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산에 피는 꽃

소나무 01 2009. 12. 25. 23:25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들꽃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를 비롯해서 개나리, 목련, 산수유, 벚꽃 … 등 이제는 흔해져 버린 이런 봄꽃들이 피어나면 곳곳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여 한바탕 소란한 잔치를 벌인다. 지난 4월 전주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내 일터가 있는 여의도로 돌아왔을 때 한창 만개한 윤중로의 벚꽃을 보기 위해 여기에만 해도 엄청난 인파가 밤낮으로 몰려들어 북적댔다. 매화로 유명하다해서 광양군 다압면에 있는 매화농장을 지난 봄에 한번 가봤더니 한마디로 시장바닥 같아서 실망했었다. 차라리 이런 때 산을 찾아 나서 산 속에 피어난 꽃을 조용히 감상하는 기회를 가져봄이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산에는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과 딱딱한 나무 껍질을 뚫고 나온 새 움들과 함께 그 산 안에서 자유스럽게 피어난 야생화들이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이들 야생화들은 저 잘났다고 뽐내거나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숨은 듯 피어나기 시작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면서 산에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꽃은 복수초다. 매화보다 훨씬 일찍 개화하는 이 꽃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 광주에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담양의 추월산 자락에 살고 있는 의형을 만나러 갔을 때 양지쪽 산비탈의 누런 낙엽더미 속에서 군데군데 노랗게 흩뿌려져 있는 듯한 이 꽃들의 군락을 처음 보았고 이 때 형에게서 들은 꽃 이름은 ‘벌꽃’이었다. 왜 벌꽃이냐고 물었더니 이 시기가 되면 벌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시작하면서 이 꽃에 벌들이 많이 날아들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니 꽃잎이 매끄럽고 윤기가 흘러 마치 얇은 비닐로 만들어 놓은 조화 같다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이름이 복수초였지만 나에게는 벌 꽃이라는 그 이름이 훨씬 정감이 있고 좋았다.

 부안 변산 쌍선봉 오르는 길 월명암 근처 산 속에서 발견한 연분홍의 아주 작고 귀여운 바람꽃과 완주 서방산 정상 부근에서의 노루발 꽃, 장수 장안산에서의 구슬봉이 등의 그 귀한 만남은 계절과 관계없이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소중한 기쁨이었다. 치악산에서 본 산수국, 소백산 비로봉 부근의 쥐손이 꽃과 마타리도 기억에 선하고 정선 오대천 수항리 부근에는 귀해진 할미꽃이 지천이어서 별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내가 야생화를 보기 위해 일부러 산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야생화가 있어 산행이 더욱 즐겁고 행복해 지는 것이었다.

 

 번식력과 생명력이 강한 민들레.

 

 내가 15년 째 살고 있는 관악산 자락에도 야생화가 많이 피어난다. 새 봄이면 좁쌀만한 파란 구슬을 박아 놓은 듯 귀여운 꽃을 피우는 개불알풀과 햇빛 잘 드는 곳의 제비꽃과 현호색은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고 계절 따라 애기똥풀과 양지꽃, 씀바귀, 산괴불주머니, 큰까치수염, 각시붓꽃, 물봉선, 닭의장풀, 며느리밥풀, 개여뀌 등이 자주 눈에 띠며 개망초는 어디를 가나 지천이다. 일부러 산 속을 뒤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바위채송화, 타래난초와 산부추도 눈에 띠었다. 삼성산 정상부근에서 발견한 타래난초는 깨알만큼 작은 분홍색 꽃들이 사선으로 길게 솟아올라 너무 곱고 아름다웠다.

 한번은 산책로에서 약간 벗어 난 곳에 숨은 듯 피어있는 둥글레꽃을 발견하고 줄기 밑으로 하얀 구슬이 가지런히 매달려 있는 듯한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했는데 일주일 후 다시 갔더니 누군가가 통째로 캐 가버려 흔적도 없었다. 세 포기가 터를 잡아 귀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다시는 그 근처에서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이 사람을 유혹했겠지만 둥글레가 약용식물인데다 요즘 들어 야생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집에서 야생화를 기르는 취미활동은 인공 재배된 화려한 꽃들에 식상해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지만 최근 늘어난 야생화만을 전문으로 촬영하여 잡지와 달력 또는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보급하는 사진작가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내가 제작하던 아침 TV방송에서도 ‘한국의 야생화’란 이름의 시리즈로 매일 1분 짜리 영상을 방송한 바가 있다. KBS 2TV로 매일 아침 방송되던 ‘생방송 좋은 아침입니다’ 프로그램에서 7시 무렵이면 전문가가 근접 촬영한 우리 야생화 한가지씩을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동영상으로 방송했었는데 시청자들은 그 화면 때문에 아침 기분이 좋아진다며 좋아했다. 시리즈 방송이 모두 끝난 후 한 가지 한 가지씩을 세어 보니 모두 3백여 종의 우리 꽃을 소개한 셈이었다. 나도 그 때 야생화의 이름과 특성을 많이 알게되었지만 그러나 사진으로 보면 쉽게 잊어버리게 되고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실물을 봐야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되었다.

