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의 충정 서린 전주 고덕산
전주 인근에 고덕산(高德山)이란 이름이 두 군데 존재한다. 한 곳은 전주의 남쪽에 있는 남고사(南固寺)와 남고산성이 있는 뒤쪽의 산을 말하며 다른 한 곳은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에 있는 산을 말한다.
황방산, 건지산, 부응산, 화산, 승암산과 기린봉, 완산칠봉, 학산 등 전주시가 안에 있거나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 속해 있어서 산책을 겸한 가벼운 등산 장소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런 산들은 대개 200m 안팎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나는 전주에 살면서 시간적으로 좀 더 밖으로 나가 산행할 수 없는 형편이면 자주 이들 산을 찾았으며 아니면 1급수가 될 정도로 물이 맑아진 전주천변을 거닐며 자갈이 깔린 물 속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전주식물원이나 임업환경연구소 시험포장 같은 곳을 찾아 가 여러 종류의 나무나 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이름을 익히기도 했다.
고덕산 자락 남고산성의 경우도 제일 높은 곳이 275m인 북장대이고 이곳 역시 남고사를 경유해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어서 가끔씩 찾아 가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좀 더 욕심을 부려 능선을 따라 남서쪽으로 1Km정도를 더 올라가 해발 602m의 고덕산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해 보는 기분도 각별하다.
전주 남고산성 만경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주 시가지.
고덕산에서는 전주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 올 뿐만 아니라 멀리 익산시가지, 모악산과 연석산, 숫마이봉 등 전주 인근의 산뿐만이 아니라 덕유산과 지리산의 연봉들까지 조망할 수 있다.
고덕산 정상까지 굳이 오르지 않더라도 상당부분 복원작업이 진행된 남고산성(임지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하는데 한때 견훤이 후백제의 도성을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 쌓았다 하여 견훤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을 뿐더러 남고사 앞쪽의 만경대(萬景臺) 바위에 새겨진 포은 정몽주가 남긴 시를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정몽주와 전주와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사뭇 궁금한 것이었다. 오랜 풍상으로 희미해 졌긴 하나 누군가가 그의 시를 만경대 바위에 음각해 놓아 그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천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를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호기는 서생을 그릇치게 하누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들어 하염없이 옥경을 바라보네
이 시의 의미는 이렇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면에 있는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개선 잔치를 벌이게 된다. 이 때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암시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이 자리에 종사관으로 참석하고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불편한 심기에 자리를 떠나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이곳 만경대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허물어져 가는 고려왕조의 한을 시에 담아 읊었다는 것이다. 그의 일편단심과 곧은 지조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황산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가 1,380년 8월의 일이요 그가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 1,393년 일이고 보면 당시 역성혁명을 암시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성계가 그 사이에 무사할 수 있었을까. 결국 만경대의 시는 단지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조를 안타까워하며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각설하고, 그런데 그 전주 고덕산에서 불과 30여분 거리의 가까운 임실군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남원으로 향하다가 관촌 사선대(四仙臺)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들어 진안 마령으로 가는 48번 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가 작은 길로 들어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고덕마을이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가 된다.
한적한 산촌의 여름
오전 9시가 조금 지났는데도 볕이 따갑다. 들어가는 입구 주변의 논에서 부녀간에 고압분무기로 한참 농약을 살포하고 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하얀 피부의 아가씨는 모자 하나만 눌러 쓰고 아버지의 동선에 따라 열심히 긴 호스를 끌고 다닌다. 잎을 곧추 세운 벼들이 더없이 싱싱하고 건강하다. 딸은 가까운 도회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일요일인데도 쉬지 못하고 논둑을 따라 오가며 아버지의 농사를 돕고 있는 것 같다. 젊은 노동력이 모두 빠져나간 오늘의 농촌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런 부녀지간의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의 마음은 지금 엉뚱한 곳에 가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말하자면 배운 게 농사짓는 것뿐이어서 FTA와 같은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농사밖에는 더 이상 매달릴 것이 없을 터이지만 젊은 나이에 누가 손발에 흙 묻히며 논밭에서 일하고 싶겠는가. 더군다나 오늘은 일요일이 아닌가.
어떻든 8월의 땡볕 아래에서도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들의 눈에는 내가 차를 타고 다니며 이곳 저곳 등산이나 다니는 한가한 존재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목을 쑤욱 집어넣고 그 옆을 지난다.
