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고마운 선물

소나무 01 2023. 5. 9. 10:09

휴대전화에 문자가 찍혔다. 택배가 도착할 것이란다. 주문한 게 없는데 잘못 수신된 게 아닌가 하고 내용을 보니 MP DOLCER3라는 물품이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USB 같은 것인가? 품목이 뭔지 알 수 없어 아들 녀석이 보낸 것인가 싶었다. 말 수 없는 녀석이 느닷없이 예초기 같은 장비를 사서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전화해서 "네가 보냈니?" 하니 아니란다.

 

이런 제법 부피가 있는 물품을 받았다. 겉 포장지를 보니 오디오 제품이다.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내 집 식구 말고는 없는데... 딸 녀석이 보냈다면 사전 연락이 있었을 테고. 이전 직장 퇴직자 명부에 주소가 있으니 절친했던 누군가가 보냈을까? 발송 회사에 전화해 보니 휴일이라서 생각대로 불통이다. 수신인이 내가 확실하여 상자를 뜯어 안내서를 보니 경기 고양에 있는 회사다. 검색하니 대표자 이름이 김 OO. 내 일을 열심히 도와주던 동료다. 퇴직 후 회사를 차렸을까? 그래도 그렇지 시제품이라 한들 이렇게 불쑥 보내주진 않았을 것 같고.

 

 

살펴보니 FM겸용 LP 플레이어다. 오, 반갑고 반가운 제품.

발송자는 월요일에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기쁜 마음에 작동법을 일별하고 다락에 처박혀 있던 퀘퀘묵은 LP판을 꺼내 오다. 젊은 시절엔 LP를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제품이 있었으나 CD로 물갈이된 이후로는 이미 처분된 지 오래였고 사용처를 잃은 LP 디스크 역시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려두다시피 했다.  그저 차마 버리지 못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념이 될만한 것으로만 골라 십 수장만 보관해 오고 있던 터였다. 

 

 

 

 

가장 먼저 뽑아 든 것은 연주음악 Bilitis. 과거 내가 만들었던 가장 애정이 가는 프로그램의 시그널로 썼던 음악이다. 1980년, 밤 10시 10분이면 이 시그널과 함께 "음악의 여로"라는 프로그램의 잔잔한 수필과 음악이 전파를 타면서 나름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던 음악.

역시 음악은 추억을 불러온다. 40년 이 넘은 긴 세월 저 편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당시의 온갖 상념으로 가슴이 먹먹하고 저며오고... 

 

 

 

 

작은 형이 과거 월남전에 참여하면서 귀국 시에 사 왔던 도넛판. 사이즈가 작은 투명의 빨간색 디스크가 앙증맞았지만 표지의 아오자이와 농라 차림의 아가씨가 부르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아서 그냥 듣고 또 들었던 기억. 벌써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작은 형은 이미 고인이 된지라 더욱 가슴이 저미고 아프다. 디스크의 재킷 가장자리가 부스러진다. 반세기가 지난 세월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다만 슬프게 들려올 뿐.

 

 

 

은퇴하면 진공관 오디오 제품이라도 사서 LP를 들어야지 했건만 늘 머릿속에만 맴돌았을 뿐 주로 TV와 카 오디오에 만족하며 지냈다. 그런 나의 무관심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불쑥  이런 플레이어를 선물한 사람은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한편으로 나는 한 번이라도 다른 이를 위한 그런 고마운 선물을 한 일이 있었는가라는 자성과 함께. 

5월 8일 월요일 아침. 9시가 되면 곧바로 발송회사에 전화해 봐야지 했는데 8시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딸이 출근길 지하철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아빠 아침 먹었어?" 묻는다. 어버이날이라 전화가 오려니 했기에 손주 안부를 시작으로  대화하는 중 혹시나 하면서 그냥 물었다.

"혹 네가 오디오 보냈니?"

"아빠 그게 벌써 도착했어?"

오잉?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는 반문이다. 

"아니 그거 네가 보냈니?"

"응"

"어찌 그런 걸 보냈니?"

"응, 아빠한테 LP판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LP판이 있는데 방치하고 있는 게 평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야, 그런 포터블 같은 제품도 있었니? 나는 전혀 몰랐다. 이제 값비싼 진공관 오디오 사기도 그렇고. 근데 요즘에도 그런 게 있었구나. 정말로 좋은 선물이다 야. 아주 아주 맘에 딱 든다 야. ㅎㅎ"

정말 기분 좋은 하루 출발이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엔 후배 둘이가 과일을 사들고 찾아왔고, 오후엔 얼마 후 섬구경 갈 목포행 KTX 예매를 끝냈다는 친구의 카톡을 받다. 좋고 좋고!

현진건이 아니라 나 OOO의 "운수 좋은 날"이다. 매일 오늘만 같아라 라는 좀 비굴하게 여겨지는 뻔뻔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으니 나는 역시 천상 속인.

 

                                                                                      - 2023. 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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