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철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마음으로는 주왕산이나 가야산을 찾고 싶었으나 여건이 안돼 지도를 살펴보다가 비교적 가까운 논산의 바랑산을 택하다. 바랑산? 이름이 예쁘다. 일단 찾는 이가 적어 차분하게 산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가자 바랑산으로.
등산코스라를 미리 알아보고자 인터넷을 살펴봤지만 마땅한 정보가 없다. 딱 하나의 산행기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다.
결국 논산 양촌면 오산리가 시작점이란 것만 기억하고 "바랑"보다 작은 어깨걸이 가방을 하나 챙겨 집을 나섰다.
오산 2리 마을회관과 그 앞 공터
따라서 이번의 내 글은 혹 다음 사람을 위해 정보 위주로 작성하기로.
"양촌면 오산 2리 마을회관"을 입력하면 쉬울 것이다. 건물 앞에 주차 공간이 있고, 아니면 근처 적당한 곳에 주차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걷는다.
회관에서 조금 더 오르면 이정표가 있다. 바랑산 정상까지 2.54Km, 정상까지 거리가 그렇다는 것일 뿐 등산코스 안내판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입구의 폐가 담장에 아주 오래전에 써붙여 놓은 것 같은 "등산로→"라는 희미한 표지판이 유일했지만 마치 전에는 등산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는 뉘앙스여서 머뭇거렸다. 가까운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촌로에게 물으니 등산로가 있어 올라갈 수 있단다. 산의 가장자리로 우회하여 능선을 타면 될 것이라고.
어떻든 이정표 방향으로 5분쯤 걸으면 바리케이드를 겸한 철제 문이 나타난다. 임도가 있었지만 그곳까지는 길이 험해 승용차는 진입이 불가하다.
이 앞으로 임도공사가 진행 종이지만 이 안내 표지판은 폐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닫혀있는 바리케이드 옆으로 통과하여 계속 오르니 지금 한창 임도 보완공사 중이었다. 아마도 사유지인 것 같았으나 사람의 통행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휴식 중인 사람에게 물으니 바랑산 정상까지 2시간이면 갔다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준다. 10시 30분에 출발했으니 그렇다면 1시 전 후에 이곳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일요일인데도 등산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 것 같아 혹 등산로가 험하거니 없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그러면서 자신이 등산 안내 표지 시설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하는데...
훼손된 안내표지판 부근에서 본 바랑산 전경. 등산로는 산의 맨 좌측으로 우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르면서 생각해 보니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이 산의 소유주인 것 같았다. 그렇게 확신이 드는 것은 임도 옆의 현수막. 벌금 2천만 원 내려면 산나물 채취하라는 사나운 경고문이었다. 얼마나 채취꾼들에게 시달렸으면 이 정도일까 싶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갇고 있는 임도공사도 국가나 지자체에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임산물 관리를 위해 소유주 개인이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산에 들어가지 말라" 아니면 "등산로가 없다"라고 제지했을 텐데 그는 "잘 갔다 오라"고 했었다. 말하자면 당신 한 사람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모른 체 할 테니 앞으로 다시 오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 같기도 했고.
그런 인상을 제외하면 나로서는 모처럼 산다운 산에 찾아온 것 같은 좋은 느낌이었다. 언뜻 장성 백양사의 백암산 같다는 산의 형세도 마음에 들었지만 임도 말고는 아무런 인공적인 시설이 없어 모처럼의 자연 그 자체를 대할 수 있었다. 좌우로 쑥부쟁이나 꽃향유 같은 야생화가 참 많아서 좋았고 그리고 나무들의 다양한 가을색 차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15분쯤 걸었을 때 마주친 방향표시 이정표. 이게 마지막 안내 표지이기도 했다.
그렇게 임도 따라 여유롭게 오르다 보니 또 하나의 오래된 이정표가 보인다. 길안내 표지판들을 다 없애버렸다고 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내가 지금 제대로 오고 있긴 하는구나"하는 안도감이 들다. 전신주 모양의 표지판은 아마도 지자체에서 세웠을 텐데 공공시설물이지만 상호 협의가 없는 상태에서 사유지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이 마저도 곧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야 했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 같아 그냥 통과. 노란 리본(노랑색 원)을 보긴 했으나 지금 걷고 있는
등산로가 맞으니 그대로 전진하라는 의미로 해석해 버렸다. 적색 원 안은 퇴색해버린 또 하나의 리본.
바랑산이 직벽의 바위산이라서 이렇게 우회하는 것이겠지 하면서 계속 따라 걷고 있는데 어느 지점에서부터 임도가 내리막길로 바뀌면서 아래로 향하고 있다. 나무들에 가려 30m 정도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저기까지 내려가면 다시 오르막길이 되려니 했는데 그대로 계속 이어지는 내리막길.
아차 싶었다. 분명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어딘가에 본격 등산로인 샛길이 있었을 텐데 내가 놓친 것 같았다. 뒤돌아 걸으며 유심히 방향을 찾고 있는데 오른쪽으로 아주 낡고 빛바랜 리본 하나가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노란 리본과 해질 정도로 퇴색한 리본 하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질 않는다.
