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에 떠다니던 산
나와 회문산(回文山)과의 인연은 이 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시작된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되살려 놓은 자신의 자전적 기록인 남부군에는 새로운 세상을 원하다가 비참하게 소멸해 버린 빨치산들의 기구하고 쓰라린 삶의 모습이 처절한 절규처럼 배어 있다. 그 소설 가운데는 회문산을 배경으로 한 전투 부분이 일정량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남부군이 출간됐던 1988년 그 무렵부터 태백산맥, 정순덕, 피아골, 빨치산의 딸, 실록 지리산, 이인모 등 한국전쟁 전후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서 어쩔 수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삶이 세세하게 묘사된 기록적 출판물에 빠져있었다. 그러면서 부질없는 그 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 속에서 고생해야 했고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희생당해야 했는가를 생각하며 답답해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특히 사람이 쉽게 접근할 없는 깊은 산 속에 짐승처럼 은거하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했던 생존 기록에 가슴아파하면서 순간 순간마다 읽던 책을 덮고 한동안 망연해 하기도 했다.
이런 책들을 읽던 당시에 나는 광주에 살고 있었다. 지금도 공수부대의 금남로 시위진압 사진 한 컷만 봐도 피가 역류하는 듯 하여 울분을 참을 수 없는 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었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런 감정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유PD가 내려 왔다. 지금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고집스럽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그가 순창 쪽에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물론 프로그램 때문이었고 순창과 경계인 임실 덕치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선생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회문산을 보았다.
“아아, 여기가 회문산이구나”
특별한 느낌과 함께 삼각형태로 보이는 그 산에 자주 눈길이 갔고 바로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도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 때 저 산 속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혼자 했었지만 왠지 마음 뿐 이었다.그런 후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회문산 초입의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 마을. 내를 끼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그 회문산을 다시 찾게된 것은 상당히 엉뚱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91년 이후 생활근거지를 서울로 옮긴 상태였고 바쁜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여름휴가를 내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남쪽으로만 방향을 잡아 아내와 함께 내려오던 길이었다. 요즘은 휴가일정을 미리 잡아놓고 일하지만 당시엔 휴가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일하다가 빈틈이 보이면 갑자기 휴가를 내어 며칠 쉬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땅한 행선지를 정해 놓은 것이 아닌 채로 일단 복잡한 서울생활로부터 무조건 탈출해 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생각이 이루어지고 정리되는 것은 내려오는 차안이었다. 평소 가보지 않았던 곳이 어디인가를 고민하다가 아직은 때묻지 않은 자연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은 순창지역을 생각해 냈고 그런 가운데 내가 책임을 맡아 제작했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름 휴가 정보로 소개했던 회문산 휴양림 통나무집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시간은 늦어 밤 8시를 넘겼지만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 성수기인 한 여름날 밤에 그것도 예약도 없이 들이 닥쳤으니 여유 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하는 일은 매사 그 모양이라고 평소 아내에게 핀잔을 듣곤 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다가 사람과 거처할 곳을 만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몸에 배어버린 나의 여행 스타일이었다.
결국은 휴양림 입구 민박집의 비좁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한 때 동족상잔의 피를 뿌려야 했던 비극적인 장소가 지금은 휴양시설로 바뀌어 있다는 것에 어떤 비애감이 없지 않았으나 나의 몸과 마음은 단지 편히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회문산 산행을 포기한 채 곧바로 빠져 나와 버렸다.
그 후 다시 몇 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고 그동안 나의 생활근거지는 가까운 전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내와 함께 이제는 마음먹고 찾아오게 된 것이다.
