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목적이 아니었다. 대전에 있는 선대 묘소에 진즉부터 성묘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형제들과 함께 1년에 딱 한 번 나섰던 추석절의 연례행사였지만 지금은 오늘처럼 혼자가 되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많은 변화가 있었고, 삶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곁에 함께였던 육신들은 이제 흙이 되어 떨어져 있게 되었고 그래서 찾는 이 없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되면서 불현듯 집을 나서게 만든다. 나이 탓이다.
지난 1월 하순 보문산에 올라 촬영했던 멀리 식장산의 원경.
돌아오는 길에 비교적 가까운 위치의 식장산을 오르기로 했다. 지난 겨울 같은 대전의 보문산에 올라 멀리 바라만 봤던 산.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산행에서는 더위라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 그저 물 한 병들고 초입으로 향하다.
처음엔 두세 시간 걷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사전에 정보를 살펴보니 식장산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전망대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했다. 순간 잠시 고민했으나 본격 산행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수월한 쪽으로 선택.
대신 전망대 주위에 "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며 그곳에서 차분히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맘먹다. 예전 백제시대에 지역 방어를 위해 식량을 이 산에 많이 비축해 놓았다는 것에 연유하여 산 이름을 식장(食藏)이라 했다고.
전망대 입구에 주차하고 몇 백 m 잠시 걸어 오르니 넓은 공간에 정자가 우뚝 서 있고 그 앞으로 대전시가지가 시원스럽게 한눈에 펼쳐진다.
그러나 출입금지. 안전에 이상이 있단다. 주변 경관과 시가지 조망을 위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식장루"라는 건물이라는데 안전 문제라니. 일단 실망.
이번에는 식장산에서 본 반대 편의 보문산 모습.
식장루 위 헬기장에서 본 대청호. 식장루 지붕선 너머 오른 쪽으로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지만 여기에서는 조망이 불가하다.
식장루에서 조금 더 오르면 헬기장이 있고 그곳에서도 탁 트인 시가지 조망을 할 수 있다. 오른쪽 편으로는 멀리로 대청호도 보이고.
대학 동아리인 모양인데 시원한 공간을 바라보며 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인데도 젊은이들에겐 별거 아닌 모양. 싱싱한 젊음이 좋다.
끝무렵인 것 같아 기념샷을 부탁했더니 한 여학생이 흔쾌히 받아 주며 "가로로 찍을까요, 세로로 찍을까요?"라고 묻는다.
순간 멈칫했다. 대개는 알아서들 찍어줬고 상대가 굳이 물었다면 "세워서 찍을까요, 눕혀서 찍을까요?"라고 했을 텐데.
"그냥 적당히"라고 답하려 했는데 그런 게 뭔 필요 있겠느냐는 듯 그 여학생은 자세를 바꿔가며 민망할 정도로 여러 컷을 눌러 준다. 그래도 피사체가 맘에 안 차는지 "브이 샷"을 찍겠단다. 세대 차이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이 손가락으로 "V"표시를 하고 자세 취하라는 말이라는 것은 곧바로 일야챌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또 민망한 모습으로 "V"!
그 젊은 친구의 친절이 따듯하고 고맙고 한편으로 부러워서 여기에 그 사진 올린 철없고 연로한 탐방객.
군사 시설을 두르고 있는 철조망을 따라 걷다가 급경사를 2백 m쯤 내려가서 다시 오르면 "해돋이 전망대"라 이름한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 구간에서 약간 산행의 맛을 느끼다. 그냥 편히 왔다 가면 섭섭할 테니 네가 원하는 산행 맛보기라도 하라는 듯.
저 앞으로 완주 대둔산이 보인다.
좁은 공간에 벤치 두 개가 놓여있고 태극기가 꽂혀있는 게 여기가 해발 598m의 정상 역할을 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여느 산처럼 여기 식장산도 정상은 좀 더 위에 방송사 송신 시설이 점유하고 있어 출입이 불가했다. 오늘날 상당 부분은 위성이 해결해 주고 있지만 아직은 지상에서의 전파 사용이 필수적인 듯. 산행인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다.
그대로 돌아 내려오기 못내 서운해 "식장산 문화공원"이라 표현된 곳에 기대를 가졌으나 안내문을 살펴보니 출입 불가한 식장루, 겨울에 필요한 듯한 박스 형태 건물의 작은 쉼터, 나무데크 길, 화장실.. 그게 전부였다. 뭐라도 있겠지 싶었는데 이름만 그냥 문화공원인 셈. 이것도 아쉽다.
포장된 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 걸어오며 오른편에서 봤던 아주 작은 이질풀 꽃 몇 개가 그나마 위로가 되어 주었다.
- 2024. 7.3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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