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회색 추억 만들기

소나무 01 2024. 8. 16. 16:28

3개월 만에 깨복장이 친구들 다시 만나다. 이번에는 무주를 중심으로 짧은 여행 하기로.

B친구가 재수할 무렵 건강 때문에 구천동 초입에 방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한 달 여 몸관리를 해야 했던 아픈(?) 추억이 있는데 그쪽을 가 보고 싶다는 친구의 제의. 그동안 앞만 보고 살았던 우리네가 세월의 흐름 위에서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일단 내가 사는 곳에 모여 하루 밤 끝도 없이 사는 얘기 오가고. 아침엔 산자락에 사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자연과 함께하는 건강한 삶 같다고 격려해 주었지만 정작 그 안에 사는 나는 그 "자연"이라는 것에 이제 많이 무디어졌다.

어떻든 아침 밥상에 내 집에서 나온 달걀과 오이 하나라도 같이 먹을 수 있음이 좋았고.

 

 

완주 "고산문화공원"이란 곳에 들러 그곳에 조성되어 있는 무궁화테마공간에서 한참 제 철인 무궁화의 여러 모양을 살펴보다. 광복절이 있는 8월이라선지 의미 있는 볼거리가 되었다.

 

완주 경천면 화암사를 둘러본 후의 오후 시간 더위가 절정이다. 계곡에서 잠시 쉬었지만 숲을 빠져 나오니 여전히 볕이 매우 따갑다. 매일 폭염주의 문자가 날아드는 요즘이라 에어컨이 가동되는 차 안이 좋은 피신처가 되고 또 여기저기로의 이동에 자기 차량보다 더 편리한 수단이 없을 터이니 계속 운전대를 잡기로.

주의력이나 판단력, 순발력 등 그 모든 것이 떨어지는 나이고 보니 그저 조심조심.  평소 우리 또래 전후의 운전자 사고가 있을 때마다 "또 고령운전자 사고"라며 몰아붙이며 면허를 자진 반납하는 게 상수라는 것 등의 행태에 화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 더욱 조심. 대안 제시 없이 이 시대 노인들을 애물단지 짐짝 같은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 같아 그럴 때마다 서운한 것은 사실.

그래서 단편적이지만 부피 큰 농자재들을 어디에 싣고 다니며 농사지으라는 것이냐는 어느 농부의 직설적 표현의 불만에 공감하며 그런 기사 볼 때마다 나도 자주 회자되는 그 말을 중얼거리곤 한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다".

자식이나 젊은 세대에게 짐이 되는 존재는 아니어야 할 것이라 다짐하면서.

 

 

                         좀 더 경건한 자세로 사진 찍자며 황진장군 대첩비 앞에서 

 

차는 구비 구비 대둔산 길을 오르면서 휴게소에 도착. 잠시 휴식을 취하자는 의도보다는 임란에 큰 공을 세운 황진 장군의 행적을 찾아온 것이다. 몇 해 전 진안의 웅치 전적지에 이어 이번에는 여기 이치(梨峙) 전적지. 대둔산 휴게소 옆에 조성되어 있다. 나에겐 이미 익숙한 곳이지만 멀리서 온 두 친구는 초행이어서 내가 어설픈 가이드 노릇. 

이 고개를 지킨 수백 명의 의병 영혼을 위해서도 잠시 묵념. 이들로 인해 "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하였으니 후손으로서 머리 숙여 감사 감사.

 

 

무주를 참 오랜만에 찾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덕유산 향적봉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지우고 곧바로 백련사 쪽 등산로 초입인 설천면 삼공리 계곡으로. 

계곡엔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 잠시 한 여름이란 걸 잊게 한다.

그런데 이게 개발인가 정비인가? 양 옆으로 축대를 쌓고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환경친화적이어야 할 계곡이 자연미 하나 없는 획일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다. 주변에 상가와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참 아닌 것 같아 실망.

 

 

친구는 계곡과 접해있는 이 민가에서 한 달 여 몸을 다스렸다. 벌써 반백 년 전의 일이다. 위로 겸 구경 겸 그 옛날 여길 찾아온 일이 있었으나 전혀 기억이 없다. 친구는 그때 주먹만 한 자두 맛있게 먹지 않았느냐 했지만 역시 그런 기억 말끔히 지워지고 없다.

인기척 없는 이 비어있는 공간에서 친구는 한참 동안 회상에 잠기다. 바로 앞 계곡물까지 마당이 넓었는데 정비공사 탓인지 반쪽으로 줄었다고 아쉬워한다. 친구는 이 집 방 하나를 얻어 좋다는 약재(?)들을 구해 먹으며 회복할 수 있었단다. 당시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까. 젊은 날에 작고한 내 둘째 형이 가끔 부르던 "산장의 여인"이 문득 생각나 순간적으로 애절함이 더해지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 "으로 시작되는 그 가사의 노래. 

친구는 그런 역경들을 극복하고 후에 규모 있는 항공 관련 회사의 CEO까지 올랐으니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저녁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목청을 높이다. 우리 가게에서 드물게 보는 노래  잘하시는 손님이라며 주문도 하지 않은 괴일 서비스까지 받다. 그게 정말 칭찬인지 아님 더 긴 시간 이용하라는 상술인지 헛갈렸지만 세 사람의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돋궈준 것만은 사실이다. 부르고 또 부르고...  나설 때 이용 요금도 깎아 준다. 거참.

 

석 달 만의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다. 시골 살면서 제일 허전할 때가 같이 있던 사람이 떠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경우다. 그것은 함께 머물러있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한다.

친구들이 떠난 후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허전하다. 그래서 지금도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그 노래방에서의 모습들. 그중 "- 세상에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며 가슴속에 있는 것을 토해 내듯 감정을 잔뜩 실어 부르던 친구의 음성.

살아보니 세상에 허무한 것이 어디 이 "황성옛터" 가사뿐일까만은 요즘 자주 허전과 허무가 교차하는 것이 이 또한 나이 탓인 건지...

 

     12월 동해안을 약속하며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 방문지 진안 마이산 탑사에서.                                    

 

                                                                                             - 2024. 8.13(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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