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아버지의 산 - 구봉산

소나무 01 2009. 12. 25. 23:56

 

 

애달픈 성묘길 추억

 한 살 두 살 나이가 더 들어가고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가면서 문득 문득 아버지의 행적이 그리워지곤 한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얼굴 윤곽이 어느 새 아버지를 닮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들어진다.

 어렵고 힘들게 자수성가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면서도 다섯 자식들 효를 다 받지도 못한 채 팔순을 겨우 넘겨 횡사하신 터라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지난 98년의 어머니 작고 이후 혼자되신 아버지는 전북 익산에 있는 큰형 집에 함께 사시면서 시가지 외곽에 있는 작은 야산인 배산(盃山)이란 곳에 자주 다니며 스산해진 마음을 달래곤 했다. 아파트 안에 있는 경로회관에 나가 노인회장 일을 맡아보는 것말고는 내가 오래 전에 마련해 드린 낡은 자전거를 타시고 거의 매일처럼 산을 찾으신 것이다. 차에 치어 비명에 가신 날에도 그 배산에 갔다 오시는 길이었다. 평소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던 분이 그날따라 왜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하셨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것도 당신의 운명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만년에 부쩍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부담이 될까봐 자식들에게는 대놓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스치듯 내뱉는 말씀마다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부지런히 꼴을 베어야 하고 땔감도 구해야했으며 그리고 땅을 일궈 농사도 지어야했던, 아버지에겐 힘들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의 기억들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아름답게 남아있어 아버지는 그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했을 것이다.

 

                                 50년 전의 아버지. 연유를 알 수 없으나 둘째 딸을 데리고

                          구례 화엄사 석등 앞에서 기념촬여 하시다.

 

 아버지의 고향은 지금의 대전광역시가 된다. 서대전 쪽 가수원(佳水院)이란 동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었으며 그 앞으로는 구봉산(九峯山)이라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솟아있다. 그만 그만한 봉우리가 아홉 개여서 구봉산이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 대전으로 성묘하러 떠났다. 슬하에 6남매를 두셨지만 성묘를 갈 때면 장남을 포함해서 늘 4명 안팎이었다. 산소는 어느 한 곳에 문중묘처럼 번듯하게 꾸며 놓은 것도 아니어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변두리에서 내리면 산길을 타고 다리 아프도록 걸어야 했고 , 한 곳에서 성묘가 끝나면 다시 걸어나와 택시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또다시 걷고 하는 식으로 모두 세 곳에 흩어져 있는 조상묘를 찾아 성묘해야 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초등학교 때부터의 성묘가 언제나 피곤하고 짜증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아버지도 해가 거듭될수록 나이 때문에 더욱 힘들어하셨고 그쯤부터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야만 했는데 그 때문에 어린 내가 생각한 것이 장차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돈을 모아서 가장 먼저 승용차를 구입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힘들게 걸어다니시는 아버지를 위해 그 때부터는 내 차에 편히 모시고 다니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중고차이긴 했어도 어릴 적 나의 그 소원은 지난 84년부터 그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나의 자가용 보유 이력은 이미 20년이 넘어 서는 사연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일년 전인 1997년 추석, 아버지는 성묘를 끝내고 돌아오는 내 차의 뒷좌석에서 혼잣말처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이 구봉산이다”

  그 다음 말씀은 한참동안 없었다. 갑자기 그 시절이 생각나셨던 모양이다. 해마다 다니는 성묫길이었고 지난 해 까지만 해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는데 올해 갑자기 말씀을 꺼내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모양이었다. 대전시의 남서쪽 외곽에 있는,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남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져있는 산이 바로 구봉산이다. 아버지는 지금 화두만 던져놓고 막내 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봉우리가 아홉 개여서 구봉산이라고 하나보죠?”

“세어 봐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래서 아홉 개가되거든”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 일일이 세어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더 물어 볼 말이 있었을 것인데도 나는 그저 묵묵하였고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백밀러로 힐끗 아버지의 표정을 훔치니 아버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구봉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때 저 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놀고 그러셨나요?”

“그렇지, 많이 놀았지”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평소 직업적 성향으로 보면 당시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계절 변화는 어떠했는지, 그 때 당시의 친구들과 연결되고 있는 분은 지금도 있는 것인지 등등 인터뷰 형식으로 끝도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 무관심한 태도의 나와 관계없이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이미 당시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을 터였다.

 

 서대전 톨 게이트에서 본 구봉산.

