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무등, 그 무연함 앞에서

소나무 01 2024. 3. 12. 11:38

무등(無等)은 말 그대로 등급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산 자체가 후덕스럽게 보여 그런 이름이 붙을 만하다는 웅대한 산 무등산. 오랜 직장 생활에서 저 말단부터 시작해 정상부까지 오르며 유등(有等)의 존재감을 은근히 과시하며 내 자신 건방을 떨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무등'의 의미가 새삼 와닿는다. 이제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높고 낮음이란 게 그저 덧없다는 생각이 들어질 뿐. 

오랜 세월 동안 늘 마음에 담기만 하고 살았던 무등의 산, 그 산을 어제 다시 찾게 되다.

 

오전 8시 30분 무렵이다. 차가 북광주를 지날 때 저 멀리 구름이 걸쳐있는 산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오! - 무등산이다. 여느 산과 전혀 다른 자태의 서기 어린 모습에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 역시 무등산은 무등산이야.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었지만 너무 늦었다는 가벼운 자책도 없지 않았다.

 

       산행 시작점인 원효사 주차장을 얼마 앞두고 촬영한 무등산 정상부에 깔린 구름띠

 

무등산은 언제나 너그럽고 듬직한 모습으로 나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광주 시내 어디에서든 무등산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 대도시를 아주 가까이 끼고 있는 이런 큰 산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 사무실 창 밖으로 언제든 막힘없이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때마다 무등산은 그 무연한 모습으로 나를 안온하게 품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13년 동안을 무등산과 함께 광주에서 살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저 바라만 봤고 그 언저리만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인근 사찰이나 유원지, 계곡의 음식점 등에서의 단순 산책과 휴식뿐이었다. 

등산이라고 해봐야 기껏 중봉(915m)까지의 산행, 그것도 직업상의 일로 어쩔 수 없이 산을 올랐던 것이 전부였다.

 

 

                                 부동산은 온통 바위(돌) 산이다. 해발 1,017m에 주상절리로 이뤄진 입석대의 위용

 

무등산 정상부. 맨 앞부분 서석대 바위군 뒤로 인왕봉(1,064m)이 보인다. 일반인들의 등반은 여기까지 가능하고 그 뒤의 지장봉과 천왕봉은 군사시설로 인해 출입이 불가하다.

 

원효사 주차장 옆 '무등산 옛길'의 코스를 택해 시작한 산행은 줄곧 이어지는 산죽밭과 너덜길을 걸으며 입석대와 서석대를 거쳐 그동안 통제상태였다가 지난해 11월부터 개방된 인왕봉 정상(1,164m)에서 마무리했다. 대략 4.5Km 정도의 거리를 2시간 반 정도 걸어 오른 셈이다.

무등산 최고봉은 인왕봉 바로 옆의 천왕봉(1,186.8m)이지만 군사적인 문제 때문에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저 아래로 펼쳐진 시가지의 모습이 다. 광주를 떠나 살게 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고층 건물군과 넓혀진 도로 등으로 인해 참으로 많이 변했다. 다만 어느 도시나 다름없이 무수한 아파트로 채워진 획일적인 모습은 여기에서도 씁쓸한 느낌을 갖게 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예전의 내 마음 안 그대로였다.

다만 희미할 따름이지만 과거 내가 살았던 곳을 조망해 본다. 가슴이 좀 저민다. 더운물이 부족해 한 겨울에도 자주 찬물로 머리 감고 출근해야 했던 하숙집, 그리고 밤으로만 물이 쫄쫄 나오던 지대 높던 곳의 단칸방과 한 달 4만 원 사글세 단칸방에 만족하며 신혼생활을 했던 동네, 고난하고 힘들었지만 되돌아보면 그 모두 아름답고 행복했던 이 도시 안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사회생활 첫 근무지였던 금남로의 전일빌딩, 희미하지만 눈에 잡힌다. 그곳은 지금 사람들에게 5.18 역사 현장으로 기억되지만 당시엔 잘 지어진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그 자체가 오져서 8층까지 신나게 오르내렸던 추억. 그 앞의 금남로를 건너 YMCA 건물 뒤편에 동료와 함께 자주 가던 소박한 메밀국숫집이 있었다. 

그곳 금남로 공간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5.18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당시 기둥 뒤에 숨어있었던 비굴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던 뭇 시민들의 용기 있는 저항에 비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한없이 부끄러운 모습의 나였다. 진압군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을 보며 단지 분노하고 울분을 삼키기만 했던 옹졸한 사람.

그 모든 걸 지켜보았던 이 무등산에서 그때를 잠시 회고하자니 더욱 부끄럽고 초라해진다. 

 

돌아오는 길, 면죄부를 받겠다는 심정으로 광주망월동 5.18 묘역에 잠시 들러 참배하다. 불의에 대한 저항에 진압군에 의해 실로 무참하게 짓밟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지만 어느새 거의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고 보면 이제 차분한 모습으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특히 최후의 도청 사수, 결국 최후의 민주 사수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이들의 영령 앞에서 더욱. 하느님의 나라에서 안식과 평화가 있기를.

해서 오늘의 무등산 산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여느 산행처럼 마음이 가볍지 않았음은 어쩔 수 없었다.

 

                                                                                          - 2024. 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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