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혼자 걷는 길 -경각산/운장산

소나무 01 2009. 12. 25. 23:04

 

언제나 행복한 산행

 여행을 하다가 창 밖으로 그럴듯한 산이 보이게되면 불쑥 차에서 내려 걸어올라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동안의 산행으로 인해 산에 대한 애정이 많이 생긴 까닭이다.

 산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산이 나를 포근하게 받아주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교감한다.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과 세상풍파에 고단해지고 지친 심신을 숲으로 난 길을 걸으며 달래보고 사색에 잠겨본다는 것은 작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자연 그 안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고 삶의 의욕을 새로이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렇게 혼자 다니면 너무 고독하지 않느냐고 물어오지만 나로서는 수시로 변하는 숲 속의 변화에 오히려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만의 단독산행이고 보니 육체적으로는 고립되어 있는 편이어서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예상치 못한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일, 이를테면 경사진 바윗길이나 물에 젖은 돌계단 같은 경우는 몸의 무게중심을 발에 적당히 분산시키면서 정확히 착지되도록 정신을 집중시키고 벌레에 쏘이거나 물리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한다.

  

나는 혼자만의 산행을 즐겨하는 편이다. 그저 그것이 자유롭다는 것 때문이다.

 

 지난 해 여름 모악산 앞쪽으로 있는 치마산(馳馬山, 568m)을 올라 갈 때였다. 조심한다 하면서도 이끼 끼어있는 돌계단을 내딛다가 순간 미끈하여 엉덩방아를 크게 찧고 손과 등에 상처를 입었다.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그냥 하산해버릴까 하다가 산행을 계속했는데 평소 등산객이 거의 없어서인지 길이 희미하고 음침했다.

 결국은 산 중턱쯤에서 희미하던 길이 끊어져 버렸다. 더 이상 산행을 계속할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지만 근처에 무속인의 행적이 어지럽도록 많이 띠는 것으로 봐서 이들의 통행로였던 모양이었다. 산행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 봄 전주에서 서울 생활로 돌아 와 관악산을 오를 때였다. 발을 내딛다 순간 삐끗하여 발목에 상당한 통증이 왔으나 되돌아오기가 싫어 그냥 참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버렸다. 결국 인대가 늘어나는 바람에 두 달 동안이나 근신(?)할 수밖에 없었다. 관악산 입구에서 호수공원을 거쳐 연주암 방향으로 오르면 됐을 것을 서울공대 뒤편의 자운암 쪽으로 가 보겠다고 갑자기 울타리를 넘는 바람에 그리됐으니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네가 이제 서울로 다시 돌아 와 산행을 하게됐으니 각별히 조심토록 하라’는 산신령님의 경고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속이 많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나의 부주의 탓이지만 그 것 말고는 큰 화를 당한 일이 없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일은 알 수 없다 했으니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얼마 전 TV를 보고 있노라니 혼자 산행을 즐겨 하던 한 중년 부인이 인적 뜸한 곳에서 돌에 미끄러져 다리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휴대전화로 119에 신고해 가까스로 구조를 받는 내용이 비쳤다.

“거 봐 아빠, 그러니까 혼자 산에 다니지마- .

휴대전화 갖고 다니고- ”

 그 모습을 보던 딸아이가 애정이 담긴 걱정을 해줬지만 혼자 산행하는 행복감에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나도 그럴 수 있겠다싶어 늘 휴대전화를 소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행여 독사나 산짐승 등의 위험으로부터도 조심하고 있는 편이다.

 

 지리산에 러시아와 북한에서 들여 온 아기 곰을 십 수 마리를 풀어놓긴 했지만 이 땅에는 이미 맹수가 사라져 버린 현실이고 보니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멧돼지가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일은 아직 들은 바가 없지만 야생상태로 많이 번식돼있어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지리산에서 만난 약초꾼은 독사에 물리지 않으려고 항상 장화를 신고 다녔지만 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지레 겁부터 먹고 냅다 줄행랑을 치던지 아니면 늘 갖고 다니는 지팡이로 어떻게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든 여차하면 검투사가 되어야할 것 같아 작은 맥카이버칼이나마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등 불과 10여 종류의 야생동물만이 존재한다는 조사발표가 있었고 보면 크게 염려할 일이 못된다.

 

 

미련남긴 경각산

 주변의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갑자기 공포심이 생기는 것도 단독산행에서는 경계 대상이다.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빈집에 들어서는 느낌과의 차이 그런 게 아니가 싶은데 한번은 완주군 모악산 앞쪽으로 우뚝 서있는 경각산(鯨角山, 해발 660m)을 오를 때였다.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려 기회만 보고 있는데 비가 뜸해 지는 것 같아 작심하고 산행에 나섰다.

