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七甲山)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주병선의 노래 때문이었다. 내 차 안에는 그의 노래 카세트테이프가 있었고 운전할 때마다 수시로 들었다. 노랫말과 멜로디 그리고 창법이 그저 고생만 하며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의 한과 애환을 담은 것 같아 애착이 갔고 가수 주병선의 고향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여수라는 것에서 더욱 그랬다. 아주 오래전 칠갑산을 스쳐지나 간 일이 있었지만 그 후 참 많은 시간이 흘러갔어도 더 이상의 인연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난 팔공산 산행 이후 다음 산행지를 물색하다가 다시 떠오른 칠갑산. 그동안은 주로 전라북도 안에 존재하는 산들이었기에 이젠 권 외의 산들을 찾아보기로.
집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 미리 살펴보니 산 정상까지의 산행 코스가 9개나 있어서 적당한 출발 장소를 정해야 했다. 망설이지 않고 선택한 곳은 장곡사(長谷寺). 장곡사는 예전에 한 번 답사를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는 나에겐 숨겨진 절이었다. 특이하게도 대웅전이 두 개 있었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들이 많은 편이었다.
일주문에서 본찰이 보이는 곳까지 10여 분 넘게 걸었다. 제법 큰 규모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왔는데 차들이 쌩쌩 지나는 것으로 봐서 본찰 입구에도 주차시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랬다. 어차피 오래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으니 아쉬워하지 않기로.
이미지가 좋은 사찰이었다. 서기 850년 신란 문성완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록이 시작되는 햇살 좋은 날씨 때문에라도 참 정겹고 아늑한 그리고 고즈넉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평지 위 산자락에 자리 잡은 상(上) 대웅전은 더욱 차분함을 안겨주는 것 같았고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하(下) 대웅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의 풍광 역시 안온한 정서를 가져다주었다. 고려시대 지어진 대웅전은 그 자체가 보물이고 법당 안에 있는 신라 때의 비로자나불상(보물)과 오른쪽 옆으로의 신라말이나 고려 초의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국보). 그러나 약사여래 대좌는 제단에 가려 법당 안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육안으로 살펴볼 수 없는 아쉬움을 준다.
법당 안 촬영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있어 그냥 멀리서 도둑 촬영하듯 하다. 대웅전 바닥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 전돌을 깔아 독특한 데 거의 모두 보행에 편리한 깔판으로 덧 씌워져 있어 역시 아쉽다.
아무렴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녹유전(綠釉塼) 바닥에 비할까만 모두 사라지고 없어 안타까운 마음뿐. 그곳 수미단 아래에서 어렵게 어렵게 초록색 광택의 녹유전 몇 개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한참 사념에 빠지다.
칠갑산을 오르는 길은 많이 다듬어져 있었다. 장곡사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3Km, 곳곳에 철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산허리와 능선을 타야 했지만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비교적 넓게 닦여 있었고 그리고 대체로 경사가 완만해서 힘들지 않게 산행할 수 있었다. 내 집 인근에서는 진즉 개화하고 져버렸지만 이곳 300m 급 이상의 지대에서는 진달래와 산벚꽃이 한창이었다. 어느 한 장소에서 같은 꽃의 개화 장면을 릴레이로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욕심.
골짜기가 깊어 장곡사라는 이름을 붙였을 텐데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이런 꽃들이나마 그 아쉬움을 상쇄시켜 주고 있는 듯.
오늘은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 했는데 바람이 좀 거칠다. 생각해 보니 봄철에는 언제나 바람이 많이 불었다. 소나무가 많지 않고 대부분 참나무들이 급한 경사면을 채우고 있었는데 아직은 새잎이 나오지 않아 바람이 그대로 몸뚱이를 때렸다.
더구나 계속되는 능선 길이어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눈에 볼 수 없는 그 강한 바람의 모습을 정상 부근에서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있었다. 바로 참나무 밑동. 사람으로 치면 부기가 심해 퉁퉁 부은 것처럼 밑동이 비정상적이다. 나무에 대한 식견이 없지만 병이 든 게 아니고 틀림없이 바람으로부터 몸을 지탱하기 위한 자구 노력의 일면으로 보였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여기 나무에서도 본다,
산행하는 동안 사이 참 단조로운 풍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없었는데 주차장에서 1시간 30여 분 만에 도착한 정상도 마찬가지로 좀 휑하다는 느낌이었다. 헬기장으로도 쓰이는 평지 한쪽에서는 등산객 몇 명이 점심을 하고 있다. 단지 자유롭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혼자만의 산행을 고집하는 스타일,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고 보니 주말과 휴일은 번잡할 것 같아 평일 산행을 선택한 탓에 올라오는 동안 두 사람을 만났을 뿐이었다.
56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도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만 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수많은 산줄기를 이루며 칠갑산을 감싸고 있는 느낌. 어느 한 방향에서도 아파트 같은 인공구조물이 보이지 않아 안온하고 평화롭다.
정상에 올라 숨을 좀 고르려고 하는 사이, 어느 노 부부가 바로 앞자리에서 일어나 하산 준비를 한다. 인증숏은 남겨야겠기에 저쪽 멀리에 떨어져 있는 표지석을 배경으로 서둘러 셧터를 부탁하다. 어르신은(나보다 대충 10살 안팎으로 나이 들어 보였다) 정상 기념사진인데 표지석 바로 옆에서 찍어야 되는 것 아니냐며 이동을 권한다.
"아니 죄송해서요. 그냥 여기서..."
그래도 어르신은 한 걸음으로 표지석 앞으로 다가서며 잘된 것 골라 사용하라고 셧터를 여러 차례 누르는 친절까지. 참 고마운 분. 그 연세에 아내와 함께 산행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부디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사족
노래로 유명세를 탄 산이고 보니 장곡사 주차장에, 그리고 귀가 길에 잠시 들른 반대 쪽의 천장호 출렁다리 입구에 "콩밭 메는 아낙네 상"이 세워져 있었다. 서로 다르지만 같은 분위기. 하지만 비록 상징적이라 할지라도 이게 맞나? 하는 약간의 거부감. 중년 정도의 얼굴 모습에 힘든 노동에서 오는 삶의 절박함 같은 것이 전해져 오지 않는다. 가사대로라면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포기마다 눈물 심어야 했던 그 아낙네여야 하고 그런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가야 했던 딸 이 두 모녀의 한과 애환이 서려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이 노래에 심취했을 테니.
출렁다리를 걸으면서도 왜 이런 곳에 다리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다시 한번의 거부감. 이런 다리가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세워져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는다던데...
- 사람들은 볼거리를 찾아 즐겨 여행 다니는데, 그 볼거리 즐길거리 만들어 준 것인데, 나도 그곳 찾은 한 사람인데...
내가 너무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본 건 아닌가?
오래전 청산도 산 등성이의 척박한 콩밭, 한 여름 뙤약볕이 내리 쬐이는데도 쪼그린 채로 호미질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그러는지 모르겠다.
- 2023. 4.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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