭇가지를 주워 짚고 다니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동안 집에 처박아 두었던 배낭을 이번 직원들과의 산행에서 처음 매고 나선 것인지라 어색해 보였다. 거기에다 등산화말고 산행장비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런 내 모습이 어쩌면 직원들의 눈에 초라하게 보여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떻든 나는 씩씩거리며 전문 산악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등산로는 비교적 잘 닦여 있으나 경사는 가파른 편이다. 리더의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숨이 차 오른다. 좀 천천히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놈의 체면 때문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뒤쪽으로는 여직원들이 끄떡도 하지 않고 힘차게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숨 죽여가며 헉헉거리면서 따라가다 보면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곤 하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반산 초입의 당산나무와 당집. 지금은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 군데군데 쌓여있어 아직은 추운 겨울임을 느끼게 했고 구름에 갇히는 경우가 많아 전방 식별이 쉽지 않다. 오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 온 낯선 산이었으니 도무지 방향감각을 찾을 수가 없다. 리더는 계속 앞장서 가며 그저 나를 따르라 하는 것 같았고 주변으로 특별히 눈길 줄만한 것도 없어 그저 앞만 보고 걷기만 할 따름이었다.
제법 험한 코스를 밧줄을 이용해 올라 서릉삼거리에 도착해서 다시 잠시 숨을 고른다.
“여기 왼쪽으로 가면 굴이 하나 있습니다. 할미굴이라 하는데 사연이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 굴 같은 것은 아니구요… .
5분이면 갈 수 있으니까 가보고 싶은 분은 갔다 오세요. 나는 몇 번 가봐 서 그냥 여기 있을 랍니다”
리더의 말에 따라 궁금하기도 하여 몇 사람과 함께 나서는데 눈이 발목까지 빠진다. 조심조심 당도하고 보니 굴이라기보다는 바위 한 쪽이 5m 정도 움푹 파인 형태다. 조선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보산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며 인근 굴에 기거하였는데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그의 부인은 따로 이곳에 기거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원 위치하여 30여분을 올라가니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논했다는 한림대 터가 나오고 음지쪽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실족의 위험이 따른다. 올라오면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어 지팡이를 만들었으나 눈길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아이젠이라도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대열에 섞여 오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해 볼 겨를도 없이 기계적으로 떠밀려 올라 온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앞을 내다보니 더 이상은 오를 데가 없다.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부임해서 우리 직원들과의 첫 산행을 축복해 주는 것인지 어느 새 하늘이 열리고 밝은 햇빛이 내리 쬐었다. 시야가 터지니 더없이 수려한 경관이 펼쳐진다. 북쪽 발아래 깎아지는 절벽 밑으로 구량천이 푸른 띠를 두르고 천반산을 휘감고 흐른다. 건너 산자락에는 화전을 일구었는지 널따란 밭 가운데에 군데군데 집들이 들어앉아 그림 같은 산촌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말이지 문명의 때가 끼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천반(天盤)이란 이름은 상부 능선이 소반처럼 평평하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하나 천반산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과의 관련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천하의 공물(公物)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과 왕권의 세습과 독점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평등사상을 주장했다. 그리고 정감록의 이른바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을 퍼뜨린 역모의 주동자로 낙인찍히면서 선조의 미움을 사게되고 관군에 쫓기던 끝에 이곳 천반산에서 자결하고 만다. 이 때가 1589년(선조 22년) 그의 나이 44살 때다.
군데군데 석축의 흔적이 눈에 띤다. 그의 뜻에 따랐던 대동계 장정들이 한 솥 밥을 먹으며 동거동락 했다고 하는데 아직은 뚜렷이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한 때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니 군사훈련을 하면서 스스로의 방어에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만 해 볼 따름이다.
이후 호남을 역모의 땅이라 하여 인재등용을 하지 않는 등 호남 차별정책을 실시하게 되나 당시 당파간의 암투가 심했음을 고려해 보면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모반자로 낙인찍힌 역사의 희생자라는 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지금의 산과 강은 다만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다.
일행은 정상부분에서 머물며 고사를 치를 만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보나 너무 비좁아 마땅치가 않다. 내려가는 길에 넓은 장소를 잡아 보자며 바로 하산을 서두른다.
그런데 오를 때도 그랬지만 우리 일행을 치고 나가 100여m 쯤 앞서 홀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재원관리부 최부장이었다. 쉴 때도 한 켠에 있으면서 말이 없었다. 함께 어울리지 않고 별도 행동을 취하는 것 같아 얄미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과묵하면서도 의리 있는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말이면 배낭을 챙겨 혼자 산행을 하곤 한다는데 말하자면 혼자만의 산행이 자유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나중에 같은 스타일인 나에게 이것저것 산행정보를 알려주곤 했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언덕바지에 자리를 만들고 준비해 온 음식물과 함께 돼지머리를 올린다. 올 한해 직원들의 산행에 별 탈이 없게 해주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축문을 읽고 산신께 절을 올린다. 산신제에 직접 참여한 것은 취재차 참여했던 소백산 달밭골에서와 경남 고성 거류산에서 엎드려 절한 후 세 번째가 된다.
