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핸 단풍이 늦었다는데 지금 쯤 어디 가볼 만한 산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게 서대산. 대전에 들러 성묘도 해야 하니 거기가 좋겠다 싶었다.
내가 갖고 있는 종교의 좋은 점 하나가 조상을 생각하는 날이 있다는 것. 11월 2일이 위령의 날이고 성당 미사와 함께 이후 8일까지 조상의 묘소를 찾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권하고 있어 대전의 묘원에는 이미 가기로 마음 정하고 있었고.
신평마을 쪽에서 바라본 저 멀리 높은 봉우리의 서대산
집에서의 출발을 조금 서두른다 했는데 성묘를 마치고 대전을 나선 게 9시 30분. 서대산 등산 입구인 금산 추부면 개덕사까지 1시간 5분이 소요된다고 뜬다. 하늘에는 지금 구름이 많이 깔려있고 예보로도 종일 구름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어 단풍과 조망을 즐기기에는 좀 그렇겠다 싶었지만 상쾌한 기분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
통영대전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추부면 신평마을에 이르니 저기 서대산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한눈에 경사가 매우 가파르게 보였지만 "가히 오를만한 산"이라는 느낌이 불쑥 들어졌다. 아직 단풍이 빠른 건지 아님 단풍나무가 없는 것인지 산색이 조금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고.
추부? 우리나라 지명 중에 가을 秋가 들어간 곳이 얼마나 되나? 오래전 이곳 추부에서 유명하다는 매운 짬뽕을 먹어 본 인연 밖엔 없는 곳인데 그때는 왜 이런 걸 줄 서 가면서 먹나 싶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람들이 줄 서 있으면 "차라리 안 먹고 말지"가 내 성격이다.
가을과 좀 관계가 있을까? 그러나 추부(秋富)는 예전에 말을 사고파는 장터가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단다. 秋는 '사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그리고 富는 '장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입구 개덕사(開德寺)다. 신라 문성왕 때 창건된 건데 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 하여 지금의 서대산(西㙜山)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게 정설인 듯. 내 눈에는 사찰 오른쪽의 거대한(?) 폭포가 우선 들어왔다. 얼추 30여 m 정도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지금은 수량이 적어서 그렇지 여름날 강우가 있는 날에는 매우 장관이겠다는 생각.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되었다. 절 뒤쪽으로 돌아 오르는 입구에 몇 군데의 쑥부쟁이가 나를 반긴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집 들어오는 길에 많이도 피어 있었는데 포장이 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개발이라는 게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그에 못지않음을 너무 간과하며 사는 게 아닌지.
참, 내가 몇 시에 출발했지? 10시 45분이다. 기념품으로 받았던 금색의 옛 손목시계는 근 30여 년이 가까운데도 건재하다. 좋은 것 자고 다니겠다며 이건 그냥 처박아 놓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좋아졌다. 자랑할 것도 없고 창피함도 모르는 나이가 되어서 그렇겠지. 종잇장처럼 얇고 가벼운 게 좋을 뿐만 아니라 만원도 안 할 테니 혹 잃어버리더려도 섭섭지 않이기에 좋고. 한 지인이 우리 지자체에서는 노인 생각한다며 여러 가지 건강이 체크되는 그 시커먼 전자시계를 공짜로 받았다며 좋아하던데 난 그런 시계 정말 싫다.
낙엽이 많이 졌다. 주변이 거의 참나무류인데 여긴 벌써 나목이 되었다. 드물게 있는 단풍나무들도 나뭇잎이 모두 시들거나 이미 졌다. 그 잎들이 수북이 쌓여 소리로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싸그락 싸그락... 좋다.
초입에서 약간 벗어나 아주 극히 짧은 구간의 평지 길을 제외하면 산길은 그야말로 100% 오르막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옛날 산행자가 누구였는지 그저 알맞게 지그재그로 길을 내어 놨다는 것이다. 내 페이스 그대로 쉬엄쉬엄 오르면서 한 번이라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일이 없었다.
오른편으로 작은 계곡이 있었으나 물소리는 멈췄다. 여긴 키 작은 생강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데. 샛노랗게 물든 잎들이 참 보기 좋다. 그냥 보면 될 텐데 꼭 한 번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지. 그것 참.
한 여름 같았으면 무성한 잎 때문에 시야가 가렸을 텐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추부면 일대와 먼 산의 자태를 내려다볼 수 있어 피로도 잊게 했고.
입구에서 총 1.8Km의 거리를 1시간 40여 분 동안 걸어 올라 드디어 정상. 사진 찍는 것 말고는 한 번도 해찰하거나 앉아 쉬지 않았건만 젊은(?) 산악인들보다 한 30분 정도 더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 들면 무리한 산행은 피하라 한다. 기동력 주의력 판단력.. 모두 떨어지는 데다 무릎 관절 같은 곳에 좋을 까닭이 없을 테니. 해서 지금의 내 처지에 스스로 내린 결론은 가능한 높지 않은 완만한 산을 택하되 절대 무리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 그런데 오늘 산은? 경사도가 높은 904m의 충남에서 가장 높다는 산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변명거리가 좀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누군가 참 알맞게 지그재그 길을 내었기에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
한 편 생각하면 산의 경사가 심해 이렇게 밖에 길을 낼 수 없었겠다는 것도 있었지만.
정상에서는 저 멀리 대전시가지가 뿌옇게 들어왔고, 옥천시가지도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사방이 트여있어 여기저기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과 아름다운 능선들을 마음껏 눈에 담다.
바로 옆으로는 강우레이더관측소. 금강유역을 비롯한 주로 호남지역의 강우 관계를 관측하는 모양이다. 산 정상부근의 시설물들은 대개 흉물로 보일 수밖에 없을 텐데 무엇보다도 고맙고 한편으로 감사한 게 건물이 정상에서 한 발 물러나 지어져 있다는 것. 그러면서 그 시설 일부를 등산인의 전망대와 휴게시설로 개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보안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차단하고들 있는데. 가만히 보니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따로 설치된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든.
내려서는 길. 산 길이 대부분 너덜바위로 덮여 있어 조심해야 했다. 더구나 돌의 모양새가 모나거나 해서 생김새가 각각이고 또 돌 사이의 간격이 제 각각이어서 발 디딜 때 더욱. 거기에다 겹겹이 쌓인 낙엽더미에 감춰져 있어 앗차 하면 발을 접질리거나 넘어져서 사고로 이어질 판이다.
발목을 접질린 사고를 내 한동안 절룩거리며 다녀야 했던 나의 과거가 있기에 더욱 조심조심. 내리막길은 올랐을 때 보다 더욱 조심.
중턱쯤까지 내려왔을까. 한 군데의 단풍나무 몇 그루 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그 잎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쓸쓸해지는 이 가을날에 그대 여기 서대산을 찾아 주었으니 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것일까. 하니 좋은 추억으로 잘 간직하라 하는...
-2024.11.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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