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천왕에 오르다 - 지리산

소나무 01 2009. 12. 25. 23:42

 

 

  그 때 노고단의 추억

 고교 2학년이던 여름,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한답시고 만용을 부린 일이 있다. 일 주일 정도 먹을 식량과 군용텐트 등의 무거운 장비들을 넣은 군용배낭을 들쳐 메고 잡다한 물건을 집어넣은 여행가방까지를 손에 든 채 지리산 노고단을 오른 것이었다.

 그런 중무장(?)으로 노고단을 오르면서도 등산로 중 가장 힘이 드는 것으로 알려 진 화엄사 → 노고단 코스를 택했으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맨 몸으로 걸어도 힘겨울 텐데 20Kg 이상 나가는 등짐과 손가방까지 들었으니 그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셈이었다. 출발은 보라는 듯이 했으나 10분쯤이 지나면서부터는 너무 힘겨운 나머지 5분 걷다 5분 쉬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체력이나 장비, 요령 등 등산에 대한 식견이 전혀 무지한 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4시간 정도의 행군 끝에 거의 패잔병 같은 몰골로 정상에 도착했던 추억이 있다.

 

 그런데 정상에서 만난 풍광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저 아래로 구름이 바다가 되어 흰 물결을 이루었고 주황색의 동자꽃과 노오란 원추리가 하늘로부터 가장 투명한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마치 신선이 되어 별천지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토록 힘들게 올라와야 했던 고역스러움을 일시에 기쁨으로 보상해 주는 것이었다.

 산은 인간이 힘들게 올라 온 만큼의 더 먼 곳까지의 감춰진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것, 말하자면 산은 인간의 노력에 대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 준다는 것을 그 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힘들게 산을 오르는 모양이었다.

  

                                  손가방까지 들고 올라갔던 노고단 사행. 고교 2년 때인

                           1968년 화엄사 사자탑 앞에서 함께했던 친구들과. 

 

 그 때의 무거웠던 배낭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떻든 나는 그 후로 30년이 훨씬 넘도록 두어 차례 빼놓고는 배낭을 매어 본 일이 없었다. 개발과 편리함이란 미명으로 높은 산꼭대기까지 도로가 뚫렸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차를 타고 편하게 산을 오를 수 있게 된 이유도 있었다. 지리산에도 천은사 쪽에서 성삼재를 지나 정령치와 달궁으로 가는 산중도로가 개설되어 수월하게 산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가는 도로도 오래 전부터 개설되어 있었으나 자연환경 보호 차원에서 현재 통제되고 있을 뿐 내가 그렇게 힘들게 올랐던 노고단도 기회만 만들면 차를 타고 손쉽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전주에서 근무하면서 그 곳에 설치되어있는 방송중계시설 때문에 나는 차량을 이용해 실지로 몇 번 올라갔다 온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산행을 위해 내가 본격적으로 배낭을 매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햇수로도 불과 3년 정도의 연륜밖에 되지 않는다.

 

 

아들과의 동행

 지리산 천왕봉도 역시 배낭이 없는 맨몸 상태였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오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갑자기 결정한 일이었고 그것은 아들 동석이 때문이었다.

 녀석이 대학 2년 때인 어느 여름 날 모처럼 아들과 함께 짧은 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도시생활에 찌들다 보니 산촌 냄새가 그리워 전남 장흥 산골짜기에서 유기농을 고집하며 뚝심으로 농사짓고 있는 친구 현인이를 찾아 나섰고 함께 논에 무수히 난 풀 방동사니를 일일이 손으로 뽑아주고는 그 대가로 맛있는 저녁밥과 술을 얻어먹고 산골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녀석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여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보성 율포해수욕장을 찾아 해변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동석아, 우리 지리산에 가 볼까?”

“지리산 어디?”

“천왕봉이지. 그래도 남한 땅 내륙에서 가장 높다는 산인데 아직 못 올라가 봤거든. 생각 있냐?”

“지금?”

“지금 가는 거지. 어차피 어디 가겠다고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

“좋지”

아들 녀석 대답은 의외였다. 별 생각 없이 던져 본 말인데 녀석이 너무 쉽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녀석은 아마 산행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제일 높은 산에 올라보겠다는 욕심이 우선인 것 같았고 방학동안의 한 보람으로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준비해 온 등산장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무리이겠다 싶었지만 내 친 김에 강행하기로 했다. 지도를 살펴보니 천왕봉을 하루만에 올라갔다 내려 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함양군 마천면의 백무동 한신계곡에서 장터목을 거쳐 오르는 코스면 가능할 것 같아 곧바로 차를 몰아 순천을 경유하고 섬진강변을 따라 오른 후 함양 쪽으로 꺾어 들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백무동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차를 계속 몰아 계곡 맨 위쪽에 위치한 민박집에 대었다.