 고려시대 창건 된 정각사(正覺寺) 뒤쪽으로 난 등산로는 쉽게 구분되지 않을 만큼 무성해진 풀숲이었다. 혹 그 안에 은신하고 있을지도 모를 뱀을 건드려 갑자기 공격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가능한 굼뜬 동작으로 스틱으로 풀을 내리치거나 휘저어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긴장해서 통과했다.

 

 경각산을 오르며 돌출된 바위에서 잠시 쉬다. 앞에 보이는 푸른 산은 전라북도의 어머니산같은

 이미지를 담고있는 모악산이다.

 

 눈을 들어 정상 부근을 올려다보니 구름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았다. 겨우 풀숲을 통과했는데 후적 후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계속 혼자 산행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숲이 우산 역할을 해줘 그런 대로 비를 피해가며 이왕 마음먹고 왔으니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심보로 계속 걸었다.

 40분 정도를 걸어 올랐는데 짙은 비구름에 갇혀 불과 10m 앞을 구분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대략 7부 능선쯤 되어 보이나 더 이상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다 우중충하고 음산한 분위기 마저 감돌아 자꾸 괴기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것이었고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감이 드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산행이라는 게 이럴 때 너무 무섭고 외롭구나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사방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 속에 들어 와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고 더구나 초행인 산이었다. 가랑비 정도의 비였지만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았고 다른 산에서 느끼지 못했던 고립감이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결국 더 이상의 산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산중에 혼자 사는 사람, 그런 곳에 입산 수도하는 사람은 이를테면 그 칠흑 같은 밤을 어떻게 견딜까 싶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 내려오는데 축축해진 나무 밑 작은 돌무더기 사이에 유난히 노란 물체가 눈에 띤다. 누군가가 버린 과자 포장지 같은 것이겠지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노란 그물 망을 씌워놓은 것 같은 신비스런 망태버섯이었다.

“와,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가… ”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오래 전 모 방송사의 버섯관련 특집 프로그램에서 화면으로만 봤던 그 망태버섯이었다. 너무 귀하고 환상적이어서 채집해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딱 하나밖에 눈에 띠지 않은데다 그물 망으로 세밀하게 엮어 진 그 망태버섯을 부스러뜨리지 않고 집에까지 옮겨 갈 방법도 없었다. 괜히 욕심부리는 것 보다 자연 상태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하리라 판단되었다. 다만 늘 갖고 다니던 카메라를 그 날 따라 가져오지 않아 좋은 기록으로 남겨둘 수 없게 되었다는 후회가 일 뿐.

 

 망태버섯 발견 그 하나만으로 그 날 비 오는 날 산행은 소득이 있었다.

훗날 전주 산림박물관 안에 있는 버섯전시실을 찾을 기회가 있어 수십 종의 버섯 샘플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많은 것 중에서도 유독 이 망태버섯 표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 때 생각이 더욱 간절했고 혼자만 보고 자리를 떠나오기에는 너무 아까운 모습이었다.

 

 완주군 구이면에서 본 경각산. 세 번을 시도했지만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 해 겨울 다시 경각산 산행에 올랐으나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 외에는 또다시 그런 희열을 맛볼 수가 없었고,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 정상 바로 앞까지 이르렀으나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에다 로프 하나에 매달려 눈 쌓인 절벽을 올라야하는 위험부담 때문에 더 이상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또 한번 포기하고 말았다. 고래 경(鯨), 뿔 각(角) 자를 써 고래 등에 난 뿔처럼 생긴 산이라는 의미에서 경각산이라 이름한 것으로 보면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하여 다리가 후들거렸고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그대로 추락해 더 이상은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눈이 얼어붙은 길을 다시 내려올 때는 위험천만하여 주저앉은 채로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야만 했다.겨울 날 산행에서 경솔하게 아이젠 없이 그냥 올랐다가 낭패를 당해야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그럴 때는 나 혼자라는 사실이 스스로 원망스럽고 후회도 드는 것이었다.

 그 뒤 경각산 남서쪽에 있는 불재에서 능선을 타고 오를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가졌으나 예상밖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중도에서 또 다시 포기하고 말았으니 경각산 정상과 나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었다.