되돌아와 리본이 달려있는 주변을 살펴보니 바닥에 떨어져 흙에 묻혀 있는 노란색 물체. 리본이다. 틀림없이 이쪽일 것이라 생각하며 능선 쪽으로 10여 m를 헤쳐 올라 주변을 살피니 결국 등산로가 앞에 나타났다. 절로 안도의 탄성이 나오다. 등산로 표지를 다 없애버렸다는 입구에서 만난 이의 말이 생각났다.
육안으로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을 오른다.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곶감 만드는 것에 경황이 없어 이런 도토리에는 아예 관심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외부인도 없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이를 먹이로 하는 다람쥐나 청설모를 산행 중에 단 한 마리도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도의 도토리라면 1개 연대 정도의 다람쥐들이 겨울 동안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뱀을 한 마리 보았으니 분명히 먹이 사슬 구조가 만들어져 있을 터였다. 흙을 파헤친 멧돼지의 흔적도 보인다.
낙엽으로 덮인 산길은 어느새 암석길로 바뀌었다. 강우 시에는 바로 옆으로 상당한 양의 물줄기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사는 그렇게 급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완만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암석길이 끝나고부터였다. 길이 없다. 위쪽으로의 방향은 짐작이 되나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과 낙엽들 뿐이다. 눈여겨보니 발에 찍혀 흙이 파인 흔적이 보인다. 최근은 아니고 언제인가 누군가가 내려선 흔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바랑산은 오르는 산이 아니라 저쪽 대둔산 등의 산에서 능선을 타고 오다가 하산하는 길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전문 산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개척길이 된 것 같은.
잠시 망설였다. 계속 이대로라면 난감한 산행이 될 것이다. 다시 내려가자니 맘먹고 왔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고. 하여 길을 내면서 오르기로 마음먹다. 내가 전문 산악인도 아니고 마음이 독한 것도 아닌데 그리 결정한 것은 순전히 좋은 가을 날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급 신고를 할 수 있는 국가지점번호 표지판도 없고 밧줄도 없고 나무계단도 없는 그런 산속길을 겁 없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급경사의 가파른 지형이어서 자칫 실족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조심 조심하며 발을 내딛다.
저 앞으로 빨간 리본 한 개가 눈에 띄어 방향은 잃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낙엽이 진 가을 산이어서 다행이지 잎 무성한 여름날이라면 아마 더 이상의 산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혹 하산할 때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하며 나아갔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행적이 떠올랐다.
결국 어렵게 다 올라 능선 길을 찾고 보니 마음이 놓였다. 여기는 산악인들이 지나다녀서인지 평평한 산길을 육안으로 충분히 식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매우 수월하게 전진. 가끔씩 급경사가 나타났으나 험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부이고 보니 나뭇잎들이 모두 져서 수북이 쌓였다. 사그락- 사그락- 낙엽을 밟으며 걷는 경쾌하고 기분 좋은 발걸음.
맨 좌측 쪽으로 대둔산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조망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처음으로 시야가 시원하게 트였다.
저 아래로 겹치고 겹친 산능선들이 아름답다.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빼어 난 경관을 대할 수 있겠는가. 힘들게 올라왔던 약간의 고역스러움이 일순간 다 사라져 버렸다.
정상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북쪽으로 당겨 찍은 모습. 멀리로 풍력발전 시설들이 보이는데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한다.
드디어 정상. 아무런 시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정상 표지목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높이는 555.4m,
산의 형세가 마치 바랑을 닮았다 해서 바랑산이라 이름했단다.
정상의 공간은 좁았다. 사방으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시원하게 조망할 수가 없다. 나뭇가지 사이로 힐끔힐끔 원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앞 뒤로의 등산길 말고는 좌우가 저 아래로 직벽이라서 발을 함부로 내딛을 수가 없다.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언젠가 내 산행기에서 언급한 일이 있었지만 나는 속도가 느릴 뿐 시작할 때부터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한 번도 앉아서 쉬지 않는다. 산행 중에 평범하지 않은 꽃과 나무가 있으면 마치 대화하듯 한참을 들여다본다. 다시 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숨고르고. 그게 나의 편한 산행 습관이다. 그렇게 혼자 자유롭게 산행하다 보니 아내나 절친 정도의 막역한 사람이 아니면 나는 늘 혼자였다.
그렇지만 산행 중에 다만 몇 사람이라도 마주칠 수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오늘 휴일이기에 산행 중 한 두 사람은 마주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불편해서, 저 옆으로 이름난 대둔산이 있어서...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개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내판이나 화장실, 주차장 같은 최소한의 시설도 없는 곳이고 보니 그런 점에서 다른 이에게 바랑산의 산행을 권할 수 없음이 아쉽다.
2시간 걸릴 것이라 했던 산행 시간은 길을 잘못 찾은 것과 끊어진 길 찾기, 정상에서의 휴식 등을 포함하여 2시간 50분 정도가 걸렸다. 나에겐 적당한 산행이었고 그래서 다른 계절을 택해 언젠가 다시 오리라 마음먹는다. 오는 도중에 성삼문 묘역과 쌍계사 안내 표지판을 봤는데 그땐 그곳에도 차분히 들러볼 겸.
- 2023.10.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