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초록 파노라마 - 나의 신록 예찬

소나무 01 2009. 12. 25. 23:18

 

새봄, 4월의 유혹

 새 봄에 만나는 산은 언제나 마음 설레게 한다. 겨우내 실내에서 움츠려 지내다가 산에 오르면 복수초나 현호색, 제비꽃, 바람꽃 같은 귀엽고 예쁜 야생화가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어 삭막해져 있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메마르고 언 땅에 씨앗을 감추고 있다가 아름다운 색으로 꽃을 피워낸 그 강인함이 대견스럽다.

야생화의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자태도 좋지만 4월 중순경이면 온 산에서 피어나는 산벚꽃으로 인해 한바탕 장관을 이루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어 생동하는 계절이 찾아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모든 산이 그런 것은 아니나 돌아다니다 보면 특별히 산벚나무가 많아 군데군데 연분홍을 띄는 산들이 있고 주변 연초록의 나뭇잎 색깔과 함께 잘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그 분위기가 은은한 수묵 담채화 같다. 산새들의 수고라 여겨지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산에 산벚나무가 많이 퍼졌다. 그래서 4월 이맘때가 되면 가까이에서 우리의 들꽃을 대하는 기쁨과 함께 산이 입고 있는 파스텔 톤의 옷 색깔을 멀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주 도심에 있는 완산칠봉의 새봄 풍광도 산벚꽃으로 인해 가히 장관을 이룬다.    봄기운에 신이 난 나무들이 스스로 축제를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홀할 정도의 산벚꽃 잔치가 한바탕 끝나게 되면 산은 다시 본디 초록의 옷 색깔로 되돌아가며 나무 저마다의 색깔로 또 한번의 잔치를 벌인다. 

 

                                  숲길은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나만의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사람들은 사계절 가운데 대부분 가을 단풍을 가장 선호하며 울긋불긋한 그 현란한 자태에 환호를 보내지만 새봄에 만나는 신록의 향연은 초록 그 특유의 신선함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같은 것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래서 상춘객(賞春客)이란 용어가 만들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신록 그 자체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다양한 수종이 자생하는 산을 찾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망해 보면 초록이란 색깔도 저렇게 다양하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마악 잎을 틔워 만지면 녹아 내릴 것 같은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연두색을 비롯해서 겨우내 찬바람을 견뎌 낸 침엽수의 암녹색까지 천차만별의 색상을 이루며 아름다운 초록물결을 이룬다. 수종에 따라 나뭇잎의 크기와 형태가 다르지만 저마다의 색깔이 틀려 다양한 종류의 초록물결을 이루기고 움이 트는 시기가 또한 저마다 틀리다 보니 초록계통의 색상이라고 해도 서로가 미묘한 차이를 연출하는 절묘함을 보이는 것이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들은 사시사철 눈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인지 그들이 표현하는 눈의 종류만 하더라도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의 싸락눈, 함박눈 등과 같은 방법의 표현일 것이다. 색으로 말하면 노란색을 두고 샛노랗다, 누렇다, 누리끼리하다 등등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을 것일 텐데 그런 식으로 한다면 신록을 표현하는 초록색깔도 적어도 수 십 가지로 분류해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형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불과 몇 가지로 한정되어있을 뿐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색의 종류가 대략 1,600만여 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초록색의 경우만 하더라도 수 십만 가지로 분류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기호로 나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로 인한 답답함이 새 봄의 각기 다른 나뭇잎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다. 최근 국내의 모 전자제품 생산업체에서 개발한 세계 최고 화질이라고 자랑하는 LCD TV는 무려 64억 4천만 가지의 색상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 그 엄청난 숫자의 총량에 아연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초록의 경우만 하더라도 수천만 가지의 색상 표현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자연이 선물한 색상의 경이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든 나는 전주에서 진안으로 향하는 길에 가장 높이 솟아있는 운장산 산줄기의 크고 작은 산들마다에서 그런 초록의 향연들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었고 지금은 4차선 도로로 뚫린 모래재를 지나 진안군 부귀면 쪽으로 가는 오른쪽 편의 주변 산들에서도 그야말로 다양한 색상으로 장식된 초록의 파노라마를 만끽하며 환호했다. 아침시간의 투명한 햇빛을 받은 초록 잎들이 맑고 곱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 ”

 그것은 우리가 흔히 젊은 여인의 얼굴이나 몸매를 보며 내지르는 세속적인 찬사가 아니라 조물주가 만들어 낸 자연의 오묘함을 대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경탄이었다. 초록은 생명의 색깔이기에 더욱 그랬다.