 

 

운장의 구름 속에 갇히다

 혼자 걸으며 유난히 고립감을 느꼈던 산행은 진안의 운장산이었다. 운장산을 가겠다고 작정했을 때는 산이 매우 깊고 험할 것 같다는 생각과 깊은 산골이고 보니 사람의 왕래도 적어 갑자기 들짐승과 맞닥뜨릴 수도 있겠다는 가정을 해 보기도 했다. 나에게 운장산(雲長山)의 첫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전주의 간선도로인 시원한 8차선의 백제로 동쪽 끝은 전주역이다. 그 백제로를 타고 가다 완주군 청사 앞쯤에서 백제로가 끝나는 전주역 쪽을 바라보면 한옥으로 지어진 전주역사의 지붕선 뒤로 높다란 산 능선이 중첩되어 그림처럼 멋지게 다가온다. 그 가운데 제일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언제나 나를 유혹하곤 했는데 그 산이 바로 운장산이었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방향을 잡아 유명한 화심두부를 파는 음식점들을 지나 곧바로 왼쪽으로 꺾어들면 동상호로 통하는 738번 지방도로가 된다. 높고 깊은 산중에 속하는 완주군 동상면 일대로 가자면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야하고 그 고개를 지나 청정한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번에는 짙고 푸른 동상저수호가 나타난다. 이곳까지 20여분 오는 동안에 마주치는 차량이 열 손가락을 넘지 않을 만큼 차량통행과 인적이 뜸한 곳이다.

 이곳 완주군 동상면(東上面)은 우리나라 8대 오지가운데 한 곳으로 지목될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다. 보이는 것은 다만 산과 호수와 푸른 하늘뿐이다. 민물고기나 닭 요리를 하는 토속음식점이 간간이 눈에 뜨이나 한 여름철 성수기가 아니면 인적 없이 적막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동상호와 함께 붙어있는 대아저수호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대아수목원이다.

 

 전라북도에서 운영하는 대아수목원은 150ha에 30여만 주의 관상수가 심어져 있고 열대식물을 포함하여 다양한 식물을 접할 수 있다. 산 정상까지를 포함하여 산책로가 잘 닦여있고 군데군데 정자가 세워져있어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주말이면 그런 대로 사람들이 찾는다. 난 이곳에서 터키의 지중해변 안타야휴양소에서 보았던 독특한 향과 여러 개의 색을 가진 궁금했던 꽃이 란타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인공 재배한 것이긴 하나 분홍빛 금낭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실컷 구경할 수가 있는 소득이 있었다.

 

산책로변의 철쭉이 만개한 봄날의 대아수목원을 가족과 함께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수목원에서 빠져나와 운일암․반일암 쪽으로 가는 길은 푸른 산과 맑은 계곡이 전부인 그야말로 청정지역이다. 차에서 내려 아무 곳에나 벌러덩 누워 햇빛과 바람을 만끽하고 싶을 정도다. 좀 더 차를 몰아 피암목재라는 곳에 주차하고 본격 산행을 준비한다. 2천평 정도 되어 보이는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한 두 대 정도만 파킹되어 있을 정도로 한산하다. 마땅히 물어 볼 사람도 없고 하여 대충 감으로 산행에 나선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는 희미하나마 사람이 많이 지나다닌 듯한 등산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등산동호회에서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리본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내가 올라가는 방향으로는 사람이 없었다. 운장산을 오르는 코스가 두 군데 더 있으나 비교적 한가하고 산행시간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곳 코스를 택한 것이다.

 

 등산로는 비좁았고 좌우 양쪽은 경사가 급한 산비탈이어서 적당히 휴식을 취할 만한 공간도 없다. 단조로운 상태로 정상을 향해 그냥 걷기만 할 따름이었다.

날씨는 우중충한 편이다. 혼자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고 보니 느닷없이 산돼지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사람 소리라도 들려왔으면 좋을 텐데 너무 적막하고 음습하다. 약간의 오싹한 느낌도 없지 않아 걸어가면서 지팡이로 서있는 나무들을 내리쳐 딱- 딱-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간헐적으로 우~ 우~하며 괴성을 질러 보기도 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참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 혼자라는 것 때문에 그런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씩 눈을 들어 정상 쪽을 봐도 계속 구름에 가려있어 정상이 어디쯤인가를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1시간 반 정도를 걸어 왔으니 거의 다 왔으리라는 짐작만 해 볼 따름이었다.

 갑자기 가파른 경사가 계속되어 숨이 가쁘다. 어느 정도 거칠어진 숨소리와 내딛는 발자국 소리 외에는 그저 적막감뿐이다. 나는 혼자 산행을 할 경우 숨이 차 올라도 앉아서 쉬지 앉는다. 한번 앉아 쉬게 되면 산행의 리듬이 깨지는 것 같아 그냥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숨을 골랐다가 그리고는 계속 걸었다.