전주에서 국도 27번 도로를 타고 순창 쪽으로 내려가다가 중원이란 곳에서 우회전하게 되면 바로 오른쪽으로 일중리란 마을이 나타난다. 얼추 20여 가구 정도 되어 보이는 집들이 양지쪽 산비탈에 옹기종기 붙어있다. 집 구조와 색깔들이 너무 고즈넉하고 농익어서 그 모습이 마치 그림 속의 마을처럼 정겹게 보인다. 갈색 녹이 들어 난 양철지붕도 보인다. 앞에 캔버스를 세워 놓고 붓을 움직이면 절로 그림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마을이다. 매운탕이니 토종닭이니 산불조심이니 하는 너저분한 글씨도 없고, 전신주와 전선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어지럽지 않고, 이상한 형태로 제 맘대로 지어놓은 집도 없고…… 참으로 느끼는 때묻지 않은 정경은 마을 전체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 곳을 지나 역시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계곡(실은 진귀한 형태의 바위들이 강물 위에 즐비하게 깔린 섬진강 물줄기다)을 따라 가다 다시 우측으로 꺾어 들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회문산 휴양림 입구가 되는 민박촌과 그 위로 매표소가 나타난다.
“저기 민박집에서 하룻밤 잔 거 기억나?”
나의 갑작스런 질문에 길눈이 비교적 어두운 편인 아내는 무슨 엉뚱한 말이냐는 표정이다.
“여기에 처음 온 것 같지? 기억이 안 나지?”
“언제 여기 왔었어?”
“그럴 줄 알았어. 가만히 생각해 봐”
“모르겠어. 내가 언제 여길 왔었나- ”
“저기 있는 집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밥도 해먹지 않았냐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현장답사를 다니느라 내 차 트렁크엔 항상 취사도구가 실려 있었고 그 때도 집에서 쌀과 부식을 준비해온 터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아내는 그때서야 입이 벌어진다.
“5년쯤 됐지 아마? 그 때 여름에, 밤에 와서 저 위 통나무집에 갔다가 방이 없다고 해서 여기로 내려 왔었잖아”
“생각이 나-”
“아침에 눈떴을 때 밖에 비가 오는 줄 알았잖아. 계곡물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아내는 얼굴빛이 환해진 상태로 ‘그래 맞다’라고 맞장구친다.
그 때는 입구에서만 머물다 바람같이 그곳을 떠나 버렸었다.
회문산은 그 후로도 가끔씩 머릿속에서 맴돌았으나 정작 본격적인 산행 차림으로 나선 것은 전주에 내려온 지 2년째인 오늘이었다. 전라북도에서 높다고 하는 산은 거의 올라 본 후에야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서글픈 이념의 역사
아침 이른 시간 때문인지 넓은 주차장엔 덜렁 내 차 한 대 뿐이다. 휴양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차를 가지고 통나무집 앞까지 들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3월 이른봄이고 보니 이용객들도 없을 것이다.
한가해서 인지 매표소 근무자가 등산지도까지 건네 주며 매우 친절하게 대해 준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니 오른 쪽으로 군데군데 하얀 페인트 칠을 한 나무집들이 숲 속에 들어있어 여름에는 좋은 피서처가 되겠다 싶다. 내부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그냥 스쳐 지나가기로 했다. 사실 그것이 오늘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이 일대가 예전에는 빨치산 사령부의 정치훈련장인 노령학원이 있었다고 전하며 한 때 700명 정도의 병력이 이 일대에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당시 회문산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주민들의 희생을 위로하는 6.25 양민희생위령탑이 서 있다. 토벌대였건 빨치산 부대였건 간에 피아간의 전투 그 사이에서 억울하게 죽어야했던 토착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의 원혼을 달래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민들이 공비와 내통한다는 이유만으로 700여명의 양민을 무참히 학살한 희대의 거창양민학살 사건처럼 무지막지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내 세우며 어떻게든 참화를 피해야했던 그들의 고초와 희생은 필설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조금 더 올라가면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있었던 곳이 눈앞에 보이고 천연지형을 이용해 토굴 속에서 활동했던 유격사령부의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아 후세 교육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태의 남부군 ‘회문산 최후의 날’ 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회문산 안시내에서 오리 가량 구림천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왼편에서 흘러드는 계곡물을 따라 장군봉 밑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대수말이라는 조그만 산촌이 있었다. 아마 예전엔 대숲이 우거져서 대숲마을이었던 모양이다. 대수말에서 다시 장군봉 투구바위에 오르는 계곡에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수말이라는 산촌은 당시에 이미 소개되었을 것이고 보면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 재현해 놓은 유격사령부도 회문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최대한 당시의 모습대로 꾸며 놓았을 것이다.