 

 

건강을 선물하는 숲

 창세기에 창조주인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거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푸른 움이 나중에는 우리 인간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꽃과 과일을 선물하게 되지만 그러나 움이 트는 그 시기에 볼 수 있는 초록색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큰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녹색은 심리적으로 차분함을 주고 눈과 신경의 피로를 덜어 준다. 녹색은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그런 안정감과 건강함을 선물하지만 육체적으로도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원실 환자의 경우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보다는 녹색의 나무가 보이는 창 쪽에 있는 환자의 회복이 훨씬 빠르다는 통계 조사가 있다.

 

어느 해 초봄 임실 백련산 산자락에서.

 

 또 녹시율(綠視率)이란 게 있다. 녹시율이 높을수록, 그러니까 녹색을 많이 볼수록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경우 연중 5개월 반 정도를 숲과 같은 녹색을 보지 않은 채 지낸다는 연구결과도 있는 것을 보면 서울과 같은 도시 생활자들은 녹시율이 훨씬 낮아 상대적으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겠다.

요즘은 녹지공간에 대한 중요성 인식으로 도심에도 나무를 많이 심어 가꾸고 있다. 이왕이면 나뭇잎과 꽃, 수형, 좀더 욕심을 부려 열매까지를 포함해서 유행가 가사처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무들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제주의 먼나무, 광주의 느티나무, 금산의 튤립나무, 대전의 회화나무와 이팝나무 등의 가로수 길이 인상에 남는다.

 

 숲 속의 나무들은 그 초록의 나뭇잎으로 우리에게 시각적인 건강함을 주는 것 외에 차갑고 맑은 공기를 만들어 선물하고 있다. 50년 정도가 된 활엽수 한 그루는 대략 12명 정도의 사람에게 필요한 산소를 만들어 주며 에어컨 한 대를 스무 시간 가동시켰을 때 얻어지는 양과 같은 찬 공기를 내뿜어 준다. 그래서 한 여름에 숲으로 들어가면 시원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잘 가꾸어진 숲 1ha는 탄산가스 16톤 정도를 흡수하고 대신 12톤의 산소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놀라운 연구 결과도 있다. 참으로 대단한 역할과 기능을 맡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숲에서 만들어진 차고 맑은 공기를 도시로 운반해 주는 것이 바로 바람이다. 그래서 숲에서 도시까지 바람이 불어주지 않고 어느 한 곳에 멈춰버리면 주변보다 기온이 높아져 버리는 소위 열섬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그 때문에 도시가 더워지는 것이다. 내가 전주에 살았던 최근 몇 년 동안 전주의 여름 기온이 전국 주요도시를 앞질러 최고 기온을 기록하는 이변이 거듭됐다. 과거에는 분지로 알려진 대구의 여름기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 져 왔는데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해석이 뒤따라야겠지만 바람의 이동통로 막게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 이를테면 지금 전주에 빠른 속도로 들어서고 있는 고층 아파트군의 바람 차단 영향도 적지 않을 것 아니겠냐는 나로서의 생각이다.

 

 활엽수에 비해 햇빛을 받는 면적이 적은 침엽수들은 그늘 진 곳에서는 살아가기 힘들고 몇 해 만에 한번씩 잎을 떨어뜨려야 하나 상대적으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징을 가지면서 역시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지가 척박한 편이지만 여기에는 소나무가 절대적으로 많이 자생하고 있다.

 숲 속에 들어가면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상쾌한 냄새가 나고 특히 한여름에 소나무 밭에 들어가면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송진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소나무에서 주로 만들어지는 살균 방향물질인 테르펜(Terpene)이다. 또 같은 살균물질인 피톤치드(Phytoncide)는 그 종류만 해도 1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식물들은 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으므로 각종 병원균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이러한 방향물질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방출되는 시기는 5월~8월 사이고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따라 흐린 날 보다는 맑은 날에, 시간적으로는 오전 10시에서 낮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방출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등산은 가능하면 이 시간대를 이용하는 것이 맑은 산소호흡과 함께 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다.

 

                                계곡과 폭포같은 물분자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곳은 많은

                          음이온을 발생시킨다.