 

 요즘에는 야생화만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식물원이 생겨나면서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고 취미생활로 야생화를 키우는 동호인, 야생화만을 촬영하러 다니는 사진작가, 야생화만을 그리는 화가들이 늘어나고 있어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는 편이다.

 농가에서 소득작물로 야생화만을 재배하는 곳도 있는데 그게 얼마나 돈이 될까 싶지만 지방 자치단체에서 시가지 가로변이나 공원과 같은 녹지공간을 새롭게 단장한다든지 각 기관 단체 등에서 건물 주변의 환경미화를 위해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 적잖은 수입이 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야생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이름 그대로 야생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흔한 듯 귀한 듯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희소성이다. 흔한 듯하면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희소가치가 있어야 우리 눈에 더욱 아름답게 비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 자리에 있어 아름다운 꽃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꽃은 야생상태의 도라지꽃이다. 도라지꽃은 흰색과 보라색의 두 종류가 있는데 요즘에는 재배하는 곳이 많아 흔히 볼 수 있지만 호젓한 산길을 가다 저 만치에 홀로 피어있는 도라지꽃을 발견하게되면 그 모습이 그렇게 단아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나는 그 때마다 우리네 여인상을 생각하곤 한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무릇 저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겉모습만의 화려함 을 경계하며 은근한 빛깔로 꽃을 피우고 잘 보이려 발돋음 하지 않는 꽃, 수줍은 자태로 함초롬히 피어있는 촌색시처럼 수수한 꽃- ”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그 옆에 한참동안 서 있다가 돌아서게 되고 그리고는 마치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떠나 보내게 된 여인을 돌아보듯 발걸음을 옮기며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곤 한다. 도라지꽃은 나에겐 그만큼 각별한 꽃이 되었다.

 

 얼마 전 TV에서 영상 위주로 새롭게 만든 황순원의 ‘소나기’를 본 일이 있다. 소녀는 도라지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소년이 들꽃을 한 움큼 꺾어 윤초시네 증손녀인 서희에게 건네 주자 소녀는 기뻐하면서 들꽃 가운데서도 유독 보라색의 도라지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아마 작가 황순원의 성품이 그랬을 것이다. 그도 평소 도라지꽃을 무척 좋아했었나 보다. 그는 평소에 분수를 지키며 염결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그가 타계할 때는 여느 날처럼 똑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남에게 괴로움 주지 않고 스스로도 고통받지 않으면서 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으면 그것도 축복받을 일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좋아하는 꽃. 예쁘게 봐 달라 발돋움하지 않는 도라지의 청초함이 마음을 끌어 당긴다.

 

 나는 산에서 처음 대하는 야생화를 보면 집에 돌아 와 식물도감을 뒤진다. 물론 이름을 알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도감은 과(科)와 속(屬) 등 식물의 특성별로 되어 있어 원하는 내용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부피의 식물도감을 그저 막고 품는 식으로 뒤지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 뿐 그런 작업을 통해 꽃 이름을 알게 되면 역시 깊은 산 속에서 희귀한 야생화를 만나는 것처럼 기쁨이 크고 오랫동안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도감은 계절별로 분류해 놓은 것도 있으나 욕심 같아서는 색깔별 또는 크기별로 분류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게된다.

 야생화 이름들이 대개는 순수한 우리말로 이름 지어져있어 경탄을 금하지 못할 때가 있다. 꽃의 생김새를 보고 그렇게 이름 붙였으리라 짐작하지만 예를 들면 매발톱, 처녀치마, 범꼬리, 투구꽃 등의 이름들이다.

 내가 아는 이름 중에서 가장 희한한 것은 며느리밑씻개란 이름이 붙은 1년생 덩굴풀이다. 여름이면 작은 밥 알갱이 같은 꽃이 피는 흔한 식물이며 삼각형 모양의 잎을 따서 씹어 보면 약간의 신맛이 도는데 줄기와 잎자루에는 환삼덩굴과 같은 가시가 많이 나 있다. 그 이름이 너무 재미있어 누가 그런 이름 붙였을까 궁금해 그 연유를 추적해 봤더니 재미난 얘기가 전해온다.

