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밤바다”나 “안동역에서”처럼 대중가요에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붙여 히트한 노래들이 적지 않은데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익산”이 들어 간 노래가 아직 없다. 익산이라는 이름의 사회문화적인 이미지가 요즘 가요의 정서와 잘 맞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좀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익산의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 그것도 국민가요라고 지칭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노래가 두 곡 있다. 나훈아의 “고향역”과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가 바로 그것.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으로 시작하는 “고향역”은 만들어진지 거의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방송매체에서 흘러나와 고향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작곡가 임종수씨가 이곳 익산 삼기면 형님 집에서 이십 리 산길을 걸어 황등역이란 곳에서 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 거리인 익산역까지 통학하던 시절, 시골 찻길 옆 코스모스를 보며 흰머리 가득한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 때의 기억을 가사에 담아 곡을 만든 것이다. 1972년에 발표되었으니 당시 산업화 시대 초기에 돈벌이와 출세를 위해 도시와 도시로 떠난 수많은 출향민들의 허허로운 가슴에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심사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임종수씨가 여러 기회를 통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을 얘기한 바 있지만 가난하고 힘들었던 학창시절의 기억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이런 명곡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익산 땅은 실질적으로 쌀과 고구마 같은 농산물과 황등석(黃登石)이라는 화강암으로 이름이 나 있는 편이었지만 무형의 자산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 고향역 노래 하나가 훨씬 더 소중한 특산품(?) 아니겠는가.
지금의 황등역. 한 때 통학생으로 붐볐던 플래트홈은 이제 사라지고 대신 여러 개의 선로가 깔린 화물수송역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익산 땅에 살았던 인물의 시공을 뛰어넘는 이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가사에 담고 있는데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의 첫 구절부터가 그리움의 애틋함으로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런데 이 가사 속 배경의 연인은 유별나게도 오백년 이전의 조선시대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황진이와 소세양 두 사람 간의 사랑이야기를 말함인데 명기 황진이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소세양이란 인물은 약간의 서술이 있어야할 듯싶다. 그는 이곳 익산 출신으로 조선 중종 때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찬성 등의 벼슬을 지낸 문신인데 그야말로 당시 최고의 지성과 권세를 갖춘 엘리트 관료였던 셈이다.
소세양은 절세가인이라는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그녀와 딱 한 달 동안만 함께 살아보기로 한다. 자신의 절제력을 믿었는지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라고 친구들에게 약속했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고 하니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한 달이 하루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소세양은 결국 ‘사람임을 포기’하고 약속한 한 달에서 며칠을 더 머물고는 임지인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때 황진이는 헤어짐의 애타는 심정을 야사하(夜思何)라는 시 한 수에 담아 그에게 보낸다. 몇 구절만 가려 소개하면,(상단은 직역, 하단은 의역된 가사)
- 簫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 寢宵轉轉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 못이뤄 뒤척이며 꿈인 듯 생시인 듯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같이 지저귀어도 여전히 정겹게 들리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밤마다 님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여인의 독백 같은 사연이 가슴 시리다.
1986년에 발표된 “알고 싶어요”의 가사는 양인자씨가 썼다. 소설가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사를 만들어 내 작사가로 더 유명해진 그녀는 이 노래를 작곡했던 남편 김희갑씨가 건네 준 쪽지 내용을 노랫말로 잘 다듬었고 여기에 이선희의 가창력이 더해져 많은 연인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이 노래에 관심 있는 내 주변사람들은 대개 여기까지를 노래 탄생의 배경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여기 익산 땅에 살고 있음을 은근히 뿌듯해 한다.
그러나 사실은 소설가 이재운씨가 1996년 한 일간지에 역사소설을 연재하며 두 사람간의 사랑이야기 전개를 고심하던 중 가사의 절절함에 주목하고는 평소 가까웠던 양인자씨의 동의를 받아 이 노랫말을 위와 같이 15세기 버전의 칠언율시 한시(漢詩)로 변환시킨 것이다. 결국 양인자씨의 가사가 황진이의 시로 뒤바뀌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그러나 실제 황진이의 시는 조선 후기 동국시화휘성(東國詩畵彙成)등 몇 군데에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바 몇 구절을 보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는 구나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와 소세양 두 사람 간의 특별한 사랑과 이별이 사실로 존재하며 서로 아름다운 사랑야기로 관통하고 있는 만큼 오늘날 많은 이가 좋아하고 있는 현실에 굳이 어떤 게 원작이냐며 가사의 진위를 따짐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소세양은 후에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모든 관직을 물리치고 귀향하여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우연히도 내가 귀향하여 터를 잡아 살고 있는 곳 바로 옆 용화산 자락에 소세양 묘소가 있어 얘기가 좀 더 길어졌다. 그의 삶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에는 두 사람간의 러브스토리가 빠져 있지만 이 곳을 찾을 때마다 나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당시를 복원해 보곤 한다. 인간사 꿈결이듯 만년의 그에게도 황진이와의 사랑이 그저 한 순간의 인연에 불과한 것 아니었을 런지.
용화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오른 쪽의 야트막한 야산에 소세양의 묘소가 있다. 세상을 떠난 자는 말이 없고 후세 사람들만 이런 저런 후일담을 만들어 낼 뿐. 멀리 보이는 산이 용화산이다.
K-POP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마당에 무슨 한 물 간 유행가 타령인가 싶지만 나에게는 위 두 대중가요가 노래 그 자체로만 머물러 있음이 유감이다. 요즘 대박이 났다고 자랑하는 한 프로그램을 보며 다시 부는 트로트 열풍에 편승해 익산을 주제로 한 트로트 가요를 만들거나 가요제를 치러보자는 심사가 아니다. 노래비 같은 조형물 하나 덜렁 세워놓고 인증 샷 찍게 하거나 그 옆으로 무슨 소망의 쪽지를 적거나 자물쇠를 채워 걸어두도록 하는 유인책 형태도 진부하다. 지역콘텐츠를 활용하여 관광시설 만든답시고 국민 세금만 축낸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스토리텔링화를 거듭하여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그것도 한 동안 반짝하다가 기억에서 사라질 게 뻔하다. 유행가이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이 노래 속의 그리움과 사랑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촉촉이 적시고 행복한 도시로 변모시켜줄 수 있는 그런 묘수가 없을까? 그렇다면 백제유적을 간직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라는 이미지도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나의 불만족스러움에 대한 탈출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지혜와 계획이 필요하다는 이 좋은 말을 곱씹어 보면서도 나는 지금도 한마디로 멍 때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저 이 봄날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헛된 망상이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