 

 또 숲에서는 천연 음이온이 다량 생성되는데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산되는 양이온을 중화시킨다고 하며 이 때문에 숲에 가면 편안해지고 상쾌해 진다는 것이다. 특히 계곡이나 폭포와 같은 물분자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곳의 수치는 70~80배나 높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쌓였다면 이런 곳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보통 오전시간을 택해서 산행을 하게 되는데 피톤치드와 같은 나무 향을 맡기 위해 계산적으로 아침에 산행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아무래도 상쾌한 아침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을 일찍 끝내고 돌아 와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가져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음 날 너무 피곤하지 않게 보통 서너 시간 정도의 등산코스를 택하게 되고 적당히 땀을 흘리기 위해 비교적 빨리 걷는 편이다. 빨리 걷다 보면 피톤치드 같은 나무 향을 보다 깊숙이 들여 마실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또 숲에는 먼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도시 공기 1리터 안에는 보통 10만~40만 개의 먼지 입자가 있으나 숲에는 불과 1,000개 정도일 뿐이다. 나무는 먼지도 흡수하여 걸러 주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알로에처럼 생긴 ‘산세베리아’라는 식물이 공기정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때 품귀현상까지 빚은 일이 있었지만 그런 화분 한 두 개를 가정이나 직장에 갔다 놓는다고 해서 실내공기가 정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간사스러움만 느껴질 따름이니 가능한대로 초록색으로 가득한 숲과 가까이 하도록 하는 생활습관을 갖는 게 좋을 것이다.

 

 숲이 주는 유익함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겠으나 나뭇잎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가 없다. 나는 산에 갈 때마다 나뭇잎을 유심히 쳐다보곤 하는데 돌려나기니 어긋나기니 하는 식물학적 접근이 아니라 나뭇잎의 형태와 색깔을 살펴보는 것이다. 어떤 것은 나물로 해먹고 싶을 만큼 연하고 부드럽고 어떤 것은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짙고 두껍다. 어떤 것은 하트 모양으로 생겨 정이 가고 어떤 것은 주름이 있거나 구김종이처럼 못생겼다. 또 어떤 것은 책갈피를 해 두고 싶을 만큼 귀엽고 예쁘다.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을 이룬다. 그것들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우리 춘란의 경우 복륜이나 중투, 사피와 같은 품종처럼 잎만 감상하는 것으로도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지켜야 할 생명의 숲

 숲에 대해 하고싶은 얘기가 또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본 ‘5인의 해병’은 용감하고 잘 생긴 5인의 해병을 주제로 전장에서의 활약상을 잘 그려낸 영화였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내가 좋아했던 김진규, 황해, 장동휘 등의 주인공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지만 그들의 작고 소식을 뉴스 자료화면에서 대할 때마다 유독 눈에 띠는 것이 전투장면이 아닌 배경으로 등장하는 온통 헐벗은 민둥산의 모습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60년대 초의 산이 그랬으니 50년 한국전쟁이나 그 이전의 자료화면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잘살아 보자는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하는 대대적인 산림녹화 시책이 펼쳐지게 됐고 그 때문에 우리 산들이 많이 푸르러 진 것이 사실이다. 덕분에 이제는 등산로가 확보된 곳이 아니면 잡목과 가시덤불로 인해 산에 들어 갈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은 산골마을에서도 가스를 이용해 취사를 해결하고 있으니 바뀌어진 연료정책도 산을 푸르게 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콘도와 연수원, 기도원, 복지원 ,골프장, 그리고 묘지조성 등 각종의 명목으로 분별 없이 산림지역이 난 개발 또는 훼손되고 있어 이로 인해 매년 상당한 양의 숲이 사라져 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자동차 배기 가스 등으로 인한 매연의 증가로 인해 우리가 숨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야생동물 이동통로 하나 변변한 것이 없어 전국의 고속도로에서 수없이 차에 치어 죽는 고라니나 너구리, 노루 같은 야생 동물들을 보면서 그것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지 모른다. 숲이 줄어든다는 것은 단순히 면적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이 줄어들고 식물들이 줄어든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나무는 살균 방향물질인 피톤치드를 내뿜어 등산객의 몸을 이롭게 한다.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우리의 소중한 생명이라는 점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가을과 겨울은 그렇다 치더라도 봄부터 여름 사이만이라도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초록색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애시절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수많은 색 가운데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초록색이요- ”

“왜요?”

“신선하고 시원하고 좋잖아요. 무슨 색 좋아하시는데요?”

“나는 노란색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아내가 또다시 나에게 물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언제라도 즉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초록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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