 

 옛날 어느 마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살았다. 시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이 며느리에 빠져 자신을 홀대하는 것 같아 항상 여우같은 년에게 아들을 빼앗겼다고 한탄하며 지냈다. 어느 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밭일을 하게 되었다. 뙤약볕에서 일하던 며느리가 고달픈 나머지 꾀를 부려 배가 아프다 하고는 밭 가장자리에서 한참동안 실례를 한 후 시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거기 콩잎 몇 장만 따 주세요”

했겠다. 은근히 화가 난 시어머니는 잔가시가 붙어있는 이 풀잎을 몇 장 따다가 며느리에게 들이밀었다.

“엣다 받아라!- ”

 콩잎인 줄 알고 얼른 받아다가 엉겁결에 그 것으로 처리하게 됐는데 며느리는 이후 그 곳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겠는가. 평소에 며느리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랬을까만 고부간의 냉한 관계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아 보이고 아무튼 새로운 식물에 작명작업을 하던 어느 식물학자가 민간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그렇게 이름 붙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나도 개구쟁이 시절엔 가시가 촘촘한 환삼덩굴 줄기를 끊어다가 신비스런 냄새가 난다며 친구의 코밑에 들이밀고는 순간적으로 긁어 제쳐 살갗에 상처를 내곤 냅다 도망치던 기억이 있다. 도시주변 유휴지에 제일 왕성하게 번식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 환삼덩굴이어서 중년 이상인 사람들은 옛날의 그런 기억을 꺼내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꽃이 있는 나무들

 굳이 1년생 야생화가 아니더라도 다년생 나무에서 피는 꽃들은 해마다 똑같은 자리에서 꽃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자주 다니는 집 앞 관악산 산책로에는 새 봄에 한바탕 진달래로 잔치를 치르고 난 후 5월 중순경이면 아카시아로 또 한번의 잔치를 치른다. 번식력이 워낙 강한 수종이고 보니 근처 산자락이 온통 아카시아 나무로 덮여있어 아침에 창문을 열면 그 향기가 독하다 싶을 정도로 진동을 한다. 또 이보다 조금 일찍 좀 더 안 쪽으로는 때죽나무와 병꽃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시선을 붙잡는다. 때죽나무 꽃은 산딸나무와는 반대로 나뭇잎 밑으로 꽃이 매달려 하얗게 피어나는데 꽃이 지고 나면 종(鍾)모양의 열매를 매달아 마치 종이 무수히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영문 표기로 스노우벨(Snowbell)이라는 예쁜 이름이 붙여진 모양이다.

 

 병꽃은 병 모양을 닮아 그런 이름을 붙였을 테지만 화려하지 않은 붉은 색깔의 꽃이 그런 대로 보기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산책로 안쪽으로 몇 발자국 더 옮겨 들어가 봤더니 늘 보던 색깔이 아닌 하얀 빛깔의 병꽃이 눈에 띠는 것이었다. 마치 방죽에서 분홍색깔의 연꽃만 보다가 하얀색의 연꽃을 보게 된 반가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채란(採蘭)을 할 때 변이종을 만난 기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너무 기분이 좋아 이리 저리 한참동안 들여다봤던 일이 있다.

 지금은 이 병꽃이 관악산입구에서 삼막사로 넘어가는 등산로 주변에 국수나무와 함께 인공적으로 많이 심어져 있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게되었지만 야생상태의 꽃 모양이 다르고 자연상태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그 느낌과 가치가 덜한 것만은 사실이다.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계곡을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인 새봄의 산수유 군락.

 

 진달래는 전국적으로 어느 산에나 흔하다. 그런데 산밑을 흐르는 물가에 피어나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은 작고했지만 견지낚시로 유명한 송 우 선생과 동행하여 강원도 정선 땅의 동강 여울에서 취재를 할 때 그가 거의 1분 간격으로 쉴새없이 고기를 낚아 올리던 진풍경을 직접 목격한 바가 있다. 밤이 되어 우리 스탶들을 위해 매운탕을 끓여주던 그는 다음 해 5월이 되면 근처 송천(松川)을 찾아가서 그 곳에 피어있는 수달래의 장관을 꼭 구경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진달래면 진달래지 수달래라는 게 있나요? 진달래가 물가에 피었다고 해서 송선생님이 그냥 그렇게 이름 붙였죠?”

“아니 수달래가 맞아요-”

 태백산 줄기의 남북으로 흐르는 강변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철쭉이 그곳에서는 5월 초쯤 피기 시작하는데 물가에서 자라는 진달래와 비슷하다고 해서 수달래라 이름하며 그 꽃들이 피어나면 물에 투영된 꽃 그림자와 함께 온 강변이 빨갛게 변해 마치 불이 난 듯 보인다 하여 그 곳 주민들은 송천이란 이름대신 불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수달래라는 이름도 정겹지만 불강이라는 표현도 참 정겹고 신선한 것이었다.