 

 오후 5시 무렵의 계곡 주변은 물 흐르는 소리 외에는 조용하였다. 대구에서 살다가 경개 좋고 공기 맑은 곳을 찾아 이곳에 들어와 계속 눌러 살고 있다는 60대 부부의 민박집, 주변에는 호두나무가 많아 마당 여기 저기에 열매가 많이 떨어 져 있었다. 그 가운데 실한 것들만 골라 주워 시멘트 바닥에 놓고 돌로 내리 쳐서는 하얀 속살을 꺼내 먹는 재미가 제법 솔솔 하다. 서울 생활의 삭막함이나 단조로움과 자꾸 비교되는 산골 시간이다.

 주인 아주머니가 차려 준 산채 위주의 저녁을 마당 평상에서 먹으며 행복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실감을 하게 되고 서울에 있는 아내와 딸과 그리고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집 마당에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평상이 있었다. 여름이면 근처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가족끼리 저녁밥을 먹고 나면 이어서 수박화채 같은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큰 양푼 하나를 내어 주시며 동네 ‘아이스케키’집에 가서 얼음을 사오라고 주문했다. 숟가락을 들고 빨간 속살이 없어질 때까지 파먹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어 듣다가 평상한쪽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떠보면 어느새 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이었다. 녀석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둥 반응이 없다.

“별 좀 봐라, 얼마나 좋으냐!”

 잠시 올려다 본 하늘에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었다.

“옛날에는 별똥 떨어지는 모습도 가끔 봤는데…… ”

 나에게는 어릴 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지만 녀석에게는 지금 눈앞에 TV가 없다는 것이 불만인지도 몰랐다. 온갖 풀벌레 소리와 함께 산골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천왕봉 등정계획 얘기를 꺼냈더니 당신 말대로만 하면 하루만에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을 것이란다. 얘긴 즉 오늘밤에 도시락을 각각 두 개씩 싸 놓을 테니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해서, 가면 서 아침으로 까먹고 또 적당한 시간에 점심으로 챙겨 먹으면 네 다섯 시경에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었다. 경험 있는 분의 얘기고 보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줄잡아 10시간 정도는 걸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 일찍 잠을 청하기로 한다. 다정한 친구라도 있으면 잠시 소주라도 걸치겠는데 그런 것말고는 특별히 할 만한 것이 없다.

 주위가 갑자기 적막해졌고 골짜기의 찬바람 때문에 방안까지도 냉기가 감돈다. 두 사람이 좁지 않게 잘만한 작고 허름한 방에는 창문이 아예 없다. 밤하늘도 볼 수 없지만 새벽이 되어도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것 같다. 풀어놓은 야광 손목시계를 머리맡에 끌어다 놓고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곧바로 잠에 떨어져 버렸다.

 

 담요를 깔았음에도 바닥의 찬 기운 때문에 몇 차례씩 잠에서 깼으나 시계를 보며 여명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6시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아주머니가 일러 준대로 부엌 한 귀퉁이에서 어젯밤 미리 준비해 준 도시락을 꺼내 작은 쌕에 담아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발걸음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적막감이 감돌았지만 계곡의 물소리가 때론 높게 때론 낮게 들리면서 깨어있는 시간임을 일러주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더없이 맑고 상쾌했지만 바람이 없어 약간은 후덥지근했다. 등산로 양쪽으로 온통 나무가 뒤덮어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걸어가면서도 최대한 시야를 확보해 지팡이가 될 만한 나뭇가지를 찾았다. 스님이 산길을 오가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허리나 다리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비록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갖고 있는 것들이 발에 밟혀 다치지 않도록 미리 소리내어 깨우는 신호라 하지 않았는가. 내가 나무 지팡이를 찾는 것은 땅을 두드려 그런 미물을 깨우겠다는 숭고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뭇가지로 주변의 나무나 바위를 두드리며 지금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혹 몸집 큰 짐승이나 뱀과 같은 파충류로부터 오히려 나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더 크고 또 나뭇가지를 이리 저리 흔들며 산행을 하다 보면 무료함도 달래지고 팔 운동도 적당히 되는 것 같아 습관적으로 챙겨지는 것이었다.