열 가구가 채 안 되는 것 같은 마을 안으로 들어 가 경로당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산행에 나선다. 골목을 따라 가면 등산로가 나오겠지 생각하며 대충 고샅길을 따라 갔으나 등산로와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지 길을 물어 볼 사람도 주위에 없다. 사실 누가 나타나더라도 당신네 마을을 통과하여 등산하려 하는데 길 좀 알려달라고 하는 말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을은 그 만큼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다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되돌아 와 누군가 마을 주민이 지나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10여 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이 없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골목이 끝나는 곳까지 왕복하며 등산로를 찾아 봤으나 역시 허탕이다. 산행 입구가 이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여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드디어 중년의 아낙이 나타난다. 반가웠다.
“아주머니 이 산이 고덕산 맞죠?”
“맞아요. 그런디 이 산에 올라 갈라고요? 등산 헐라고요?”
내 옷차림을 보고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간파한 모양이었다.
“아, 예- . 어디로 올라갑니까? 이쪽으로 가니까 길이 끊어지네”
“이 짝(쪽)에는 질(길)이 없어요. 저 짝으로 돌아가먼 올라가는 길이 있는디 올라가 봐요. 좋아요. 바우도 좋고 경치도 좋고- ”
오른손 끝으로 대충 방향을 정해 주는데 그 사이에 집들과 밭이 끼어 있어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거기에다 싫은 내색 없이 등산할 만한 산이라고 추천까지 해주었으니 그 인심이 고마울 수밖에.
마을 입구 쪽에서 바라 본 고덕산 정상부.
아낙이 가르쳐 준대로 대충 방향을 잡고 걸어가고 있으나 드러나게 길이 나있는 것도 아니고 산행을 유도하는 그 흔한 리본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 저기쯤 되겠다 싶어 감으로 대충 넘겨짚고 밭을 하나 건너 산자락에 몸을 대니 비로소 길 같은 형체가 희미하게 보인다. 잡초가 약간씩 누워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가 통행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아직은 불분명한 길을 따라 20m 정도를 더 나아가니 한사람이 오갈 수 있는 등산로가 비로소 그 형체를 훤히 들어낸다. 양옆으로는 무성한 솔밭이다. 진한 향내를 맡으며 솔밭 길을 1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거의 10m 간격으로 거미줄이 가로막아 나무지팡이로 그 걸 쳐내고 걷는 일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아침 일찍 내가 처음으로 이 산을 오르고 있다는 의미여서 과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등산로는 특별함이 없이 밋밋한 채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맑은 물 흐르는 계곡이 없어 아쉽다. 잡목사이를 30여분 걷다보면 급경사 지대가 나오고 다시 얼마간의 능선을 지나 자일을 이용해 암벽을 오르다 보면 첫 번 째 봉우리에 이른다. 북쪽으로 내동산과 덕태산이 보이고 산자락 저 밑으로 마령으로 가는 도로가 산과 산 사이의 경계선처럼 뻗어 있다. 동쪽으로는 지금 여기와 같은 암봉들이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연결되어 있다. 높이가 그만 그만한 대 여섯 개 정도의 봉우리들이다.
한낮의 모노드라마
무더운 날씨고 보니 여기 제 1봉에 도착할 때까지 땀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옷이 거추장스러워졌다. 올라오는 동안 도무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고 앞뒤로 살펴봐도 누가 나타날 것 같지 않다. 오직 나 혼자 만이 올라 와 있다. 그래서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옷을 차례차례 벗어 바위에 뉘어 건조시키며 땀을 식힌다. 두터운 등산 양말도 햇볕으로 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 벗어 말렸다.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것 역시도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한 번 더 주위를 살폈지만 역시 거리낄 게 없었다.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 아니면.
이제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얼마나 시원하고 편안한지 모르겠다. 예전의 어느 TV광고에서처럼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크게 외치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남이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느냐, 혹 변태가 아니냐는 오해도 받을 수 있겠다 싶으나 푹푹 찌는 듯한 한여름의 날씨다 보니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게 귀찮을 따름이었다. 가끔 보는 동물애호가들의 알몸 시위나 스트리킹을 하는 사람들과는 생각과 행동공간이 전혀 별개인지라 너무 홀가분하고 좋다.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끝내고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면서 거울 앞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거나 잘난 물건(?)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들 앞을 왔다갔다하는 것과 비슷한 그런 개운한 기분이 아닌가 싶다.