 

 나는 실지로 다음 해에 그곳 송천을 찾아가 하늘과 물과 바위와 그리고 수달래가 함께 어우러진 그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했었다. 지리산 바래봉에서 보았던 철쭉 군락 못지 않게 물가에서 보는 황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던 지리산 자락의 구례군 산동면 원좌마을 일대의 산수유 꽃도 환상적이었다.

 

 계곡 주변과 밭고랑 사이에 마치 노란색의 함박눈이 내린 듯 나뭇가지마다 소담스럽게 피어 난 꽃송이들을 볼 때면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그림처럼 아기자기한 풍광이어서 그 즈음 이 산수유 꽃을 영상 위주로 촬영하여 TV프로그램으로 제작해서는 한 편의 시와 함께 방송을 한 바 있는데 주위사람들로부터 너무 아름다웠다는 과분한 평을 들었다. 나는 취재하면서 야트막한 돌담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풍광 등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 산간 마을에 눌러앉아 살고 싶었다. 비어있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집에는 산수유와 돌담과 적당한 마당이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집 값을 슬쩍 물어보니 3백 만원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막상 융통할 만한 돈도 없었지만 괜한 욕심 같아 그것으로 끝났다.

 

 마치 노오란 눈꽃송이 같은 산수유. 

 

 해마다 봄이 되면 그곳 원좌마을이 생각나고 내가 구입해서 살고자 했던 돌담 집도 생각이 나곤 했는데 그 후 20여 년이란 세월이 지나 전주에 살면서 다시 한번 가 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봄이되면 그곳에서 산수유축제가 시끌쩍하게 열리고 그 밑으로는 온천단지로 개발되어 이젠 관광지화 되어버린 것이었다. 땅값이야 많이 올랐겠다 싶었지만 예전의 정겨운 모습이 아니어서 그 때 그 집을 안 사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산수유나무는 요즘 도시 주변에 많이 심어져 봄을 알리는 전령 역할을 하고 있어 반갑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본디 자리에서 떠나있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원래의 산수유와 달라 보일 때가 많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고,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로 가는 고개를 넘어서기 전에 멀리에서도 확연히 눈에 띠는 새 하얀 꽃이 있었다. 처음에는 산에 피는 목련화인줄 알았으나 꽃 한가운데 빨간 색 방울같은 것이 매달려 있어 달랐다. 도감을 뒤져보니 함박꽃이었다. 혹은 산목련이라 불리 우기도 한다는 설명이어서 처음 본 느낌이 맞았구나 싶었는데 참 기품 있는 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으로 기품 있게 보이는 것은 연분홍의 자귀나무 꽃이었다. 나뭇잎 위로 마치 공작의 깃털처럼 살포시 얹혀있는 연분홍 꽃은 불면 날아갈 듯 솜털처럼 가벼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나무 자체가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이 자귀나무는 합환수(合歡樹)라고도 부른다. 마주보기로 난 타원형의 나뭇잎들이 밤이면 오므라들어 서로 잎을 합해 잠을 자는 듯하여 마치 한 몸으로 사랑을 이루는 금실 좋은 부부 같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앞으로 내가 살겠다고 터를 잡아 놓은 익산 미륵산밑의 땅에도 제법 큰 자귀나무가 자라고 있어 내 마음을 움직였고 그 때문에 적극적으로 매입 의사를 밝혔었다. 요즘은 호남고속도로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었고 작년 여름 정원의 도시라고 불리는 싱가폴에 잠시 들렸을 때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가로변에 수 백년 된 이 자귀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기도 했다.

 

 산딸나무도 덜꿩나무나 누리장나무처럼 나뭇잎 위로 장식을 해놓은 것 같은 형태로 꽃을 피워 진귀한 모습을 연출한다.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한 중년 남자가 산에 갔다온다며 손에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있어 언뜻 보니 산딸나무였다. 꽃이 좋아 꺾어 왔다는데 가지 하나가 어린아이 키만큼 큰 것이어서 나무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산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만은 그 꽃들에게는 공통된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스스로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바람에 특별히 보호받는 것도 아니면서 모두들 제자리를 지키며 그냥 그렇게 피어 있다가 어쩌다 지나치는 사람을 만나면 비로소 자신이 거기 있음을 은근한 색깔과 향기로 보여줄 따름이다.

 우리 인간도 무릇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안이 빈곤하면 겉치레에 신경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화려한 색깔과 진한 향내로 치장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흔히 꽃으로 치부되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왕에 오르다 - 지리산  (0) 2009.12.25
한여름 단상 - 고덕산  (0) 2009.12.25
초록 파노라마 - 나의 신록 예찬   (0) 2009.12.25
혼자 걷는 길 -경각산/운장산  (0) 2009.12.25
따듯한 동행 -천반산/만수산  (0) 200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