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아버지를 따라 선대의 산소를 찾던 성묘 길, 서대전에 들어서서 외곽으로 난 길을 타면 산소에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육중한 산이 서 있었다. 산 이름은 보문산,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한 차례 전해 들었지만 그 후로도 잊히지 않았다. 보문이란 이름이 보물의 음훈이 비슷하다는 것 때문인지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 산인가 보다고 여겼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린 마음에 신비롭게 다가왔던 산. 내가 점차 나이 들어가면서 그 산은 점점 몸집이 작아졌지만 성묘 때마다 그 앞을 지나다닌 지 반백년 세월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도 보문산은 나에게 미지의 산이었다.
그리고는 흰머리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오늘 그 산을 올라 본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저 아래 서대전 구봉산 자락(가수원)처럼 행여 이 산에도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것일까.
대도시에 접해있는 산이고 보니 이미 공원화되어 공원관리소 앞 초입부터 말끔한 포장길이다. 복잡함을 피해 평일을 택했는데도 도시의 휴식처답게 산책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저 앞으로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조심스레 걷고 있다. 그래 내 아버지도 노년에는 저렇게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산책 길에 나서곤 했었지. 순간적으로 점철되는 여러 잔상들 때문에 노부부를 앞질러 갈 수가 없다.
산책 위주의 차도 겸 둘레길을 벗어나 산길을 탄다. 정장인 시루봉까지 1.7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본격 등산로로 들어서자 싫어하는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런 나무 계단은 높이 457.6m의 보문산(寶文山) 정상까지 자주 이어지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나에겐 산행의 맛을 반감시켰다. 겨울산인 데다 수종이 단조로워서 어느 정도의 삭막함도 함께 느끼게 된다. 다만 등산객들을 비교적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그런 단점들을 보완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사람이 아닌 산이 보고파서 여기 왔는데...
까치고개라고 이름 붙여진 곳을 지나는데 까치는 없고 대신 까마귀 소리가 요란한데 그래도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반갑다. 계단이 자주 나타나는 정상까지의 산길은 계속 건조하다는 느낌. 경사로가 급한 산등성이로 등산로가 이어지고 있다. 중간 정도를 오르면서부터 오른쪽으로 대전 시가지가 언뜻언뜻 나무들 사이로 시야에 들어와 무료함을 달랜다. 내가 어린 날 생각했던 대로 이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어 보물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깊은 계곡이 있거나 숲이 울창한 것도 아니어서 그런 설화에 왠지 갸우뚱해지고.
정상엔 정자가 세워져 있었지만 시가지 쪽 전망은 북동쪽 부분만, 남서 쪽 뒤편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나무들 때문이다. 속리산도 대둔산도 보인다는데 멀리의 산 능선들은 오늘 미세먼지 때문에라도 볼 수가 없다. 저 앞 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산, 여기 보문산처럼 한 번 올라가고 싶었던 식장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 밖에 시가지의 수많은 아파트 군들도 아무래도 단조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하산 길은 조금 더 걷더라도 오는 길과 달랐던 고촉사(高觸寺)라는 사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올랐던 길이 너무 삭막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산 허리에 자리 잡은 절은 어느 특정 학교법인에서 세운 것 같은 표지석이 있어 유서 깊은 그런 곳은 아니었다. 다만 등산로가 사찰 내부를 관통하고 있고 등산로를 안내하는 친절한 느낌의 표지판이 군데군데 붙어 있어 호감을 준다. 다른 지역 대부분 사찰에서는 "등산로 폐쇄". "등산로 없음", "등산로 아님. 돌아가시오" 하는 류의 표지판만 봐 왔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글쎄 섣부른 단견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런 게 소통 아닌가 싶었다.
사찰 아래쪽 작은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땅은 아직 꽁꽁 얼어붙어있지만 분명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다. 이곳 대전 보문산에서 봄의 기운을 마셨으니 이제 여기를 떠나 1시간을 달려 내 사는 남쪽으로 내려가면 봄은 몇 배 가속하여 날 찾아 오리니.
- 2024. 1.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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