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던 곳을 재현하여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토굴 입구에 만들어 놓은 무장한 상태의 빨치산 복장 인형이 매우 조악해 보여 사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토굴 내부의 모습이 사뭇 궁금하여 안으로 들어 가 본다. 20평 남짓의 꽤 넓은 공간에 중간의 통로를 중심으로 하여 양옆으로는 기다란 활동공간이 있고 모두 산죽으로 깔아 잠자리로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중간 중간에 부상병을 치료하는 모습, 총기를 들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 등을 역시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고 맨 가장자리의 별도 공간에는 책상 앞에 앉아 통신문을 작성하는 모습 등의 활동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모습들이 마치 박제화 되어버린 것처럼 보여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감정 유발이 없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당시의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들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던 참담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다시 남부군의 ‘회문산 최후의 날’ 한 부분.
투구바위의 정경은 한 마디로 눈을 가리고 싶어질 만큼 처참한 것이었다. 사방에서 밀려 온 수백 명의 전투원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중부능선을 시퍼렇게 덮으며 밀려오는 국군부대에게 총탄과 수류탄을 퍼붓고 있었다.전투원들의 발치에는 수많은 부상자들이 피를 쏟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흥건히 고인 빗물이 피와 흙으로 되어 부상자고 전투원이고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바로 생지옥이었다. 초연과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평소의 유격사령부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위치하여 전투현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로 비켜나 있었겠지만 인근 회문산 일대 어디에선가는 언제나 총성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투구바위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현장에 서있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었지만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싸우던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투로 인해 치명상을 입게 되면 마땅히 치료할 방법도 없는데다가 그 긴박한 상황에서 부축하여 호송할 형편도 못되었을 것이다. 부상병에게 그냥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며 비트와 같은 적당히 몸을 숨길만한 곳에 옮겨 놓고 떠나야 했고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그들 서로의 심경이 과연 어떠했을까.
먹을 것이 없어 계속 굶다가 황달에 걸려야 했으며 추위 때문에 낙엽을 긁어모아 그것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해야했던 일하며 득실거리는 이 때문에 옷을 벗어 털어 내고 햇빛에 말리는 일, 연기가 나지 않게 싸리나무를 구해 죽을 끓이는 일 등등 산 속에서 겪어야 했던 그들의 삶은 인간으로서 인내와 자존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로 산 속으로 숨어 든 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새 세상을 맞은 듯 잠시 산에서 내려 왔으나 인민군 퇴각 후에는 다시 산 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다. 남쪽 체제에 저항하며 철저히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활동했으나 끝내는 북쪽의 권력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역사의 미아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 그들 빨치산에 대한 역사 평가는 아직도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리라 생각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현대사가 낳은 가장 큰 모순이자 비극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다.
토굴 내부에 재현해 놓은 부상병을 치료하는 모습등의 조형물.
어린이들 견학 장소 수준으로 꾸며진 듯한 모형의 유격사령부를 나와 망연히 앞산 줄기를 바라본다. 저 산자락과 계곡 어디에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 속절없이 쓰러져 간 빨치산들의 넋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 후 숱한 세월이 흘러갔고, 그래서 현재는 비교적 안정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인해 나는 지금 아무런 장애 없이 회문산을 오르고 있다. 그들이 드러내지 못한 결백인 듯 음지쪽으로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저 눈밭에 선홍의 핏빛이 선명히 보이는 듯 하다. 사이사이로 원한과 피를 빨아먹고 자란 나무들이 나목이 되어 표정 없이 버티고 서 있다. 금새라도 저 나무들 사이로 헤질 대로 헤진 누더기 옷을 입고서 그리고 먹었어도 무수한 날을 굶었을 것 같은 여윈 몰골을 하고 그 날의 빨치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내게 다가올 것 같다. 사방은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다.
