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팔공산에 오르다

소나무 01 2023. 3. 26. 22:58

지리산, 덕유산, 대둔산 등등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높은 산봉우리들을 거의 올라본 바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오르지 못한 채 내 마음에 남아있던 산이 팔공산이었다. 한 때 산행을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아쉬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벚꽃이 피고 나무들마다에 새 이파리가 피어나는 신록의 계절쯤으로 그 시기를 생각하다가는  오르고 싶을 때 가겠노라고 불쑥 집을 나서다. 간밤의 잠자리에서 내일 미세먼지가 '나쁨'이면 다시 생각할 참이었는데 '보통'이란다. 보통 수준이라 해도 산에 오르게 되면 주위 조망이 어려워 손해 본 느낌일텐데 어쩌나 싶으면서도 이왕 나서기로 했으니 산행 그 자체로 만족하기로. 

진안 IC를 빠져나와 백운면 소재지를 벗어나자 저 멀리 팔공산(八公山)이 보인다. 뿌옇게 보이는 것이 역시 미세먼지 영향이다.

 

 

팔공산은 해발 1,151m로 비교적 높은 산. 그래서 좀 쉬운 산행 코스를 택하기로. 초입인 진안군 자체가 고원지대에 속해 이미 해발 400m 정도는 올라 와 있는 셈일 텐데  여기 진안 쪽에서 주차장이 있는 서구이재의 등산로 입구까지 자동차로 가게 되면 이미 800m 이상을 오르게 된다. 그러하니 능선을 타고 300여 m 높이만 걸어 오르면 된다는 얘기. 등산 맞나?

입구 표지판을 보니 정상까지는 2,5Km 정도다. 등산로 자체의 폭이 넓은 데다가 경사 또한 완만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산행할 수 있겠다. 등산로 양쪽으로는 온통 산죽 밭. 이런 산죽 밭만 보면 빨치산들이 숨어들었다는 비극적 모습들이 그려져 좀 슬프다.

 

 

진달래, 생강나무꽃이 드물게 보인다. 등산로 밑으로는 대부분 급경사여서 수종들이 단조로운 듯. 그런데 일부 구간에 반가운 나무 문양이 보인다. 군락이라기보다는 가끔씩 두세 그루 정도가 눈에 띄는데 물푸레나무다. 줄기에 마치 흰 페인트를 칠해 퍼포먼스를 벌이는 듯 해서 그 예술적인 형태 때문에 좋아한다.

 

 

암벽 위에 부엽토가 퇴적한 상태여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쿠션을 느끼는 경쾌함이 있지만 간혹 밧줄과 철계단이 있는 급경사가 있어 경각심을 늦추지 말라는 사인을 보낸다. 간혹이다.

 

 

철탑이 보이는 정상이 눈앞에 보이면서 너른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사방이 막힘없이 조망된다. 멀리 장수읍 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더 멀리 덕유산 산줄기는 미세먼지(황사) 때문에 보이질 않아 아쉽다. 산행에서의 성취감이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철탑. 한 때는 방송사의 TV중계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경찰청 통신시설로 바뀌었다. 이런 TV중계 시설은 과거 내 생활과의 관계가 있어 그 앞에 서서 한참을 지켜보며 과거로 회귀하다. TVR(Television repeater)로 불리는 대소규모의 이런  중계시설이 주로 산간지역 높은 산 정상이면 전국 어느 곳에나 설치되어 있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위 오지라 불리게 되는 지역은  이런 시설 없이  TV시청이 불가능했다. 직진성을 가진 전파는 산을 넘을 수가 없었기에.  요즘에야 인공위성과 유선케이블이 있으니 격세지감.

어느 날 이런 곳을 순회 정비하는 직원을 격려한답시고 따라나섰다가 말을 건넸다. 

"이렇게 산으로 나서면 운동도 되고, 힐링도 되고 참 좋겠네 - "

"아이코, 직업으로 다녀 보세요. 이게 보통 고역스런 게 아닙니다. 중노동이에요"

뜨끔했다. 나야 생색내기로 어쩌다 한 번이지 않나. 나는 이후부터 상대방 일에 내 잣대로만 들이대는 오만(?)함을 범하지 않겠노라며 대오각성했다. 

 

 

정상에서의 시원함과 후련함. 청명한 날이었으면 저 멀리 지리산 능선이 보이고 무등산도 보일 법한데 덕태산, 내동산, 성수산... 가까운 쪽의 산들만 보인다. 그래도 인증숏을 남겨야지. 그런데 이 정상표지석의 글씨가 보이는 쪽을 하필 철탑 앞쪽으로 설치했을까. 방향을 살짝 틀면 시원한 산줄기들이 배경으로 잡힐 텐데. 인증숏을 찍는 사람 모두 그런 생각 아닐까? 철탑이 국가기간시설로 호칭될 만큼 중요하다 할지라도 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아닌가. 일단 산을 타면 정상을 오르고 싶고, 정상에 오르면 사진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할 텐데 그 흔적의 배경이 철탑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탑과의 인연을 내세운 내 경우는 좀 다르다 치드라도. 

어떻든 오늘 산행을 계기로 과거 20여 년 전처럼 앞으로 계획적으로 나서겠다는 다짐. 몸은 그 후 20년 노후화(?)되어 저런 철탑처럼 용도변경 아님 용도폐기 신세가 아닐까 싶으면서도 다시금 한 번  열정을 지펴 보기로. 

 

                                                                                                                              - 2023. 3.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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