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다시 잇꽃을 심으며

소나무 01 2021. 3. 15. 16:11

 

  내 집 뜨락 회양목의 아주 작은 꽃과 홍매가 피기 시작하면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내 몸을 숨기고 있던 벌들이 어느새 나타나 이제 봄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다. 향기 그윽한 서향과 치자의 늘 푸른 잎이 동사했을 정도로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이었기에 봄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울안에서 가장 먼저 피었던 풍년화는 벌써 시들었고 복수초는 거의 꽃잎이 져버렸다. 지금은 영춘화와 수선화, 산수유 같은 봄꽃들이 차례로 개화하면서 그야말로 화란춘성(花欄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한 좋은 계절이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진달래와 목련, 개나리, 명자 꽃이 곧 만개할 것이고 히어리, 수수꽃다리, 해당화, 말발도리, 노랑꽃창포 등등이 연달아 꽃을 피우며 함께 사는 주인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세상사람 어느 누가 꽃을 싫어할까만 나의 꽃에 대한 관심은 좀 더 별난 듯해서 이런저런 화초들을 마당 곳곳에 빼곡히 심어서는 꽃마다의 형태와 색깔, 향기를 즐기는 호사를 연중 누리며 살고 있다. 그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시장에서 씨앗이나 구근, 묘목을 구입해 가꾼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지인에게서 건네받거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이로부터 전해받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얻어져 내 뜨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될까 싶어 대충 헤아려 보니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해야 할 만큼 은근히 종류가 많다.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싶기도 하지만 마당이 좁지 않아 나름 감당이 되고 그래서 화초 늘리기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화초 하나하나에 사연이 담겨져 있어 그 앞에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골담초 꽃.

조팝나무 꽃을 보면 멀리 여량역을 내려다보던 정선 땅의 산언덕이 생각나고 골담초 노란 꽃이 필 때면 부석사 조사당의 의상대사 지팡이와 얽힌 선비화(禪扉花)가 떠오르기도 한다. 또 산딸나무와 만첩빈도리에 하얀 꽃이 피면 이걸 심어 준 후배는 지금 어찌 살고 있는지 소식이 그립고 분홍의 안젤라 장미가 필 때면 똑같은 이름의 세례명을 가진 시집간 딸이 문득 보고 싶어 진다. 꽃마다에 이름 불러주다 보면 지난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꽃에 대해 얘기하고 있자하니 마치 아무런 걱정이 없거나 인성 좋은 사람, 아니면 경제적으로 풍족함을 누리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 살짝 낯이 뜨겁지만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남보다 좀 더 꽃을 가까이하며 사는 까닭을 굳이 말해보라 한다면 평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그러노라고 대답하고 싶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철도관사에 살던 어린 시절, 비록 손바닥 만 한 마당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한쪽에 꽃밭을 만들어 이런저런 화초들을 심어 가꾸며 좋아하셨다. 몇 년마다의 전근(轉勤)으로 거주지를 빈번히 옮겨 다녔음에도 아버지의 화단 가꾸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누나와 함께 봉숭아물을 들이거나 어스름 무렵에 피는 분꽃을 손톱으로 잘라 뿌우하고 나팔을 불었고 또 색색의 꽃잎으로 책갈피를 만들던 그런 단면들이 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것으로 간직될 수 있었다.

  그 후 그 아들이 장성해 한 가정을 이루게 되고, 땅 한 평 가질 수 없었던 회색도시의 셋방살이부터 아파트 생활을 전전하였지만 꽃밭에 대한 그리움은 늘 떠나지 않았다. 마당의 우리 꽃 대신 제라늄이나 부겐빌레아 같은 기르기 쉽고 오래가는 꽃들의 화분을 가까이하며 향수를 달래었다고나 할까. 그러기에 언제나 소망했던 것은 어느 한적한 곳에 나만의 터를 소유하고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 함께했던 화초들을 심고 가꾸며 소일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은퇴 후 기다렸다는 듯 서울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금의 고향 산자락에 터를 잡아 자연 속에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일홍과 맨드라미, 한련, 실유카, 칸나 등 지금도 눈에 선한 그 때 그 꽃밭의 꽃들이 한 갑자의 세월을 돌아 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지금의 내 집 정원에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얼마나 오지고 가슴 벅찬 일인지 모른다. 오늘 같이 볕 좋은 날 아버지는 따스한 봄바람 되어 이 막내의 뜨락에 피어있는 어느 꽃잎에 내려와 계실 것으로 생각하면 그 옛날의 모습들로 인해 가슴이 시리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들은 지금도 살아 보시는 것 같은 아버지에게 올해도 더 많은 꽃을 보여드리고 싶어 한다. 보름 전 쯤 황근(노랑무궁화)과 백정화 등을 구해와 언덕에 심었는데 벌써부터 어서 새잎 나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시작되고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나의 게으름으로 고사해 버린 겹삼잎 국화와 족두리꽃을 다시 심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또한 마음이 조급해진다.

