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고리
동학사에서 출발하여 남매탑과 금잔디 고개를 지나 공주 갑사로 이어지는 3시간 정도의 계룡산 코스 산행을 대학 1학년 때 했으니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고교 졸업 후 2년을 허송세월하고 들어 간 대학이었으니 나에겐 소중한 캠퍼스 생활이었다. 그러나 사립대학을 택한 바람에 부모님껜 적잖은 경제적 부담을 드린 편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장학금을 타는 신세도 아니었고 보니 용돈 타령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때 쓰던 등산장비는 거의가 군대에서 흘러나온 낡고 볼품 없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움푹 파인 스텐레스 숟가락과 장작불에 그을려 시커멓게 된 찌그러진 항고(군용냄비)와 그리고 닳아빠진 군용 허리띠, 그리고 거기에 매달고 다녔던 역시 찌그러진 수통과 같은 것들이었다.
스틱으로 사용하던 것만은 이른 바 사제품이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레일점검용으로 철도 작업현장에서 가끔 쓰시던 손잡이가 기다랗게 달린 망치였다. 망치로 사용하는 부분은 한 손아귀에 쏘옥 들어 올 정도로 만들어진 귀여운 쇠붙이였고 기다란 나무 손잡이 끝에는 원추형의 작은 쇠붙이가 박혀 있어서 땅을 짚고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급할 경우에는 살상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어 호신용으로도 좋았다. 그런 장비들을 가지고 달랑 차비만 지닌 채 산행을 했고 걷다가 배고프면 라면도 끓여먹고 밥도 해 먹고 했던 그런 형편이었다. 산행으로서의 계룡산과 인연은 그런 정도였다.
이후 동학사나 마곡사 주변을 때때로 찾아가곤 했으나 그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아들 동석이가 해군에 입대하여 반년 정도를 호위함을 타고 서해 바다를 돌아다니더니만 본부가 있는 계룡대로 옮겨 와 복무를 했고 간혹 아내와 함께 계룡대 면회소를 찾아 간 바 있으니 구태여 계룡산과의 인연을 더 갖다 댄다면 그 정도가 전부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 아들놈이 제대를 하고 해외에서 어학 공부를 하던 딸 영아도 돌아 와 우리 가족은 모처럼 만에 한 집에 모일 수 있었다. 항상 같이 있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인데도 나마저 근무지가 전주로 옮겨지는 바람에 우리는 그동안 1년에서 3년 정도를 혼자씩 떨어져 살아야 했었다. 각자의 독립된 생활로 인해 모두들 외로워했으나 긍정적으로 보면 그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깊게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지 않았느냐는 것 때문에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생각도 있다. 딸 영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무 것도 모른 체 제 부모를 따라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을 올라 본 이후에는 등산 경험이 없었다.
어느 여름날 모두 전주에 모였다.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생각하다가 계룡산 산행으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은 또 산으로 가고 싶었던 내가 가족들을 꼬드긴 것이었다. 전주 인근의 산은 이미 거의 올라 다닌 상태라 이왕이면 모두가 초행지가 되는 곳으로 선택하고 싶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계룡산 남쪽의 신원사 계곡 쪽에서 오르면 보다 가깝고 빠르게 정상까지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주에서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입구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여서 무리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등산이 싫다는 영아를 살살 꼬드겨 동의를 받아 냈으나 문제는 신발이었다. 영아가 신고 내려온 신발은 가죽샌들이었고 밤늦게 결정한 일이고 보니 밖에 나가 마땅한 등산화를 구입할 형편도 못 되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서 혹 가게문을 연 곳이 있으면 구입하고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산행을 해 볼 요량으로 일찍 잠에 들었다.
고왕암의 아름다운 초대
아침 일찍 문을 연 신발가게는 없었다. 딸 녀석이 신고있는 샌들은 가죽으로 제법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강행하기로 했다. 날씨는 쾌청하였으나 7월 하순이고 보니 아침부터 햇살은 강하게 내리 쬐었다.
계룡산은 대부분 대전에서 가까운 동학사 쪽에서 오르는 편이어서 신원사 주변은 한산했고 매표소 요원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멀리서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원사(新元寺)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으며 백제 의자왕 11년(651년)에 보덕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신원사 오른 편에는 중악단(中嶽壇)이라는 산신각이 독특하다.
중악단은 말하자면 계룡산 산신을 모셔놓은 제각으로 예전 조선왕조 때에는 묘향산에 상악단이, 지리산에 하악단이 함께 만들어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이 중악단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정감록에는 계룡산은 모든 산의 중심이 되는 영험한 산이 될 것이라 했는데 그 때문에 계룡산 주변에는 사찰이 많고 민간 신앙이 유독 많이 존재한다.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는 이 중악단을 고쳐 지으면서 쓰러져 가는 조선 왕조의 운명을 신앙의 힘을 빌려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결국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사연이 전해온다.
