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안에 사계절 두루 꽃을 바라볼 수 있는 화초들을 심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아무래도 흐름이 멈춰진다. 그럴까 봐 꽃을 대신하여 빨간 열매를 꽃처럼 볼 수 있는 몇 종류의 나무들을 심어 가꿨다. 하지만 대부분은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기도 전에 새들의 먹잇감이 되어 거의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실망스럽다. 대신하여 실내에 들여놓은 화분 대 여섯 개에서 꽃을 대할 수 있음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부겐빌레아, 그다음이 이 란타나(Lantana)다. 볼 때마다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 주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의 난(蘭)처럼 나도 실내에서 화초 기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 "추억"이라는 것 때문에 몇 개 정도는 예외로 하고 있다.
왕성했던(?) 현역 시절 국제회의 출장으로 멀리 튀르키예의 안탈리아에 간 일이 있다. 안탈리아는 지중해에 면한 유명한 휴양도시. 그곳 시가지에서 좀 벗어 난 해변 '르네상스 리조트'라는 휴양시설에 도착했을 때 제일 크게 눈에 들어 온 것은 건물과 해변보다는 화단에 피어있는 낮은 키의 꽃들이었다. 온통 빨간색의 특이한 칼라에(자세히 보니 노란 색깔도 섞여 있었다)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으나 독특한 향이 짙게 풍겨 참 매혹적인 모습의 꽃. 군집으로 심고 가꿔놓은 이 꽃들의 잔치.
꽃은 처음 콩알보다 적은 꽃망울을 가졌다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살구알만큼 커진다. 색도 처음에 노란색이었다가 주황으로, 그 다음엔 빨간색으로 변한다. 어느 정도 신비로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돌아와서도 그곳 사람들이나 맑고 푸른 몽돌해변, 페르가몬 유적 같은 그런 것 보다 훨씬 기억에 남았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었는데 그 후 수년이 지나고 서울의 화분 가게에서 다시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계량화되어 시장에 나온 것이다.
최종적으로 빨간 색으로 변하는 란타난 꽃. 그 후 사나흘이면 꽃 속의 꽃인 작은 꽃잎들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면서 자취를 감춘다.
요즘은 흔해 진 편이다. 꽃 색깔도 노랑, 분홍, 흰색 등 여러 가지다. 하지만 나에겐 이 빨간색의 란타나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역시 추억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구입해 길러 봤으나 빨간색이 아니고는 아무래도 정이 덜 갔다. 그러다가 정성부족으로 집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 녀석은 지난 해 봄 삼례 장날 길가에서 3천 원에 구입한 것인데 1년 만에 훌쩍 자라 늦가을 실내로 들여오면서 가지를 절반이상 쳐냈다. 따듯한 곳이라면 연중 쉼 없이 꽃을 볼 수 있으나 거의 매일 물을 줘야 할 만큼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고 그 때문인지 가지가 쭉쭉 뻗으면서 쉽게 자란다. 관리가 소홀하면 전체적인 모양이 볼품없어져 버리기도 하는데 원산지 쪽에서는 나무라기보다는 야생초 같은 개념으로 인식한다니 이해가 간다.
거실 양지쪽에 내 놓은 화분들. 좌로부터 제라늄, 크로산드라, 그리고 맨 오른쪽이 란타나.
다시 해가 바뀌고 1월,
밖에 나가면 매화, 산수유, 풍년초 등에서 새봄에 피어 날 꽃망울을 본다. 이 란타나 화분을 밖에 내놓을 때면 많은 종류의 꽃들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피어 날 꽃들과 나와 얽힌 사연들이 많지 않거나 깊지가 않을 테지만 그러나 그 앞에서 한참 머무르며 분명히 존재했을 아련한 추억들을 소환해 내며 의미 있는 시간 가져보고 싶다.
그러다 보니 란타나 앞에서의 대춘부(待春賦)가 되어 버렸다.
안탈리아 지중해변의 휴양지 르네상스 리조트 건물을 배경으로.
이젠 그야말로 '추억의 저편'이 되었다.
- 2023. 1. 5(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