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시월 중순 어느 날 나포의 한 길가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포(羅浦)는 군산 쪽 금강 하구의 한 포구 동네다. 그곳에서 친구를 기다렸다기보다는 친구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바로 며칠 전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셨고 그의 육신만이 한 줌의 재로 고향 산소로 오고 계셨다.
한낮의 시골길은 다만 조용하고 차분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쌓여 배회하고 있는데 길 건너편 저 앞으로 처음 보는듯한 빨간 꽃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개량종인 듯한 맨드라미. 기존의 것 보다 키가 훨씬 크고 꽃이 컸다. 빨갛다기보다 검붉다는 표현이 맞겠다 싶을 정도로 온통 검붉었다.
그 씨를 받아 봄에 심은 것이 이 맨드라미다.
어릴 때 흔하게 보던 닭벼슬형의 꽃이 아니라 촛불 형태의 꽃이며 시월에 본 꽃인데 내 집에서 이미 8월에 피었다. 분명 키 크고 검붉은 큰 꽃 맨드라미였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잘은 모르나 개량종의 씨앗들은 대개 변이가 일어나는 모양이다. 경험에 의하면 빨강과 분홍의 백일홍 씨를 받아 심으면 전에 없었던 노란색의 꽃이 피기도 했고, 분꽃 역시 빨간 꽃 씨앗을 받아 심었는데도 이듬해 노란색 꽃이 섞여 피는 모습에 신기해하였다. 지금의 맨드라미가 또 그런가 보다. 길가에서 보았던 그 키고 검붉은 자태의 큰 꽃의 형태는 사라져 버렸고 이렇듯 적당한 크기의 노란색과 연분홍색의 꽃으로 섞여 피었다.
왜 이런 변이가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것엔 사실 별반 관심이 없다. 유전자 변이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정도일 뿐.
어떻든 이 맨드라미는 올해부터 내 꽃밭에서 한 식구가 되었고 나는 이를 "나포 맨드라미"라 이름하다.
하여 이 꽃을 대할 때 마다 친구가 생각남은 어쩔 수 없고, 아니 그보다는 그 어릴 적 고샅을 돌아 그 친구 집을 찾았을 때마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단아한 모습으로 맞아주시던 친구의 어머니가 어렴풋이 떠오르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아련한 추억의 공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맨드라미의 꽃말 중의 하나가 '영생'이지만 그 속 어머니의 환영으로 인해 이 꽃은 누구나의 어머니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각인되곤 할 것 같다. 계속 지켜보라며 아마도 가을 끝무렵까지 피지 않을까 싶다.
봉숭아 등 몇 종류의 꽃들 속에 함께 자라고 있는 나포 맨드라미들.
맨드라미 하면 떠오르는 닭 볏 형태의 꽃. 이것은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2년 전에 꽃씨를 받아 심은 것이다.
- 2023. 8.20(일)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초? (0) | 2024.06.20 |
---|---|
삼지닥나무 꽃의 재발견 (2) | 2024.03.17 |
하늘로 올라 간 능소화 (4) | 2022.07.28 |
새 봄 새 꽃 (0) | 2022.04.05 |
15년만의 꽃 (0) | 2020.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