신원사 오른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끼고 산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신원사에서 연천봉으로 오르는 초입에 세워놓은 작은 안내판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신원사 돌담길을 지나 30여분 남짓
맑게 흐르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거닐다 보면
계룡산 중턱에 위치한 백제의 왕이 머물렀다는
고왕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면 차향 가득한 녹차 한잔을 선물하겠습니다.
신선한 자연에 취해 보시고
아름다운 고왕암에 꼭 한번 다녀가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보기 드문 공손한 안내문이었다. 산행을 하다보면 ‘등산객 출입금지’라는 고약스런 표지판을 가끔 봐 왔던 터라 더욱 반가울 수밖에.
신원사 옆 연천봉 오르는 길 이정표에 붙여 놓은 친절한 안내문.
고왕암에 주석 하시는 스님은 어떤 분일까? 이런 정도의 표지판을 세워놓은 스님이라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매우 너그럽고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 스님일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왕암에 도착하면 스님은 온화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며 향기로운 녹차 한잔씩을 권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사실 어떤 사찰, 특히 규모가 작은 암자를 찾게 되면 요즘의 흉흉해진 세태를 반영하듯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푯말 외에 절에서 기르는 개가 달려 나와 사납게 짖어대며 접근을 막는 바람에 난감해 할 때가 있다.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 뒤편의 종남산(鐘南山, 610m)을 오르는데 그 산자락에 있는 작은 사찰의 개가 그렇게 짖어댔었다.
그런데 차를 권할 터이니 어서 오라 하다니 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가. 평소 수많은 등산객이 이 길을 오 갈텐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일일이 차를 권하고 있는 것일까. 너무 험한 세상이고 보니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거라는 생각, 이를테면 그 곳에서 무슨 불사를 하면서 기와나 벽돌 시주를 하라고 권할 것이다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부질없이 해보게 된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40여분을 올랐을까. 저 위로 암자 하나가 산죽 숲과 돌담에 적당히 가려진 채 고즈넉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운치 있게 놓여 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 암자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인기척이 없다. 10시 정도에 산행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빠른 시간이었는지 우리 외엔 산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암자 안에도 인적이 없었다. 스님 한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상냥하게 물어 올 것으로 생각했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가 버린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 같은 세상에… ”
“아무도 없네- ”
“방문을 두드려서 차를 한 잔 달라고 해야되지 않나?”
“조금 기다려 봐, 누가 나오는지- ”
모두들 조용히 한 마디씩 꺼냈지만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약간은 실망이었다.
고왕암(古王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이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머물렀고 태조 이성계도 잠시 여기에 머문 바 있다하여 그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암자 뒤쪽으로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에는 주황색 능소화가 기다랗게 타고 올라 만발하였고 마당 한 쪽에는 손바닥만한 넓이로 땅을 일구어 고추를 심었다. 뒤안에 있는 석간수로 목을 축이며 일부러 절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오히려 내 쪽에서 인기척을 내어 보나 다만 조용할 따름이다. 차는 그렇다 치더라도 석간수 한잔이라도 얻어 마실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물러서야 했다.
연천봉 오르는 산행 중의 모자
등은암을 지나 연천봉으로
오르막길이 계속되고 보니 영아는 힘에 겨운지 제 엄마와 함께 저만치 뒤쳐져 있다. 뒤돌아 서서 얼마동안을 기다린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힘들쟈? 좀 쉬었다 갈까?”
“…… ”
“그것 신고 괜찮냐? 다리 안 아프냐?”
“괜찮아- ”
“그래도 너 이렇게 산에 자주 다니면 다이어트도 되고 좋잖아- ”
“싫어!”
요놈 대답이 차갑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족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눈치였고 아니면 힘들긴 해도 아빠에게 부담주기 싫어 일부러 억지 대답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딸을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쉬엄쉬엄 걷는다. 비교적 가파른 길이어서 사실 그렇게 밖에 걸을 수 없는 이유도 있다. 무성한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마냥 걷기만 하고 있다. 목을 축일만한 샘터도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아 어서 정상부분이 눈앞에 나타나길 바라며 고개를 자주 치켜들어 본다.
그런데 산행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나무로 만들어 놓은 계단은 언제나 불편한 것이었다. 등산로의 토사유출을 방지하고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나 그 자체가 역시 부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걸음걸이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쯤 경사가 급한 비탈에 제법 너른 평지가 나타나고 세월의 때가 적당히 묻어있는 집 한 채가 나타난다. 등운암(騰雲庵)이다. 외관상으로는 암자로서의 기능보다는 누군가 산 속에 칩거하고 살고있는 민가 같다는 인상이 짙다. 한 해는 충분히 길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채마밭이 있고 염불이나 풍경소리 보다는 아낙네들의 이런 저런 대화가 고요를 깬다.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라는데 평소 신자들의 기도 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모양이고 특히 입시철이 되면 등운암을 비롯한 연천봉으로 가는 둥산로 인근을 기도처롤 많이 찾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적당한 장소의 바윗돌에 묻어있는 촛농의 흔적들을 보면서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을 아낙네들의 간절한 모습을 읽는다.