집 주변의 가벼운 산행일 경우 가끔씩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고 맨발로 밭고랑 사이를 오가며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는데 땅을 맞대면서 느끼는 어머니 같은 포근함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과 편안함을 찾는 것이고 보면 자연과의 이런 스킨십도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모내기도 모두 기계가 대신하고 김매는 작업에도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고 보면 편리성이나 위생적 측면에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이 됐다. 하지만 바지를 걷어 부치고 맨발로 논에 들어가 일일이 손으로 모를 꽂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연스런 감촉, 진정한 건강성 면에서는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이지 그리고 과연 어느 편이 바람직한 것인지 굳이 득실을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맨살로 자연과 교감하는 마음과 그 느낌 자체만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희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임실 고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고덕마을.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도 누가 오면 어쩌나 싶고 이런 내 모습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당황할까 싶어 팬티를 다시 집어 공중에 대고 몇 차례 훌훌 내 젓고는 다시 입는다. 등산객이 아무도 없었기에 한번 객기를 부려본 딱 한차례의 알몸 헤프닝이었다.
암봉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있다. 이곳에 언제 사람이 와서 산불을 감시하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볼 때는 다른 곳에 위치한 것도 언제나 비어 있어 산봉우리에 버려진 폐기물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아마 이런 것들이 전시행정의 표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해마다 봄철 건조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수많은 산불이 발생하는데 산불감시초소에서 산불 현장을 발견하고 조기에 진화하게 됐다는 소식은 여태까지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어떻든 그 감시초소가 만들어 준 그늘에 앉아 팬티만 입은 채로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한 20여분을 푹 쉬고 나니 옷들이 바싹 말랐다.
고덕산에는 모두 8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있지만 너무 고적한 나머지 더 이상의 산행은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정상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보낸 시간까지를 합하여 3시간 정도를 보냈지만 고덕산을 찾아 온 등산객은 결국 오직 나 혼자였다.
길 위에 떠오르는 얼굴
돌아오는 길, 1시를 지나 한낮의 가장 무더운 시간이 되었고 보니 밭고랑사이의 고춧잎들이 뙤약볕에 견디지 못하고 축 쳐져 있다. 주위의 모든 활동들이 일시에 멈춰버린 듯 사방이 조용하고 마을은 졸고 있는 듯 하다. 가끔씩 오가는 차량 소음을 빼면 온통 적막에 싸여있다. 간헐적으로 바람이 지나며 벌판의 볏잎들을 흔들어서는 초록물결을 만들며 고요를 깬다.
차창 왼쪽으로는 임실군 관촌면의 한 마을이 된다. 복숭아 같은 과수가 심어져 있어 소득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 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작물이 보이지 않아 벼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보인다. 여기 이 마을 앞길을 세 번 째 정도 지나는 것 같은데 오늘은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전주의 한 카페에서 일하던 한 아가씨의 고향이 여기 이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참 순수한 면이 있었다. 몸집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어서 날씬한 미인 축에 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씨가 참 고왔던 여인이었다. 내가 어쩌다 한번 씩 가게에 들르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몇 사람과 어울려 초반에 적당히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맥주 한잔 더 걸치겠다고 찾아가는 곳이 대체로 이 C카페였다. 대개는 내 기분에 취해 횡설수설할 때가 있는데도 그녀는 조용히 내 얘기를 받아 주었고 항상 나지막한 목소리와 차분한 몸가짐으로 예의를 갖추었다. 적당히 교태를 부리면서 팁을 요구하거나 눈치 살피며 술값 덤터기를 씌우는 계산적이고 닳아빠진 그런 술집 여자가 아니어서 언제나 편안하고 좋았다. 그녀와 일부러 약속하고 혼자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고 그 카페를 나서면서 다시 오마하는 약속을 한 바도 없었지만 저녁시간에 누군가와 식사를 한 후 한잔 더하자는 얘기가 나오면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가 그 집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물으니 잠시 쉬는 중이라 했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들었던 그녀의 사연은 고향에 부모가 다 있지만 뭔가 일을 해야 했기에 전주에 나와 있다는 설명이었고 고향을 물으니 바로 관촌면에 있는 그 마을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 전부였다. R양이 산다는 그 마을 이름은 임실 뿐만 아니라 순창군에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고 그 동네를 내가 안다고 얘기하자 그녀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반가움에 이것저것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었다.