이후부터는 술과 음식, 각자 준비해 온 술들이 큰 종이컵에 부어 져 돌아간다. 막걸리에 소주에 양주에…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라도 역시 술은 적당히 필요한 것이었다. 여직원들에게도 예외 없이 잔이 돌려졌다. 그동안 서먹했던 것들이 많이 풀어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고 그들은 상급자로서의 내 직위보다도 처음 만나 함께 자리한 반가움으로 이것저것 음식물을 권하며 따뜻한 정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맛있고 미안하고 고맙고… 그랬다.
그러는 동안에도 과묵한 최부장은 버너에 불을 지핀 후 밥을 짓는데 열중이다. 일행이 준비해 온 김밥이면 됐을 텐데 당신은 늘 그렇게 직접 밥을 지어먹는 게 좋아 콩을 섞은 쌀과 된장국거리를 미리 준비를 해 온다는 것이었다.
막 지어진 밥은 고실 고실하여 정말 맛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에서 먹어 보는 따뜻한 밥이었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도 못할 취사를 그는 차분히 해 내는 것이었고 식사 후 쓰레기 처리까지도 말끔하게 처리하는 산사나이였다.
돌아오는 버스 안,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풀린 듯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고 오후의 햇빛을 받은 산촌은 차분하게 엎드려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만수산
두 달 후 회사 산악회 직원들과의 두 번 째 만남이 이뤄졌다. 행선지는 충남 부여의 만수산(萬壽山, 해발 575m). 이번에도 리더를 맡은 김남규 부회장의 선택이었다. 직원들과의 산행이 불편할 게 없었지만 그러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서 행동하는 나만의 자유스러움이 아쉽다 보니 나로서는 이번 산행까지만 함께 하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도 이제는 많이 친숙해진 편이었다.
버스가 바닷가 서천을 지난다. 지금 한창 주꾸미 철이고 하니 어느 정도 구입해서 술안주로 하면 좋겠다고 하여 잠시 정차한다. 나로서는 사실 산에서의 술은 금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군중심리가 동하는지 귀가 솔깃해진다. 그 보다는 며칠 전 시내 음식점에서 주꾸미 맛을 보고 난 후 이미 그 맛에 반한 터였다. 특히 산란기에 잡힌 주꾸미 머릿속에는 마치 밥알처럼 생긴 알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씹히는 맛이 가히 일품이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보로 비 소식을 미리 접했으면서도 오늘 산행을 강행한 것이다. 우산을 쓴 채 시장을 찾아 가 3Kg을 샀다. 나 혼자서라도 여러 마리 축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열 댓 명의 식구에 부족하지 않나 싶었지만 리더의 판단대로 할 뿐 나로서는 지켜만 보고 있었다.
충남 부여 만수사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
만수산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지난 천반산 산행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판초 우의를 뒤집어쓴다. 비는 맞지 않아 다행이지만 몸 안 공기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후덥지근하다. 이번에도 내 배낭 속에는 음식물이 준비되어있지 않다. 나만 대접받는 것 같아 미안하여 공용 짐을 나누겠다고 2ℓ짜리 생수를 두 개 집어넣었더니 배낭이 조금 무거워 졌다.
리더가 앞으로 치고 나가고 회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산을 오른다. 비구름 때문에 조망이 어렵다. 한 30여분을 걷고 보니 힘에 넘치는 듯한 리더와의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나만의 페이스가 있는데도 공동보조를 맞춰야하니 조금은 힘에 겨운 게 사실이다. 허걱거리며 중간쯤의 위치에서 따라 가다가 결국은 맨 뒤쪽으로 처진다. 그러나 오늘은 몇몇 직원이 부부동반으로 참여하여 나보다 처진 경우가 생기고 보니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런데 나 혼자만의 산행이었더라면 만수산은 적당히 일별만 하고 여기와 인접해있는 성주산을 찾았을 것이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령시에 속하는 성주산(聖住山, 680m)은 풍수지리가로 유명한 최창조 선생께서 당신이 보았던 대한민국 땅 중에서 풍수가 가장 좋은 곳으로 지목한 바가 있어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서울에 살면서도 등산 겸해서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맨 앞에서 걸어가던 리더가 일단 정지를 요구한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운무가 심해 불과 20m 앞의 시야확보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 한자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혼자 빠른 걸음으로 운무 속으로 사라진다. 진로 확보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뜻이다. 20여분만에 다시 돌아 온 그는 오랜만에 와 본데다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어 정상까지의 산행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정상에 거의 다 왔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길을 잘못 들면 운무 속에서 얼마나 고생해야 될지 몰랐다. 당연히 일행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분명히 제대로 잘 온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네… ”
날씨의 영향이 큰데도 그는 일행들에게 미안해했다.