 

 성묘를 끝내고 다시 서울생활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때 그 모습이 항상 맘에 걸렸다. 그래서 아버지의 고향에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대전에서 발행되는 생활정보지의 부동산정보를 살펴보기도 하고 연휴가 되는 주말에는 서울에서 직접 내려 와 아버지가 흡족해 하실 만한 땅을 이리 저리 물색해 보기도 했으나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어서 좋은 터가 있다 해도 사실 선뜻 구입하여 집을 지을만한 여건도 못되었지만 그래도 되는 데까지 노력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맨 나중에 익산이란 곳에 정착해서 사시는 것으로 아버지의 삶은 끝이 났지만 철도공무원으로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해야했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야 싸늘한 시신이 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어린 시절의 그 구봉산이 보이는 곳이 아닌 대전 동쪽 외곽의 작은 산자락에 묻히는 것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당신께선 당신을 길러주신 양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바라셨으나 그 장소가 이미 남의 산이었고 보니 아들로서는 그 소원도 들어드릴 수가 없었다.

 

 

생강나무꽃 만발하다 

 구봉산은 어떤 산일까.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산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지난 해 이른 봄 그 산을 찾아갔다. 평소 버스 편으로 서울을 오가다 서대전 인터체인지를 지나다 보면 남쪽으로 마치 동양화에 등장하는 산세처럼 직선적이고 가파른 형태의 산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8부 능선 위쯤으로는 바위산으로 이뤄져 꽤 험준한 것 같았고 아홉 봉우리 중에서 적당한 높이의 한 봉우리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서대전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으나 어느 쪽 길로 들어서야 될지 종잡을 수가 없다. 방향을 잡아 최대한 구봉산 입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예전에는 허허벌판이었던 땅으로 기억되던 곳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여럿 들어섰고 도로도 사통팔달 새로 뚫려 길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계속 앞으로 달렸더니 결국 구봉산 입구로 가는 듯한 한적한 시골길이 나온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 나온 듯한 사람들이 가끔씩 눈에 띠는 것으로 봐서 등산로 입구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구봉산 초입에는 평소 아버지가 즐겨 가꾸시던 백일홍이

                    만발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나와 봄나물을 캐는 아낙네들의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도 눈에 들어오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자유스럽게 뛰노는 아이들이 살갑다. 아버지도 이 근처 어디에선가 저렇게 어울려 놀았을까? 생전에 그걸 물어 두질 못해 또 한번 후회가 인다. 조실부모하고 양자로 입양해야했던 아버지는 곱지 않은 양모의 눈치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낫을 들어 풀도 베고 나무도 해야했다고 짧게 소회하신 바가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에겐 어쩌면 어둡고 불우한 행적만이 남아있는 고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길은 노인복지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에서 끝나 있다. 이곳은 내가 봐왔던 다른 시설에 비해 환경이 아늑하고 주변이 잘 정리되어 있어 유달리 호감이 간다. 소규모의 주차장 옆으로는 채마밭이 있어 한겨울을 이겨낸 시금치와 봄동의 초록색깔이 돋보인다. 할머니 두 사람이 쪼그려 앉아 무슨 얘긴가를 부지런히 주고받으며 채소를 솎아내는 일을 하고 있고 할아버지 몇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전지작업을 하거나 마당 청소를 하고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저 모습이었을까? 큰형의 아파트에 들어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비록 손바닥만한 정원이었지만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를 가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러 오르는 길 그 초입에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그렇게 모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노인복지시설의 합동묘소. 이곳에서 지내다 타계한 사람들을 위해 '부활의 소망'이라는 묘비석이

세워 져 있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울컥 치솟음은 어쩔 수 없었다.

 

 복지시설 한쪽 가장자리는 구봉산 등산로로 할애되어 있다. 생각했던 대로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른 편이었으나 아파트단지가 가까워서 인지 부부나 가족단위의 등산객이 앞뒤로 자주 눈에 띤다. 

  같은 이름을 가진 전북 진안에 있는 구봉산에 비하면 대전의 구봉산은 그야말로 동네 앞산 같은 모습이다. 주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 지금은 대전시민의 휴식공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눈을 들어 정상 쪽을 보니 정상 못 미치는 곳에 기다란 철제 사다리가 거의 수직으로 놓여있다. 정상은 불과 해발 264m, 아무리 경사가 심하고 숨가쁘다 해도 30분 정도면 너끈히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등산로 주변 숲 속에는 생강나무 꽃이 곳곳에 만발해 있다. 오래 전 강원도 정선에 취재 갔을 때 정선아리랑에 등장하는 그곳 아오라지 전설을 들려주던 촌로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코밑에 갖다 대며 냄새를 한번 맡아 보라 하면서 가르쳐 주었던 나무, 그 나무가 지금 눈에 많이 보이는 생강나무다. 생강 냄새가 물씬 나던 그 때 그 나무에도 지금처럼 노란 꽃이 한창이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 중의 하나인 생강나무꽃. 줄기에서 생강냄새가 난다.

