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오서산 이후 어느새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났다. 산에 가야지, 산에 가야지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영농준비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편.
연일 계속되는 더위로 텃밭 일이 쉽지 않다. 그래, 이럴 때 산에 가야지 하면서 운암산으로 결정.
애초 충청권을 물색하며 생각해 보니 이제 내 맘에 남아있는 곳은 보문산과 식장산 두 곳이었다. 그런데 대전이라는 대도시와 근접해 있어 등산복 차림이 아닌 평상복으로도 가능하지 않나 싶어 매력이 덜했다.
결국 시원한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완주의 운암산(雲巖山, 597m))으로 가닥을 잡았다.
저기 멀리 보이는 산이 운암산. 그 아래 대아호가 있다.
내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서 이따금 씩 찾는 지역이다. 호수 주변으로 난 드라이브 코스의 경관이 뛰어나고 인근에 대아수목원 고산 휴양림 등이 있어 휴일이면 찾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입구인 새재에 이르러 등산로 입구가 눈에 띄지 않아 그대로 통과하는 바람에 한참 만에 되돌아왔다. 주차하고 살펴보니 입구가 이런 곳인가 싶을 정도로 거의 표가 나지 않는다.
"아니, 이럴 수가 - " 하다가 내심 반가워 하다. 그만큼 사람의 통행이 뜸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오전 9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이른 시간일 수 있지만 인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조금 귀찮지만 지팡이로 거미줄 걷으며 산행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고.
관련 정보를 미리 살펴보니 날카롭고 경사진 바위 구간이 많은 암릉지대 산행이라 해서 약간의 마음의 준비. 초입은 이런 평이한 길, 계곡은 없고 소나무와 참나무 류가 대부분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하다. 초입 분위기와는 달리 길이 잘 나 있다. 좀 오래된 것 같지만 이런저런 산악회의 리본들이 많이 매달려 있어 초행길에 조금 익숙한 느낌을 주기도, 급경사진 아래의 도로를 달리는 할리 데이비슨 행렬의 우두두두...하는 굉음이 요란하게 들려 온다. 가끔 씩 이어지는 것을 보니 그런 오토바이 동호인들이 많아 진 모양이다. 평소 그들의 현란한 옷차림과 오토바이 장식을 보면 특별한 신분임을 내세우는 듯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 스트레스를 날리는 쾌감이 퍽 클 것같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되고.
오래 전 이걸 타는 아는 이에게 들었던 예상 밖의 말,
"우르릉 대며 어떤 폭발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오토바이 등급과 가치가 달라지죠"
그렇구나. 하지만 다름 사람들에겐 화들짝 놀랄 만큼의 위협적인 소음일 수도 있을텐데...
그런 저런 생각들로 10 여 분을 지나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경사도가 급해지고. 다행인 것은 다리에 무리에 간다거나 숨이차다 등과 같이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 오늘 내 컨디션이 유독 좋은걸까. 오르막길도 그렇지만 좌우로도 급경사여서 계속 걷는 것 외에는 달리 몸을 쓸 수가 없다. 꽃이나 독특한 형태의 나무 같은 것이라도 보이면 잠시 여유를 부릴 수 있을텐데 '여기에서 무단 촬영하지 말라'는 빛바랜 표지판이 있을 뿐. 그러고 보니 이 산 일대가 군부대의 산악훈련장이다. 그래서 좀 험준한 것일까.
산행 중 처음 만나는 인적.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묘소다. 풍화에 휩쓸린 때문인지 자취만 남아있다. 어떻게 이렇게 높고 험한 곳에다 산소를 쓸 수 있었을까 . 하늘과 좀 더 가까이하려는 종교적인 바람? 하지만 시신을 이곳까지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원초적인 생각. 그러나 그 때문에 후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이리 되었을 것이라는 씁쓸한 마음. 그러다보니 지금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도중 유일하게 만나는 평지. 그래서 등산객들의 휴식 장소로 인식됨이 안타깝다.
최근의 시설인지 밧줄과 철제 난간이 새것이다. 등산하는 이의 위험 부담을 줄여줘서 고맙고 그 흔한 철제 계단과 나무 데크 같은 것이 아니어서 고맙다. 이런 시설들이 몇 군데 더 설치되어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 그만큼의 암릉지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올라서면서 이제 오른쪽으로 푸르른 대아호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가슴이 탁 트인다. 운암산 산행의 매력이다.
농업용수를 저장하고 있는 대아호
멀리 보이는 완주 경천저수지(사진 중앙)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저기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를 보며 힘을 낸다. 거의 1시간 30분 이상을 쉽없이 올라왔다.
드디어 정상. 낙뢰 때문인지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고사한 채 그 아래 넓은 대아호를 바라보고 있다. 산과 호수의 특별한 경관이다.
이제 배낭을 내려 놓고 편히 쉬면서 과일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었는데 웬걸 이게 아니다. 호수 왼쪽 편으로 또 다른 높이 산이 보이지 않는가. 생각해 보니 저기가 목적지인 운암산 정상인게 확실했다.
고산 땅 들녘을 지나오면서 봤던 산의 정상이 이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한참을 가야하는곳에 정상이 있었다. 올라와서야 알았다.
내가 산행을 멈춘 곳에서 바라 본 운암산 정상(맨 오른쪽의 직벽을 이룬 봉우리)
어찌할 것인가. 사전 정보 습득 소홀. 계산해 보니 깊은 골짜기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가 또 오르면서 여러 암릉지대를 지나야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 암벽에 설치된 난간과 길게 늘어 뜨린 밧줄이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1시간 반 정도를 족히 걸어야 할 것이었다. 산길이 험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심을 챙겨 오지 않았다.
포기.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다음 기회로 생각하면서. 이곳까지 올라 시원한 대아호와 일대의 푸르른 산세를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몇 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중 제일 높은 봉우리가 바로 여기인데.... 측정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정상과 비슷한 500m대의 봉우리인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완주군 고산면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다시 내려간다. 산행인은 나 혼자,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산행인도 만날 수 없었다. 오늘이 휴일이지만 더운 날 이런 험한 곳에 누가 올까 싶었다. 그런데 10분쯤 내려가니 멀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관광차로 등산객을 30여 명의 등산인을 여기에 풀어 놓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포항에서 왔다는데 60대쯤의 일행 한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 "
이렇게 연거퍼 3번이나 묻는데 알아듣질 못했었다.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 -(여기가 대한민국 ??) "
그제서야 약간의 표준어를 섞어 되묻는다. 4번째 되물었을 때서야 비로소 웃으며 답을 할 수 있었다.
"아, 네. 경사가 좀 급한 편이네요... 즐겁게 보내세요!"
- 2023. 6.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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