나로서는 예전 전국을 대상으로 한 취재 경험으로 인해 전국의 면(面) 또는 마을단위까지의 행정구역과 함께 주변 관광자원과 풍속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걸 무기로 사람을 만날 때면 가끔씩 아는 척 하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자신의 고향얘기를 꺼내면 누가 되었든 호감을 갖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녀의 얘기를 꽤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그녀의 이름 석자와 순박한 얼굴만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술 가게에서 일한다는 게 좋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보다 나은 직장에 취업했던지 아니면 결혼을 했던지 간에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 것 뿐이다.
언제 다시 이 길을 지날지 모르지만 아마 그 때가 되어도 불쑥 생각이 나서 잠시 옛 생각에 빠져들지 않을까 싶다. 한적한 지방도로변의 한 마을을 지나면서 떠오른 한 여인에 대한 잔상이었다.
신부 세르게이의 교훈
전주에서 햇수로 3년을 보내면서 혼자 지내고 있었으니 혹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있을 수도 있었겠으나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종교였다.
남자의 경우 생활에 구속받는 게 싫어 평소 종교를 외면하고 지내다가도 많은 것들을 경험한 40대 이후가 되면 마음이 조금씩 약해지고 허전해 지면서 상당 부분 종교에 의지하려는 현상이 늘어난다. 내 경우는 그와 좀 다르다 할지라도 어떻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 나를 속이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다. 건방지지만 특히 도덕적인 면에서는 그랬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죄를 짓고 살아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또 하나는 내 인생의 교범처럼 여기는 톨스토이의 단편 ‘신부 세르게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신부 세르게이에 전개되는 얘기는 특히 이성문제에 있어 사실 그동안 나 혼자만의 윤리 강령인 것처럼 여기며 마음 속에 담아오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굳이 언급한다면 이런 사연이 담겨있다.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다. 그때 구입해서 읽던 책 중에 고유섭(1905~1944, 미술사학자)의 ‘한국미(韓國美)의 산책’이란 것이 있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누렇게 바랜 책을 다시 꺼내 보던 때가 대략 10년 전쯤의 일이다. 그의 ‘한국미의 산책’에는 우리 미술에 대한 이론적 기술 외에 책 후반부에 자신의 수필 몇 편이 실렸는데 처음에는 간과했던 내용을 두 번 째 읽으면서 마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몇 편의 수필가운데 ‘정적(靜寂)한 신(神)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그 수필에서는 지은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다는 톨스토이의 ‘은둔(隱遁)’이라는 단편 내용을 회상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주 깊은 수도원에서 수 십 년 동안 신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어느 날 밤 한 여인이 찾아오고, 그 여인의 간청에 의해 수도자는 할 수없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주나 그녀는 그 수도자 옆방에 들어서는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온갖 신음소리로 그를 유혹한다. 그는 그 유혹을 참아 내고 마음속의 악마인 육욕을 이겨내기 위해 결국은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내리 찍는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 스스로도 그 정도의 자제력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대형서점 인터넷 판매망에 들어 가 소설 ‘은둔’을 찾았으나 거기에는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일제시대 일본인이 번역했던 일본판 제목이었을 것이고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되었을 것이고, 오늘에 와서 누군가에 의해 번역해 놓은 우리나라 판 번역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고 세밀하게 뒤져보니 비슷한 내용일 것 같은 두 개의 제목이 검색된다. 톨스토이의 ‘악마’와 ‘신부 세르게이’였다.
반가움에 곧바로 주문하여 도착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니 단편 ‘악마’는 내가 원하던 책이 아니었으며 또 다른 책 ‘신부 세르게이’, 이 책이 바로 고유섭 선생이 말한 그 ‘은둔’이었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리면 이런 것이 된다.
