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막상 행선지 때문에 꾸물거린다. 내 집에서 가까운 '적당한' 산을 찾자니 차별화 때문에 수월하지가 않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명산이 떠올랐다. 완주 경천면 화암사를 여러 번 찾아갔으면서도 그 사찰을 감싸고 있는 산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 이맘 떼 화암사에 갔을 때도 그랬다.
- 그래, 지금 가면 얼레지를 볼 수 있을 거야. 얼레지 보로가자. 복수초는 다 졌나?...
1년 만에 다시 찾은 화암사 초입에서 곧바로 얼레지를 대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아직 낙엽들이 많이 쌓여있는 길 양 옆으로 어떤 식물보다도 먼저 봄을 알리고 있다. 수수한 것 같으면서도 화사하다. 얼룩이 있는 잎도 예사롭지 않지만 보라색 꽃은 매우 세련되고 미끈하며 아주 날렵한 자태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절로 감탄사가 이어진다. 주로 고산지대에서 자란다고 하는데 근방에선 유독 이곳에서만 볼 수 있어 카메라를 들고 일부러 찾아온 방문객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초입 주차장에서 화암사까지 대략 20여 분 정도를 걷게 되는데 산길 양 쪽의 이 얼레지 꽃 때문에 다만 기분이 좋을 뿐 지루함이 없다. 예전에는 산골 할머니들이 나물로 뜯어먹곤 했다지만 이제는 보호해야 될 야생화로 인식이 바뀌어진 탓에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자연 번식이 더 이뤄지는 모양이다.
어쩌다 얼룩 잎이 달랑 한 장만 있는 것이 눈에 띄어 혹 사람들의 손을 타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란다. 1년에 이렇게 잎이 한 장, 그다음 해에 또 한 장이 마주 나고, 다시 꽃대가 만들어지고... 해서 5년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한 몸이 이뤄져서 꽃을 피우게 된단다. 그래서 참 귀한 꽃이다.
얼레지와 함께 복수초도 많이 볼 수 있다. 내 집 마당엔 복수초가 벌써 피고 져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한창 제철이다. 역시 반갑고 기쁘다. 산행길 계곡 옆으로 몇 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처음엔 탐방객들을 위해 지자체에서 일부러 식재해 놓은 줄 알았는데 군락지가 맞단다.
이 꽃을 볼 때마다 담양 추월산 자락에 사는 J형이 생각난다. 아주 오래전 어느 이른 봄날 그곳을 찾았을 때 집 주변에 이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꽃이름을 물었다.
"벌꽃, 여기서는 벌꽃이라고 해. 왜냐면 이 꽃이 필 때부터 벌들이 나와서 날아다니거든 -"
나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인근의 집과 땅값을 함께 물었던 기억이 새롭다. 후에 복수초란 이름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벌꽃'이란 이름에 훨씬 애정이 간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게 복(福)과 수(壽)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복수초'는 느낌이 덜하다..
저 앞으로 보이는 화암사 우화루 앞으로 매화가 활짝 피어 반긴다. 여기 불명산 자락에서는 유독 산이 먼저 나를 반겨주는 것 같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여러 개의 나무와 철계단을 거쳐 왔지만 그것들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돌계단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참 운치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어서 계속 고개를 들어 올려 걸어 오르다.
화암사 앞으로 불명산 오르는 길은 정상을 눈앞에 둔 안부까지 거의 산죽밭이다. 사람 키만큼 자란 산죽 사이에 갇혀 오르다 보니 세속의 잡념들을 더 제거해 주는 것 같아 좋았다고나 할까. 불명(佛明)이란 산이름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밝혀주는 그것에만 집중하라는 듯.
소나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참나무나 잡목으로 밀식되어 있는 산이었다.
이정표 옆으로 저기 정상이 보인다. 화엄사에서 그저 적당한 걸음걸이로 30여 분 정도, 그러고 보니 지난번 광주 무등산에서는 5시간 이상을 걸었는데도 한 번도 앉아 쉬지를 않았다. 찬바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상에서도 인증숏만 찍고 내려섰다. 이게 병인가 여겨질 정도로 그냥 계속 걷기만 한다. 힘들면 잠시 서서 쉬며 숨고르고. 이런 습관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다.
가까이 다가가니 봉수대도 있다. 지형으로 보아 내륙 교통로의 요충지였던 모양이다. 이정표가 있던 곳에서 100m를 오르니 봉수대가 있는 곳이 정상이다.
저 아래로 화암사가 내려다 보인다.(사진 중앙)
여기가 불명산 정상. 48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첩첩산중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나무에도 갇혔다. 북쪽으로 시루봉이란 곳까지 가면 예전에 올랐던 천등산 그리고 구 뒤로 대둔산이 보인다는데 더 이상은 생각이 없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데로 향하신가
...... "
느닷없이 왠 임방울의 단가 한 대목이 목에서 기어 나온다.
꽃 보러 오는 게 우선이었는데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 능선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신세타령 같은 것이 터져 나온다. 뿌연 날씨 때문? 주변으로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산상에서의 유아독존이 갑자기 공허해져 그런 모양이다.
- 2024. 3.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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