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 자고 나니깐 네가 안 보여!"
강화에 정착한 친구 녀석이 아침에 전화해 왔다. 여행 끝이 허전하다는 얘기다. 사실 그 허전함은 내가 더하지 않나 싶다. 어제 오후 역 대합실에서 헤어지며 뒤돌아 집에 왔을 때 날 받아주는 것은 산자락 밑에 덩그렇게 자리한 집 밖에 없었으니.
시골에 살면서 가장 허전할 때가 같이 가까웠던 사람이 떠나고 없을 때, 그리고 비 오는 날 같은 경우인데 두 경우가 합해진 오늘이 딱 그렇다.
최근 한 달 동안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서울 친구와 함께 셋이서 다시 만나 고창 일대로 2박 3일의 여정을 즐기다. 이번 일정은 겨울이고 하니 온천과 미식으로 나름 정했었다. 호사가의 거들먹거림 같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우리 셋 모두가 진즉 고희를 넘겼고, 한 시절 열심히 살았으니 이번은 좀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겠느냐는 서로 간 함의의 결과.
조용한 시설에서의 게르마늄 욕은 좋았고 맛집으로 이름이 알려진 한 곳에 가려하니 오늘은 휴업이라는 전화기의 자동 응답. 그것 참. 조금 배회하다가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는 곳에서 시장기를 해결하고 인근의 당구장으로.
두 녀석은 골프 뿐만 아니라 당구의 맞수다. 당구 승부에서는 진 녀석이 언제나 "한 게임 더!"를 외친다. 그러다 보면 언제 끝나는지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다. 관전 위주였던 당구 문외한인 나는 결국 혼자 빠져나와 야간의 시가지를 한 바퀴도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과거 두어 차례 이 지역을 방문한 바 있지만 그간 너무 텀이 길었다. 오늘 보니 전혀 색다른 느낌. 도심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상가에 야외 테이블이 놓여있어 이국적이다. 외국의 어느 도시를 흉내 낸 것 같다는 선입견보다는 폭이 넓은 도로와 함께 인도의 폭도 그만큼 넓어 쾌적하다. 시가지가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는 인상이어서 호감이 갔다.
야간 조명도 한몫한다. 교차로 마다에는 신호등 보다 로터리를 설치해 자유스러운 운행을 유도했고 로터리 화단마다 조명등을 달아 연말 분위기도 함께 느끼게 하고 있었다.
가까운 모양성에도 마찬가지. 입구 광장과 성 안의 여러 부속 건물 그리고 길게 이어진 성곽에 이르기까지 조명 시설을 해서 분위기를 띄웠다. 약간의 비 때문인지 사람의 발길이 없어 차분하게 산책할 수 있었다.
복잡하지 않은 평일을 택해 여행길에 나섰지만 겨울비 때문인지 다음 날 함께 찾은 읍성 주변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리저리 발길을 옮겨 다니며 전날 밤 불렀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다.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노래방 간 일이 없었는데도 두 녀석의 솜씨들이 늘었다. 녀석들도 나를 그렇게 평가했지만 그건 아마도 필시 쌓여가는 인생의 연륜 때문인 듯.
"너,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기면 이 노래 불러! 너와 참 잘 맞는다."
그래서 셋 모두가 새로운 18번을 갖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후, 인근 고인돌 유적지와 람사르습지, 바닷가 한 음식점에서의 별미, 노천욕, 가까이 위도가 보이는 곳에서의 저녁과 철석이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의 새로운 아침 맞이 등 함께 즐겁게, 기쁘게 보내다.
동심으로 돌아갔던 사흘이 그렇게 훌쩍 지나가 버렸고,
엊그제 같았던 한 해의 시작이 이제 불과 10여 일 남았다. 그동안의 시간들을 어떤 의미로 정리하고 또 새해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하는 세밑.
친구들과 내년에의 다시 만남을 기약한 것만으로도 의미 하나가 있는 것이겠지.
이제는 저 쪽 뒤안길에 없는 듯한 존재로 위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세상사에 무심하거나 무기력해지지 말자고 마음 다잡아 본다. 가능한 대로 좀 더 생산적인 삶으로.
- 친구야, 내일 아침엔 네 곁에 내가 없어도 허전하지 않을 거야. 익숙해짐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현실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는 것 아니겠니?
- 2023.12 1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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