사지(死地)와 명당의 아니러니
임도를 따라 아내와 말없이 걷다보니 평평하게 닦아놓은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이 정상인 듯 더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보이지 않으나 능선을 하나 더 넘어서야 최고봉인 회문봉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경사가 급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산행할 수 있을 정도의 알맞은 등산로로 바뀌었다. 나무들 사이로 시야가 터져 저 아래로 산과 들이 보인다. 그런데 조금 경관이 좋을 듯 싶은 곳은 예외 없이 무덤이 들어 서 있다. 그것도 한 두 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즐비하다 싶을 정도로 연달아 무덤을 써 놓았다. 이 많은 무덤들이 국군토벌대나 빨치산들의 무덤은 아닐 것이고 보면 필시 그럴만한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옛날 홍성문이라는 풍수가가 이 회문산에서 도통하여 24혈(穴)의 명당 책자를 만들었는데 회문산 정상에 24명당이 있어서 이곳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묘를 쓴 후손들은 지금 모두들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그 무거운 관을 메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 올 수 있었을까. 깊은 산에 암자를 짓기 위해 건축자재를 끙끙대며 옮겨 나르듯 겨우 겨우 옮겨왔단 말인가. 후대의 발복을 위해 그 고생을 감내했다면 참으로 대단한 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 수 없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하지만 후손들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봉분이 패이고 심하게 훼손됐거나 아니면 잡초가 무성해 형체를 분간하기 힘든 것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면 그렇지. 바로 위 부모 아닌 바에야 어느 후손이라서 조상 묘 찾겠다고 성묘를 위해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제라도 제발 화장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나도 자식에게 그렇게 유언할 것이다. 무덤이 너무 많아 신고되지 않은 무연고 묘는 정리하겠다는 산림청 명의의 경고 표지판이 그래서 유난히 돋보인다.
이 곳 회문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들의 원혼인 듯 진달래가 붉게 피어있는 등산로를 따라 대략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바로 앞으로 회문봉(837m)이 나타났다.
정상에는 무선전화 중계탑 하나와 산불감시초소가 들어 서 있고 감시용 무인 카메라가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방향을 돌려대고 있다. 더 이상은 시야를 가리는 산이 없어 조망이 뛰어나다. 강천산과 백련산이 눈앞으로 보이고 모악산 정상도 훤히 보인다. 남쪽으로 추월산, 동쪽으로 지리산 줄기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회문산을 중심으로 수많은 연봉과 골짜기들이 첩첩이 둘러 쌓여있고 옥정호에서 시작한 섬진강이 산을 휘감고 흐르고 있어 지형적으로 피난처로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회문산 일대가 비단 빨치산뿐만 아니라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활동 등의 주된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회문산 정상 기념비 옆에서.
이 곳에서 내려다보니 몇 발자국만 살짝 옮기면 산과 산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 내려서면 산은 언제나 결코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차다. 아내와 나는 말이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도 별반 말이 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비극적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오래도록 머리를 짓눌렀기 때문이었을까.
오던 길로 그대로 하산하여 맑은 물이 흐르는 조용한 계곡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들다. 그러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이 물을 마시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랬을 거야. 그리고 저기 바위 뒤에서 숨죽이고 경계 근무를 했을 테고 …… )
회문산을 빠져 나올 때는 여느 산행 끝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투쟁했고 그래서 얻어 낸 결과는 진정 무엇이었던 말인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사람들…… .
돌아가는 길, 저 앞으로 마지막 빨치산 잔당을 소탕하겠다는 국군토벌대가 중무장한 트럭을 앞세우고 지렁이 같은 길을 따라서 이쪽으로 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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