 

 7시 반쯤 되었다. 사방이 훤해졌고 새벽의 차가웠던 기운이 많이 가셨다. 물이 있는 작은 계곡에서 둘이 앉아 쉴만한 너른 바위를 찾아 도시락을 꺼낸다. 뱃속에 집어넣으면 그만큼의 무게라도 줄일 수 있어 좋을 것이다. 마른반찬 몇 가지에 찬밥 덩어리라도 꿀맛이다.

 대략 2Km 정도 걸어 온 것 같은데 정상까지는 6Km정도가 되니 이제 겨우 3분의 1정도를 오른 셈이다. 적지 않은 체력소모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든든히 먹어둬야 했다. 산행하면서 식사 문제를 소홀히 하여 빈사상태에 빠졌던 참담했던 경험이 있어 더욱 그랬다.

 고교 졸업 후 재수도 아니고 취업 준비도 아닌 그저 어정쩡한 상태로 나날을 보낼 때 친구와 단 둘이 가을 설악산을 찾은 일이 있다. 중간정도인 양폭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최고봉인 대청봉을 오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 난 우리는 왕복 두어 시간 정도면 쉽게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아 갔다 와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는 서둘러 정상을 향해 떠난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음식물 준비 없이 젊은 혈기만을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공복인 채로 씩씩거리며 1시간 정도를 땀흘려 올랐고 보니 막상 정상에 도착해서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그대로 뻗어버린 것이다. 온몸에 기운이 좍 빠지면서 하늘이 뱅뱅 도는 것 아닌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에게 ‘나 죽겠다. 너무 허기 져’ 그리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놀란 것은 친구였다. 친구 난수(현재 경기대학 근무)도 분명 나처럼 빈사 상태에 빠졌을 텐데 그래도 나보다 나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라 하더니 저 아래로 보이는 건물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군부대 막사였다.

 그러나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답을 들었던지 친구는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잠시 정신이 돌아온 나는 주위를 살피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먹을 것이 있는지를 살폈다. 군데군데 빨간 열매가 보였다. 손에 잡히는 데로 허겁지겁 정신 없이 따먹었다. 청미래덩굴 열매였다. 친구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는 둘 다 다시 그대로 그 자리에 뻗어 버렸다. 가사상태로 한참을 누워있다 보니 약간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몸을 추슬러 빨리 돌아가야 했다.

 몇 걸음 씩 움직여 하산하는 길에 마악 정상에 도착한 등산객 그룹을 만났다. 그들은 그야말로 구세주였고 우리로서는 음식을 구걸을 해야하는 행려병자 신세였다. 김밥 몇 개를 얻어먹고 나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그 일은 산행에 무지했던 나에게 큰 교훈이 되었고 이 후부터는 물과 간식을 꼭 챙겨 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지금 지리산에서의 아들 녀석과의 아침은 그 때 설악산 산행에서와 같은 이른 출발이었지만 도시락과 물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아침 먹는 사이에 네 사람이 우리를 추월하여 올라갔다. 저 사람들도 분명 새벽 일찍 출발한 사람들일 것이다. 참샘이란 곳에서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망바위에 도착한다. 저 아래 산허리로 구름이 멋들어지게 드리워져 있다.

 지금까지는 나무와 숲이 하늘을 가려 답답한 편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눈길 머무는 곳마다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들을 카메라에 아니 담을 수가 없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며 망바위에서 촬영한 운해.

 

 

장터목을 지나 천옹봉으로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잠시 숨을 고르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어느 정도의 고지로 올라서서 인지 길이 비교적 완만해 졌다. 기다란 산죽 길이 전개된다. 지리산에 숨어 든 빨치산들이 이곳 산죽 숲에서도 혹한을 견뎌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해방 후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우리민족의 커다란 아픔과 상처가 담겨있는 산이 바로 이곳이고 보면 그런 문제를 외면하고 단순히 지리산의 자연경관만을 즐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고지대에 올라서니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 능선이 시원스럽게 전개된다.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 졌다.

“동석아, 저기가 장터목인가 보다. 그런 것 같지?”

“산장이 있네. 멋있다-. 그런데 옛날에 장터가 있었나? 이런 곳에?”

“나도 잘 모르지. 그런데 이름이 멋있잖냐? 장터목- ”

 그러나 금방 나타날 것 같던 장터목은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통나무로 예쁘게 지어진 산장 앞에는 제법 넓은 평지가 있었고 여러 갈래 등산로에서 올라 온 등산객들도 북적거리고 있었다. 해발 1,650m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옛날에 지리산 남쪽 기슭과 서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만나 장을 세우고 서로 물물교환을 했다고 하는데 이 험한 산길을 올라 정말 그랬을까 싶다.