장래 촉망받는 러시아 근위대 소속 청년 장교 스테판 카자스키는 상류사회의 백작 코르토코바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녀가 니콜라이 황제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실망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떠나게 되고 그는 수도생활 3년 만에 세르게이라는 이름으로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어떤 욕망과 자만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단순한 육체의 기도가 아닌 영혼이 기도가 절실함을 느끼면서 은둔생활을 결정하고는 탐비노라고 하는 산중턱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은둔생활 6년 째 그의 나이 마흔 아홉, 짚을 깔아 만든 침상과 몇 권의 책으로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해 나갔으나 세상일에 대한 의혹과 욕정에 대한 갈등에 대해 여전히 괴로워한다.
어느 날 밤 한 돈 많은 이혼녀가 의도적으로 찾아와 밤이 깊어 갈 곳이 없으니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간청한다. 세르게이는 그럴 수 없다고 했으나 추운 날 사람을 죽일 셈이냐고 사정하자 할 수 없이 칸막이 벽 안쪽 방에서 자게 한다. 그러나 짙게 풍기는 향수 냄새와 몸이 아프니 도와달라고 신음소리를 내며 불러대는 목소리에 괴로움을 느낀다. 마침내 그는 벽에 걸려있는 도끼를 집어들고 왼손 둘째손가락을 장작을 패던 그루터기에 올려놓고 내리 찍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수단 자락으로 감싸고 피를 흘리며 그녀 앞에 다가가서 말한다.
‘사랑하는 자매여, 당신은 왜 자신의 영혼을 멸망시키려 하오. 유혹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나 그 중개자가 되는 것은 재앙이오. 당신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시오’
결국 그녀는 신부 세르게이에게 용서를 빌었고 1년 뒤 그녀는 수녀가 되었다.
신부 세르게이는 이후 7년 동안 은둔처에서 살았고 8년째부터는 병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사람의 병은 하느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나 한 아이 어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그 아이에게 머리 안수를 해 주자 병이 나아버린 것이다. 소문이 퍼지면서 날이 갈수록 방문자가 많아지고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 때문에 영혼을 단련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적어졌고 내면생활이 깨어지고 자꾸 외형적인 생활로 바뀌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상인이 병든 딸을 데리고 나타나 치료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의 딸은 햇빛을 무서워하여 밤에만 외출할 수 있는 병이라 하자 고쳐주기로 마음먹는다. 세르게이는 얼굴이 유난히 희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얌전한 처녀를 보자 어떤 자책감과 공포를 느꼈다. 그녀가 육감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꿈에서 세르게이를 보았다 하며 그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가슴에 올려놓는다. 세르게이는 이미 그녀에게 정복당했고 욕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세르게이의 한 손을 그의 허리 뒤로 돌려서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은 채 그와 나란히 침대 위에 누웠다.
……………
세르게이는 이후 구걸을 하며 돌아다니는 순례자 신세가 되었고 부랑자로 처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으며 어느 부유한 농부의 고용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산 속에 있는 한 수도원. 수도자들은 고행을
통해 보다 하느님 곁에 다가 가기를 원한다.
조금 길게 요약되었지만 여기에 우리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삶의 모순이 담겨 있음을 본다. 자기 성취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 자아가 한순간에 얼마나 쉽게 파멸되어 버리는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천형일 것이지만 톨스토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일컫는 이 ‘신부 세르게이’에서 세르게이는 우리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고달픈 구도자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도 몇 해전 누군가에 의해 책 내용에 대해 전해 듣고 흥분된 마음에 곧바로 원서를 구해 번역을 했노라고 책머리에 적고있다. 나의 마음과 상통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씩 나에게 왜 산에 혼자 가느냐고 물으며함께 가자고, 혹은 산행 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몇 있었지만 한사코 거절하고 혼자만을 고집한 것은 이 소설이 암시하는 내용과 비슷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구입해 읽은 책 속의 삽화. 노신부 세르게이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차는 다시 전주시가지로 들어 와 중심가를 지나고 있다. 도시는 생리상 꼭 여성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언론기관에 근무한다는 나의 직책과 관련하여 아직도 이런 저런 유혹과 회유가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 유혹을 거부하고 물리쳐야할 때마다 나 자신도 때때로 많은 것들을 고뇌하며 한편으로는 구도자적인 삶의 한 단계를 흉내 내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순수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적당한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일정한 규모의 조직을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만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 자신 명예를 소중히 생각한다 하면서도 세속적인 평판 같은 것을 의식한 채 허상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언제나 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 한다고나 할까.
한여름 날의 임실 고덕산 산행은 이런저런 생각에 대한 많은 질문과 답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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