 

 

잇꽃 씨앗

  내일은 잇꽃 씨앗을 들고 꽃밭이 아닌 텃밭으로 나설 참이다. 흔히 홍화(紅花)라고 칭하는 잇꽃 씨앗 두어 주먹 정도를 화단이 아닌 텃밭에 대량(?) 파종할 셈이다. 순우리말은 아니지만 잇꽃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정감이 가는 데다 꽃 자체의 소박하면서도 은근한 화려함에 끌려 해마다 꽃밭에 심어 왔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가 잇꽃의 꽃잎차를 마시면서부터 체내 혈행이 좋아진 것 같다며 살며시 부추기는듯하여 보다 많은 수량이 필요해졌다. 말린 꽃잎을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지만 직접 재배하여 꽃도 보고 건강도 좋아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그리고 잇꽃과 나와의 인연이 예전부터 좀 각별했다는 연유도 있다. 한 때 우리네 여인의 전통 화장(化粧) 방법 중의 하나였던 연지곤지의 실체와 천연염색 재료로서의 쓰임새를 알아보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해서다.

  꽃 자체의 매력도 빼 놓을 수가 없다. 개화할 때는 노란색이었다가 점차 빨간색으로 바뀌어 가는 오묘한 변화가 있고 꽃봉오리가 마치 털모자의 방울처럼 예쁘고 귀엽게 생겨 이리저리 매만지며 촉감을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지난해에 이곳 농민단체에서 얻은 목화씨를 처음 심은 바 있는데 개화 과정이 잇꽃과 닮아 처음 순백의 수수한 자태였다가 점차 분홍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도 그 옆에 심을 요량이지만 모두 잘 자라주어 여름날의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 주길 기대해 본다.

꼭 아내를 위함이 아니더라도 고운 빛깔의 꽃차를 준비해 찾는 이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니겠는가.

여름 날의 잇꽃 모습

 

  해가 길어져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져 여기저기 손대야 할 일이 많아지고 있다. 1년생의 대부분 화초들은 굳이 새로 파종하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겨울을 나고 스스로 싹을 틔워 주인의 수고를 덜어주지만 무성히 번지는 잡초 때문에 옮겨 심거나 제초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예외는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바람에 실려 와 자리를 잡은 존재들, 이를테면 봄까치꽃, 광대나물, 꽃다지, 제비꽃 같은 야생화들은 행여 밟힐까 조심하며 가능한대로 돋아 난 그 자리에서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런 수고 덕분으로 여전히 벌 나비가 날아 와 반갑고 푸르러지는 꽃나무들에 새들이 찾아와 서로 공존하며 봄날을 구가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요즘 같은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 한가한 꽃 타령이나 하면서 너무 유유자적하며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아니냐는 자성도 없지 않지만 꽃과의 자유로운 생활을 통해 조금이라도 마음 밝아지고 진솔해지며 포용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한 가치 실현 아닐까. 다만 꽃과의 일상이 내 삶에 뭔가 생산적인 것으로 기여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보는데 그동안의 나만의 소유욕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나누는 것으로 방향 전환하여 실천하면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좀 생뚱맞지만 날마다 지겹도록 대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컴퓨터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어쩜 저렇게 꽃처럼 예쁘고 화려하게 생겼을까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기적이랄 수 있는 어떤 놀랍도록 경이로운 일로 인해 그 바이러스가 악에서의 방향을 바꿔 전이가 멈춰진다면 정말 갖고 싶도록 아름다운 꽃으로 재탄생할진데 이것이 지금 꽃피는 봄날에 생각하는 나만의 망상 같은 것이 아니기를 바랄 따름이다.

 

 

                                                                                           - 2021. 3.1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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