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떻든 내가 꿈꾸었던 집이 내 눈 앞에 현실로 나타나 있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지 모른다. 직장생활을 끝내면 이 곳으로 내려 와 새로 지은 나만의 공간에서 차분하게 살기를 희망했던 터전이기에 그동안 나름대로 공을 들여왔던 것은 사실이다. 마음같아서는 곧바로 서울을 떠나 본격적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서울의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형편이다. 경제적 안정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아들 딸의 교육과 취업문제 등을 위해서도 일정기간 서울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같이 서울과 익산을 오갈 수는 없는 일. 왕복 6시간 정도의 거리를 출퇴근한다는 건 몸도 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도무지 가당치 않는 일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해 매일 4시간의 거리를 출퇴근하던 사람을 독일에서 만난 일이 있지만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 건강과 교통비를 생각하더라도 무모한 일이다.
결국 나의 정년 퇴직 시점까지, 그 때 까지 나 혼자만이라도 이중생활을 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새로 지은 집은 결국 그 때 까지 별장 기능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위해 세를 놓는 것도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 혼자, 아니면 주로 아내와 함께 가능한 대로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과 이곳을 오가며 자연과 함께 사는 즐거움을 가져 볼 수 밖에. 아이들은 이미 서울의 편리한 문화생활에 익숙해져서 TV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이 곳 시골에 내려 와 지낸다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었다.
집 옆의 산 언덕에서 내려다 본 모습.
집 앞의 논둑에 피어 난 자운영꽃들 사이로 촬영한 모습.
다행히 직장에서 새로 맡게 된 나의 보직이 오직 직무에 올인해야 하거나 시간을 다투어야 하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대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금요일 오후 퇴근과 함께 승용차로 내려오면 그날 밤부터 시작하여 일요일 저녁까지 2박 3일 동안을 이 곳에서 보내며 전원생활의 낭만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해방감이 큰데 군불을 땐 따뜻한 항토방에서 달콤한 잠에 취하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신선한 아침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이었다.
또 땅을 파서 무엇인가를 심고 가꾸며 푸르른 숲 속을 거닐면서 사색에 빠져볼 수 있다는 것도 여간 가슴 벅찬 일이 아니었다. 산자락 밑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나만의 공간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 보고 싶어 꽃밭 꾸미기, 잡초와 잡목 제거하기, 텃밭꾸미기, 나무심기, 앞 뒷마당 정리 등등의 일 들을 하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 어디에다 심을까, 채소는 어떤 것을 길러 볼까 등등 그런 생각을 미리 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다가 생각했던 일을 실천에 옮길라 치면 그 일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가 일의 노예가 되어버린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평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축대 주변에는 개나리와 철쭉을 심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나무와 꽃을 가꾼다는 것은 상당한 육체 노동을 요구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내집을 내손으로 가꾼다는 것 때문에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었다.
장독대 주변에 뿌린 채송화가 어느 새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이제 더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과욕이 아닌가 싶다. 나의 작은 꿈은 산자락 밑에 집 하나 짓고 그 안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이 집은 나의 꿈이 담겨있는 나의 결정체이다. 부족함이 있다면 살아가면서 조금씩 채워가면 될 일이었다.나를 위해 소 눈물을 흘리던 아내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3천만원의 전세집으로 이사했으나 집주인은 다음날 밤 야반도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눈뜨고 코 베어 먹는 서울이었다. 가까스로 원금을 찾아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며 짐을 나를 때 나는 그만 쓰러져 누워 버렸다. 아내는 그런 나를 쳐다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뜨거운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다음 날 부터 일주일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었고.
신혼 시절 월 4만원 짜리 사글세 방부터 살아야 했던 우리로서는 이제 우리가 살고자 할 집을 우리의 힘으로 새로 지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미륵산을 기대고 있는 나의 집 원경.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이 곳에서의 나의 시대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내 아이들이 대를 물려 이 집에 살게 된다면 그 때 집 안팎에 묻어있는 아버지의 노력과 흔적들을 대하면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것이면 족하다.
시인 김현승의 표현대로 마시는 술잔의 절반이 눈물로 채워지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아버지라는 것을 실감하는 나이. 하여 생전의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아버지께 이 모습을 한번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어머니도 같이.
언제나 땅을 그리워했던 아버지께 좋아하시던 꽃 무엇이라도 여기에 가꿀 수 있도록 해 드릴 수 있었다면 얼머나 좋을까...
다시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신 아버지, 수많은 세월이 흘러 나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되어버린 지금, 어느 것 하나 사소하지 않은 내 아버지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이 막내아들의 가슴이 못내 시리고 저민다.
아버지
아버지 어서 와 보십시오.
아버지
마당과 꽃밭이 있는 아버지의 집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고향 구봉산 자락이 아니더라도
여기에 진달래와 노오란 생강나무꽃이 있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백일홍도, 한련도, 쪽도리꽃도
그리고 능소화도 있습니다.
아버지
여기에는 해당화를 심었고
저기엔 도라지를 심었습니다.
아버지 보시나요.
그 곳에 외롭게 계시지 말고
여기로 다시 오셔서 꽃들이랑 함께 사십시다.
아버지,
이 다음엔 칸나와 키다리노랑국화와 사르비아를 심겠습니다.
저 쪽 울타리에는 구기자와 탱자를 심을랍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꽃과 나무를
어디에서든 구해 와 심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그 꽃들이 철따라 피어 나고 다시 피어 나고 또 피어 나고
수 십번 거듭될 때 까지
그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여기에서 저랑 다시 사십시다.
아버지
아버지....
바다가 보이는 남쪽 어느 마을(지금의 여천시 덕양면) 뒷산에 가족단위로 봄놀이를 즐기며 촬영한 사진인 모양이다. 오른쪽 라인이 부모님과 누나, 형.
아버지는 이런 한가롭고 여유로운 풍광을 좋아하셨는지 평소에도 꽃과 나무를 좋아 하셨다. 당시 분위를 알 수있는 집 주변의 사진이 더는 없어 유감스럽다. 1940년대 초반 사진이다.
지금의 집은 어쩌면 호화스럽다. 문명의 혜택과 생활의 편리함을 무시할 수 없어 그야말로 현대식 집을 지었지만 따가운 햇빛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20여 평 정도의 실내 공간과 적당한 넓이의 정원과 텃밭이 있으면 그 것으로 되지않겠느냐는 생각이다.
- 2007.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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