등운암에서 연천봉까지는 한 달음이다. 시야가 툭 트여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드디어 연천봉(連天峰) 정상, 누구보다도 딸 녀석의 표정이 밝다. 하늘과 이어졌다 하여 연천이라 했다 한다. 해발 737m 높이지만 내려다보이는 주변 일대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이고 보니 광활한 들판과 크고 작은 산들이 시원한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의 바위에 앉아 모처럼 우리 가족 4명이 모두 한 프레임에 담기는 기념사진을 찍고 따가운 태양 볕을 피해 소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생각 같아서는 내친 김에 능선을 따라 문필봉, 관음봉까지를 왕복하고 싶은데 영아와 여기까지 올라 온 것만 해도 보람이다 싶어 더 이상의 욕심은 단념하다. 그러고 보니 1시간 반 정도면 충분한 거리를 배 이상이 걸려 거의 3시간 가량을 걷고, 쉬고 해서 올라 온 셈이다.
연천봉에서의 기념촬영. 소백산 이후 근 20여 년만의 가족산행이었다.
정상에는 다른 등산로로 올라 온 댓 명의 등산객들이 자유스럽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햇볕을 피해 적당한 장소를 찾아 점심을 해결하려 하나 마땅한 곳이 없다. 정상에서 다시 10분쯤을 내려 와 그늘이 만들어진 반반한 터를 골라 자리를 깔고 옷도 신발도 벗어제치고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한쪽에 몰아 놓고는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음식으로 식사 준비를 한다. 이미 1시가 넘어섰고 보니 잔뜩 시장한데다가 아내가 이것저것 고루 고루 음식을 만들어 와 그야말로 성찬이다.
“고시레!…, 고시레!…, 고시레- ”
나는 예외없이 밥을 3차례 떠서 주위에 뿌린다.
“아빠 뭐야! 히힛- ”
영아는 나의 행동이 뚱딴지같은지 우스운 모양이었다.
“우리만 먹으면 안되지, 지신(地神)도 먹어야 되고, 개미도 먹어야 되고… 잘 먹고 가겠다고 고하고 조금씩 나눠 먹어야지- ”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가면 제수용으로 쓰이고 남은 음식을 나눠먹기 전에 언제나 고시레를 세 번 외쳤고 취재 때문에 산사람들을 따라 산에 들어갔을 때도 이들은 도시락을 먹기 전에 반드시 고시레를 외쳐대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습관으로 연결되었고 나는 혼자 산행하면서도 도시락을 깔 때면 어김없이 고시레를 먼저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사람은 혼자 잘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배운 셈이었다.
네 사람이 먹어도 모자랄 것 같던 점심은 배가 차면서 여유가 생겼고 결국은 서로가 한두 숟가락씩만 더 떠먹어서 그릇을 비우자고 할 정도가 되었다. 연달아 과일과 물로 배를 가득 채우며 포만감을 만끽한다.
“이렇게 보내니까 좋잖아 영아야, 그러니까 다음에 또 산에 가자”
“싫은데… ”
“야 임마 좋잖아! 이렇게 산꼭대기에 와서 점심 먹으니까 맛도 좋지, 공기도 좋지, 마음도 맑아지지, 그리고 너 임마 다이어트도 되잖아! 그러니까 알았지?”
“싫다니까!- ”
“무거운 것은 아빠가 다 짊어지고 너는 그냥 따라만 오면 되잖아!”
좋다고 하는 것은 이것저것 다 같다 붙이며 꼬드겨 봐도 이 놈 대답은 예외 없이 ‘싫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에라잇 이 놈아, 됐다 이 놈아, 너는 그래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거 파는데 가서 많이 먹어라 이 놈아!”
“히힛- ”
대답이 뻔할 줄 알면서도 또다시 싫다하니 그 대답이 밉지 않으면서도 나로서도 괜히 튕겨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행여 내일 아침 일어나서는 다리를 뒤뚱거리며 아빠 따라갔다가 다리에 알 박혔다고 삐쭉거릴까 봐 은근히 염려가 되기도 한다.
어떤 TV광고를 보니 ‘네 학교는 언덕 위에 있어 다리가 그렇다며?’ 하면서 여학생의 약간 미운 각선미를 언덕 위에 세워진 학교를 다닌 탓으로 돌리던데 지금까지 내가 살던 집은 언제나 산동네에 있었으니 정말 그렇다면 우리 딸도 그렇단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다보니 더 이상은 권유하지 않기로 했다.
품안에 자식이란 말의 의미를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아들과 딸이 커 갈수록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이제 이미 그럴 나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게 되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자기네 시간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최대한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 것인지. 누나를 시집보내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렇게도 과묵하시던 아버지였건만 창 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그런 것인가 보다.
하산하는 길, 고왕암에서 올라갔다 온 연천봉 정상을
뒤돌아 보는 모녀.
어떻든 오늘의 산행은 가족이라는 고리를 더욱 끈끈하고 튼튼하게 해 준 또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나 어려울 때나 가족은 서로를 위하며 같은 길을 함께 가야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우리 식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면 이번 계룡산에서 보낸 여름 가족산행은 충분한 의미가 담긴 보람 있는 산행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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