“잘못 빠지면 종일 고생하니까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냥 여기에서 적당히 점심 먹고 내려가죠”
“여기는 좀 그런 것 같고, 내려가다 먹죠. 오다 보니까 좀 괜찮은 데가 있었 어- ”
각자 한마디씩 거들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점심 판을 벌이기도 사실 좀 난감했다.
결국 오던 길로 되돌아 가 낙엽이 깔린 적당한 공지에서 점심 준비를 한다. 그러는 동안에 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주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바닥이 축축하여 뭔가를 깔고 앉으려 두리번거리니 리더가 쿠션 좋은 깔판을 선물한다. 극구 사양해도 집에 또 있다며 거듭 내미는 것이었다. 마음도 말도 참 고마웠다. 처음 보는 가볍고 편리한 등산용 제품이다. 하기야 평소 등산용품 가게에 가서 어떤 용품들을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 본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내와 함께 참여한 직원 몇몇의 점심메뉴는 역시 특별했다. 김밥은 기본이고 보온된 밥에 두부된장과 생선찌개, 쇠고기와 같은 육류 등을 비롯해서 많은 밑반찬들, 거기에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주꾸미까지 준비하고 보니 그야말로 산해진미요 산중별미였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보니 모두들 화색이 돌아오면서 즐거워한다.
나를 다스린다는 것
평소 산행을 즐겨하는 어느 방송 선배는 좋은 공기 호흡하고 적당히 걸어 더없이 좋은데 친구들과 어울려 산행하다 보면 결국 술자리가 만들어지게 되고 그걸 피할 수 없어 그 날 산행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동료들과의 산행을 피한다는 얘기였다. 백 번 맞는 말 같다. 특히 조직 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일요일 하루, 특히 오후에는 차분히 쉬면서 다음 한 주일을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평소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산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으나 분에 넘치면 곤란하다. 술잔이 계속 돌려진다. 나는 나름대로 절제한다고 하는데도 몇몇 사람은 어느 새 과한 상태가 된 것 같다. 적당히 털고 일어나야 했다.
귀로에 입구 쪽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 무량사(無量寺)에 들러 천년 고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살펴본다. 무량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극락전에 모셔진 좌불이 동양최대라는 점에서 유명하지만 이 극락전과 석탑과 석등 그리고 천왕문까지의 일직선 가람배치가 독특하다. 아직은 인공으로 덧칠되지 않은 고풍스러운 자태들이 잘 남아있는 사찰이다.
만수산 무량사에서 함께 산행한 회사 산악회 직원들과 함께
사찰을 빠져 나와 뒤로돌아 멀리 쳐다보니 이제야 만수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느 새 하늘이 완전히 걷혔다. 산세가 매우 부드럽게 다가오면서 능선 자체가 병풍을 두른 듯 길게 뻗어 있는데 옆의 성수산도 저런 모습일까 싶다. 언젠가는 다시 오겠다 생각하며 버스에 오른다.
석유파동 때문에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석탄산업이 그런 대로 명맥을 이어와 보령 땅에서도 석탄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가스와 같은 대체연료 보급으로 인해 지금은 모두 폐광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성주면 개화리 일대의 황폐화 되어버린 탄광촌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부회장이 한마디 언급한다.
“그 어렵던 시절에 진짜 인생 막장을 살았던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이 산골짜기까지 들어 와 땀흘리며 살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 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십시오- , 그 사람들의 절규와 한 맺힌 소리 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갑자기 가슴이 찡하다. 혹 너는 너무 자만하며 안이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 온다. 일순간 깊은 상념에 빠져들면서 창 밖을 보는 나의 마음이 무거워 진다.
창 밖이 서서히 어두워져 가고 있다. 산행 리더를 맡아 나에게 산의 매력을 더욱 느끼게 해주고 따뜻한 마음을 전해 준 전 보도국장은 지금 전북지역 문화유산 해설사로 일하면서 나름대로 보람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과거 직장의 직위에 연연하지 않고 정년 후에도 적당히 안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에 맞게 일하고 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무엇보다도 그의 고향사랑 하는 마음과 공부하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나는 직원들과의 두 번째 산행을 끝으로 다시 원래 내 모습대로 돌아 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혼자만의 산행을 고집하고 있지만 나를 따뜻하게 받아 주며 함께 산에 올랐던 그 때 우리 회사 산악회원들의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2005. 내가 출간했던 산행산문집 중에서.
이후 이 블로거 상당 부분의 산행 글은 출간된 책에 수록된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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