 

                  

                   겨우 몸 하나 빠져나올 수 있는 통천문 앞에서 아들과.

 

 아직 12시를 넘지 않았지만 이 곳에서 나머지 도시락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등산객을 위해서 나무 의자도 여러 개 만들어 놓아 식사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 마지막 보따리를 풀었다. 장터목에서는 등산객을 위해 인스턴트 음식물도 팔고 있었다. 더운 어묵 국물과 함께 찬밥 덩어리를 집어넣으니 한결 속이 부드러웠다.

 장터목 평지 한 쪽 구석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 포대가 쌓여 있었고 먹을 것을 구하느라 들짐승들이 여기 저기 포대들을 물어뜯어 헤친 자국이 보인다. 그러나 저러나 얼마나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 와 먹고 버렸으면 저 정도가 되었을까. 틀림없이 헬기로 날라야 할텐데 그 처리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듯 싶었다.

 장터목을 떠나 잠깐 동안 오르자 고사목 지대가 전개된다. 키 큰 나무 한 그루 없이 주변이 온통 발가벗었다. 한 순간의 화재로 이 너른 곳이 일시에 황폐화되었으니 인간의 방심과 실수가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제석봉 주변의 고사목들은 새로 심어 놓은 구상 나무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푸르게 자라고 있는 야생초 사이에서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듯 하다.

 때때로 목책을 따라 걷다보니 1,808m의 제석봉을 지나게 되고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철계단을 따라 어렵게 빠져 나온다. 뒤따라오던 아들 녀석은 언제부턴가 나 보다 한참을 먼저 앞질러 가고 있다. 이제 스물의 혈기 왕성한 나이이고 보니 한참 힘을 쓸 때 아닌가.

 

 지리산 서쪽과 남쪽 사람들이 서로 만나 장을 세웠다는 장터목. 지금은 산장이 지어 져 있다.

 

 마침내 저기 천왕봉이 보인다.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눈높이 수준의 작은 봉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간간이 ‘야호~ ’하는 함성도 들려 온다. 10여명 정도가 함께 부르는 지 애국가의 합창소리도 장엄하게 들려온다. 힘들게 올라 와 정상을 밟았다는 기쁨과 환희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외침일 것이다.

  씩씩거리며 한달음에 달려가 가까이 접하니 100여 명 정도가 정상 주변에 모여있는 것 같다. 대원사 쪽에서, 중산리 쪽에서… 사방에서 올아 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들은 지금의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엄지손가락 모양의 커다란 입석에 ‘天王峰’이라 음각한 기념비 앞에서 경쟁적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취하는 포즈들이 한결같다. 겨드랑이로 비석을 적당히 끼고는 입을 꼬옥 다물고는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아마 경직된 군사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순서를 기다려 동석이와 함께 우리도 결국 똑같은 모습으로 기념 촬영을 하다. 누가 그랬던가. 나이 들어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남는 것은 나이와 사진뿐이라고.

 

 시계는 1시 반,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5시간 정도를 걸은 것 같다.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주변의 모든 산들이 이곳 천왕봉을 향해 엎드려 있다. 저 멀리 반야봉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노고단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과 산들이 연달아 달음질하며 위대한 대자연의 장쾌한 모습을 연출한다. 백두대간 끝자락에서 보는 감동의 파노라마인 것이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한없이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며 겸손을 깨우치게 되고 부질없는 사욕과 오만함을 다시 한번 경계하게 된다.

‘빈욕한 마음으로 이(利)를 바라지 말라’

‘부도덕하고 사악하고 이기적인 현실 삶에서 최대한 순수하게 살아라’

 지리산 천왕봉은 우리 부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서다.

 

 이후 아들 녀석은 해군에 지원 입대했다. 남자라면 다 겪는 과정이고 또 정신과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단체 생활이라 생각하지만 진해에서의 입소식이 끝나고 연병장 안쪽으로 떠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기에 친구처럼 지내려고 애를 써서 인지 정이 많이 들었고, 일정기간 동안은 통제된 공간에서 엄격한 규율과 훈련 속에 무척 힘들어 할 것이라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지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도 다음 날 퍽퍽 울었다고 딸 녀석이 나에게 일러댔지만 밥숟가락을 들을 때나 쓰던 물건 하나 볼 때마다 얼마나 눈물을 훔쳤겠는가.

세월은 또 금방 지나가서 이 놈은 복학생이 되었고 지금도 시간을 만들어 함께 산에 다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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