 

 생강나무는 토양이 거친 곳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있는데 이곳의 군데군데 너덜바위 틈새에서도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워 냈고 그 꽃들은 노란 눈꽃송이가 되어 가지마다 살포시 내려앉아 동화 속 같은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언뜻 보면 남녘의 산수유꽃과 매우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지만 우선 나무 껍질과 형태가 다르고 꽃송이가 약간 작으며 생강나무 꽃은 가지 표면에 바짝 붙어있어 쉽게 구별이 간다. 구봉산에는 그처럼 생강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색다른 감흥을 준다.

 

 아버지도 이런 모습을 보며 좋아했을까? 그러나 지금 자라고 있는 나무의 수령은 대개  10년, 20년 정도에 불과한 듯 보인다. 아버지의 봄 날 어린 시절엔 아마도 진달래가 전부였지 않을까 싶지만 그러나 비록 손바닥만한 집 정원이었어도 꽃 하나에도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그 옛날을 생각하면 당시 아버지의 눈에는 진달래 외의 또 다른 알 수 없는 많은 꽃들에 분명 시선이 머물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하지만 나는 한참을 올라 구봉산 정상 부근의 철제 사다리를 밟아 설 때까지 생강나무 꽃과 진달래말고는 아버지가 봤을 더 이상의 꽃을 발견하지 못했다.

 

 산은 가파름의 연속이어서 마땅히 쉴만한 곳도 마땅히 시선을 줄만한 곳도 없는 것 같다. 거의 수직의 철제 계단을 힘겹게 올라 마침내 봉우리 끝에 서다. 대전 시가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아파트로 숲을 이루었지만 저기 아버지가 살던 가수원(佳水院)이란 동네도 눈 아래 있다. 아버지는 저기 어느 한 곳에 살면서 매일 이 곳을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혹 아버지도 이 봉우리에 올랐을까? 아버지의 구봉산에 대한 생각이 그치지 않는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길은 한사람 정도만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사람과 마주치면 미리 옆으로 피해야 했다. 그러나 양옆으로는 나무들만 서있을 뿐 바로 낭떠러지가 될 정도로 비탈이 심해 위험하다. 봉우리와 또 한 봉우리와는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산아래 남쪽 저 앞으로 냇물이 소리도 없이 산밑을 휘감아 돌고 있다. 갑천(甲川) 줄기다.

아버지가 말씀하시지 않았던 산의 또 다른 모습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산은 다만 묵묵한 채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동쪽으로 보이는 저쪽 대전 용운동의 한 산자락에 아버지의 힘이 보태져 작은 선산이 마련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몇 해전 추석 성묘를 끝내고 ‘내가 죽으면 이 자리가 좋겠다’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당신께서 원하던 곳을 택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따나셨고 한 많은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이 막내아들 가슴에도 응어리 되어 저 심연에 깊숙이 묻혀 있을 뿐이다. 구봉산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봉우리의 형태 때문에 구봉산이라 이름 붙여진 산이 전국적으로 몇 군데 더 있다. 전북 진안에 있는 해발 1,002m의 구봉산 역시 봉우리가 아홉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대전의 구봉산과 이름이 같다보니 이 산을 오르면서도 아버지의 흔적을 생각하면서 올랐던 일이 있다.

 정상부인 봉우리 주위에 약간의 잔설과 얼음 길이 남아있는지 모르고 아이젠 없이 올랐다가 혼이 난 기억이 새롭다.

 초행인데다 주변에 물어 볼 사람이 없어 대충 눈치로 감을 잡으며 산행을 시작했는데 몇 개의 등산로 중 상당히 가파른 길을 택한 모양이었다. 1시간 반쯤을 숨차게 걸어 제 2봉에 올랐고 이 보다 낮은 제 1봉은 저 아래 용담호를 바라보고 비껴 서 있었다. 주변의 산들이 산맥을 이루어 연이어 남서쪽으로 달리고 있는 가운데 제 3봉을 지나고 4봉, 5봉, 6봉 …… 마지막 9봉까지의 험한 암벽 등산로를 군데군데 설치해 놓은 자일을 붙잡고 차례로 오르고 내렸다.

 모두 암봉으로 이루어진 급경사여서 자일을 붙잡은 팔에 상당한 힘을 쏟다보니 체력소모가 어느 때 보다 많았고 더구나 바람이 차가운데다 햇볕 내려앉은 곳으로는 적당히 쉴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사방이 모두 조망되어 북동쪽으로 대전의 구봉산도 틀림없이 눈앞에 들어 왔을 텐데 워낙 비슷한 산들이 많은데다 산의 규모도 작고 보니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산은 늘 그렇게 가리운 채로 존재하고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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