 

 사점(死點, Dead point)이란 게 있다. 운동생리학에 나오는 용어로 운동량이 자신의 심폐능력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숨이 몹시 가빠지게 되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다가 운동량이나 호흡조절을 통해 신체가 조정되는 세컨드 윈드(Second wind) 상태가 되면 안정적으로 운동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다. 내가 스포츠의 이런 원리를 이해하고 산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행 후 내 스스로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20~30분 정도를 걷고 나면 그 뒤부터 내 몸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 얼마쯤을 걸었을까. 반갑게도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등산 루트로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구름 속에 갇혀 분간할 수 없으나 약간의 평지가 계속되는 것으로 봐서 정상이 분명한 것 같은데 확인할 수 가 없다. 불과 10m 앞을 내다 볼 수가 없다. 구름이 잠시 비껴나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5분 정도를 그대로 서 있으니 일 순간 50m 정도의 시야가 확보된다. 정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내 구름 속에 갇히고 만다. 빠르게 이동하는 비구름의 굵은 물입자 때문에 옷과 살갗이 촉촉이 젖기 시작한다. 구름에 가려진 산이 길다하여 운장(雲長)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대략 10여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 오는데 도대체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연석산 정상에 본 운장산 정상.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상당히 먼 거리다.

 

 잠시동안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며 기회를 기다린다. 보람이 있어 다시 일 순간 구름이 걷힌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시간을 주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내가 서있는 30m 쯤 서북쪽으로 운장산 정상 표지석이 있고 그 주변으로 40대의 산악회 회원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서로 서로 자리를 고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옮겨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그 중 일행 한 명에게 건네며 표지석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부탁한다. 정상에서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표지석에는 ‘운장산 서봉 해발 1,113m’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또 다른 봉우리가 있다는 말인데 인근을 유심히 살피니 ‘동봉’이라고 적혀있는 등산로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동봉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하나. 내친 김에 동봉까지 가겠다고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나섰는데 절벽에 가까운 난코스의 바윗길을 내려가게 되어있다. 바위는 축축하여 미끄럽고 구름 때문에 시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약간만 부주의하면 사고로 직결된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결국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하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해야만 했다. 혼자라서 더욱 그랬다.

 

                        운장산 서봉 정상에서. 구름비에 옷이 축축히 젖은 상태다.  

 

 같은 길로 내려와 주차장에서 바라본 정상부근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있어 서봉과 동봉을 구분할 수가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운장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는 동봉도 서봉도 아닌 중봉(1,126m)이었고 두 봉우리 모두 서봉에서 불과 15분 거리 이내였다. 사전지식 없이 급하게 서두른 데다 날씨마저 흐리고 구름이 갇혀 현장에서 인지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상저수호 방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진안 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일암․반일암(雲日岩․半日岩)에 들른다. 구름에 가려 해를 잘 볼 수 없고 하루 반나절을 걸어도 깊은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였을 정도로 천연 그대로의 원시림 계곡이다.

 이곳을 세 번 째 찾아오나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처음 대하는 듯한 느낌이다. 운장산 동북쪽 명덕봉 골짜기에서부터 동쪽으로 흐르는 주자천 계곡마다 집채만한 하얀 바윗덩어리들과 낙낙장송들의 의연한 자태가 태고의 그 모습대로 장관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운장산이 대단히 깊은 산세에 속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계곡을 오른쪽으로 끼고 5Km정도를 계속 내려오고 보니 더없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가 된다. 새로 조성된 용담호의 빼어난 자연경관도 구경할 수 있어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 혼자만의 산행이 언제나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답의 길을 걷는 의미

 얼마 후 가을이 되자 나는 또다시 동상면을 찾아 이번에는 연석산(硯石山)을 찾았다. 동상면 사북리 연동마을 이라는 곳에서 출발하는 연석산은 비교적 완만하게 계속 계곡을 끼고 올라갈 수 있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할 수 있었고 수종도 다양하고 울창하여 지루한 줄 몰랐다. 그 연석산의 925m 정상에 올라서야 운장산의 본 모습을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서봉과 중봉 동봉의 위치가 바로 눈앞 한 달음 앞으로 들어 왔다. 그 뒤로는 구봉산이 있고 옆으로는 부귀산이 있다. 이 부근 일대가 800~1,100m 안팎의 고산지대를 이루면서 사방으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면 운장산 정상까지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여름 구름으로 몸을 가려 쉽게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던 운장산은 누런 옷으로 갈아입고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전주에서 위봉산성을 지나 운장산으로 가는 산간도로.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다. 완주군 종남산 정상부에서 찍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 언젠가 진안고원 이 산맥을 종주하며 연석-운장-구봉을 가슴으로 껴안겠다고 다짐하면서 내려선다.

 햇빛과 나뭇잎이 고운 가을날의 산길이어서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가볍고 차분해 진다. 숲으로 난 길을 혼자 묵묵히 걷고 있는 이런 날 나는 가끔씩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읊조려 본다. 그러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 지는 것이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데 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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