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칠갑산에 이어 다시 충청권 산에 오르기로 하다. 일단은 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차로 대략 1시간 반 정도의 거리. 보령 시내를 빠져나가 청라면 쪽으로 향하니 멀리 산봉우리가 보인다. 그런데 저 산이 맞는가 싶다. 서해 연안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791m 정도의 산이라면 산세가 제법 깊을 만 한데 내 눈에 야트막하고 밋밋해 보여서.
마치 동네 뒷산처럼 보이는 이 산이 791m 의 오서산. 산행은 이 산 동쪽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주말과 휴일 그리고 어제 근로자의 날을 포함해 휴일이 겹쳤고 보니 찾는 이가 많을 것 같아 다음 날인 평일을 택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가 글 속에서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라는 표현을 했던데 내가 그렇다. 그런 내가 그동안 어떻게 조직생활을 했었는지.
산행 최단코스를 택하기로 하고 사전 검색을 마친 후 오서산 자영휴양림에 도착한다. 입장료 1천원에 주차비 3천 원. 산 아래에 자리 잡은 휴양시설을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고 단지 산행만을 하려는 사람에겐 부담이다. 차 출입 차단 시설에서 한참만에 얼굴을 내민 관리자는 우선 경로인가 부터 묻는다. 그렇다 하니 입장료는 면제해 준단다. 매주 화요일은 쉬는 날이니 다음에 올 때 참고하란다. 속으로 다음에 올 일 없다고. 서로가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등산 초입, 의외로 바위와 나무들이 많아 제법 깊은 산이구나 싶었는데 계곡엔 물이 없다. 10여 분 오르니 그나마 계곡이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오서산 월정사라는 어수룩하지만 친근한 글씨체. 문득 오대산 월정사를 연상했지만 이곳은 그냥 작은 암자라고 표현함이 맞을 듯. 사진 촬영을 하진 않았지만 온갖 메뉴와 값을 써 붙인 현수막이 걸려있는 음식점이 암자와 같이 붙어있어 그냥 지나치다. 주변으로는 꽃들을 그런대로 잘 가꿔놓았건만 사(寺)라 이름한 게 아무래도 민망스럽다.
8부 능선 쯤 올라섰을 무렵에야 멀리 시야를 허락한다.
5월 초,아직 신록이라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산길은 나무와 푸르른 잎들에 가려 멀리 조망되지 않는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지만 가파르진 않다. 오면서 차창 밖으로 봤던 산의 겉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에서 산의 깊은 존재감을 생각해 본다. 내 걸음은 느리지만 걷는 페이스가 예전과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안도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오르고 또 오른다. 얼마 전에도 지인 한 사람이 왜 산에 혼자 가느냐고 묻더니 답도 예전과 다르지 않다. 자유. 이를테면 한두 시간의 산행 거리에서는 어디에서 쉬고 어디에서 뭘 먹을까라는 생각이 없다. 그저 묵묵히 걷는다. 독특한 꽃과 나무를 보면 한참을 들여다 보고, 힘들면 앉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잠시 호흡을 조절할 따름이다.
정상에 거의 이르렀을 때 멀리 통신시설이 보인다.
정상부에 이르렀을 무렵 철계단 하나가 나타난다. 1시간 10여 분을 걸어 오르는 동안 이런 인위적인 시설이 한 군데도 없어 좋았는데 여긴 산행인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타나는 또 하나의 인위적 통신 시설. 근방에서 제일 높은 산이고 보니 역시 그러려니 한다.
거의 같은 표고지만 오서산 표지석이 있는 정성부와는 산행동안 처음으로 만나는 평평한 능선 길이다. 가을이면 억새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준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정상에서 만난 딱한 사람, 오산에서 왔다는 젊은이에게 기념 촬영을 부탁하다. 역시 사진 인심이 풍부하다. 연거푸 3번에 걸쳐 셧터를 눌러 준다. 자신은 건너편 쪽에서 2시간 여 걸어 올라왔는데 철계단이 너무 많아 다른 이에게 산행코스로 권하고 싶지 않단다.
그만그만한 높이의 산 능선들이 연이어지고 있다. 멀리 중간 정도 위치의 높은 산이 성주산.
저 멀리로 흐릿하게 서해가 보인다. 날이 좋으면 외연열도 등이 시야에 잡힐텐데 아쉽다.
산 정상에서 만난 애기붓꽃. 서 너 군데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산행의 결정적 묘미를 맛보는 시간,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늘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 했는데 가시거리가 그런대로 긴 편이다. 저 멀리로 성주산이 보인다. 성주산은 20여 년 전에 아들과 함께 올랐던 곳이라 새삼스럽다.
그리고 바다가 보인다. 산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은 덤으로 얻는 기쁨.
'그래 바다까지 가 보려고 집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었으니 서둘러 하산해야지'
'그런데 왜 까마귀는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거지? 여기가 오서산(烏棲山), 까마귀가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라 했거늘'
산을 내려오는 동안 유감스럽게도 까마귀 뿐 만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오늘 어디에선가 생존권 보장을 위한 대규모 집회라도 있는 건가?
혼자 히히덕 거린건지 씁쓸해한 건지 암튼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시동걸어 숲 속의 주차장을 마악 빠져 나오려는 순간 차창 밖으로 까마귀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오, 역시 오서산이네!'
고개를 내밀어 까마귀를 찾았지만 나무 숲에 가려 볼 수가 없다.
이 녀석이 나를 가르치는 걸까? '네 마음 안에 있으면 됐지 구태여 찾아보려 하지 말라'는.
그래, 성철 스님도 마음 안으로 들여다 보라 하셨지.
- 2023. 5. 2(화)
* 귀로에 대천항에서의 해저터널을 지나 안면도로 진입, 꽃지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오다. 편리해진 교통망과 풍부해진 여가생활 때문이지 안면도는 온통 관광지로 바뀌었다는 느낌. 여름이면 더욱 북적거릴 것 같고. 다음 산행지는 좀 더 한적한 곳이어야겠다는 나만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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