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우중입암(雨中笠巖) - 입암산

소나무 01 2009. 12. 26. 00:19

 

 

그냥 그렇게 산다는 것 

 아마 6시쯤 되었을 것이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어제 예보로는 오늘 오후쯤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그래도 산행을 결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 그냥 가보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굳이 눈비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혼자 지내고 있는 나에게 아침밥은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가끔 묻곤 했는데 나는 한번도 아침밥을 거른 일이 없다. 간단한 조리법은 알고 있는지라 언제나 국을 끓여 밥과 함께 먹었다. 토스트 몇 조각과 우유 한잔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이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믿고 있었다.

 대충 정리하고 장비를 챙겨 집을 나서려는데 치아의 통증이 심상치 않다. 퇴근 후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가 생기면서 평소 술 마시는 기회가 잦다보니 이가 성할 까닭이 없다. 그것도 한번 마시면 끝장을 봐야하는 좋지 않은 음주 습관 때문에 언제나 과음 내지는 폭음을 일삼았고 보니 며칠동안 계속되는 늦은 시간까지의 음주에 피로가 누적되다 보면 간혹 잇몸이 부어 올라 고생을 해야 했다.

 어젯밤에도 서울에서 내려 온 손님이 있어 술자리라도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전주의 가까운 사람과 함께 폭음을 한 편이었다. 푹 쉬면 괜찮을 듯 싶은데도 쉬는 날이면 언제나처럼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치아 통증으로 주말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치료를 받아 두는 게 낫겠다 싶어 고속도로 입구 쪽으로 차를 몰아 가며 혹시 치과가 눈에 띠는지 두리번거린다. 그렇다면 날씨도 그렇고 하니 아예 산행을 포기해 버리거나 늦추더라도 치료부터 받겠다고 마음먹는다.

 

 서두른다 하면서도 숙취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고 보니 9시가 넘어서야 아파트를 나설 수 있었다. 병원은 대개 9시 30분부터 문을 연다. 가는 길에 치과 간판이 보이면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일착으로 진료를 받을 작정이었다.

 처음 만난 P치과, 반가운 마음에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대형 유리문 앞에 방이 하나 붙었다. 여름휴가라서 오늘부터 사흘 간 휴진 한다는 것이었다. 산행이냐 진료냐 망설였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은 치과에 미련 갖지 않기로 하고 곧바로 차를 몰아 고속도로 쪽으로 냅다 달렸다.

 날씨는 흐려 언제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기분은 상쾌하고 좋았다. 광주 방향으로 내려가는 호남고속도로에는 차량 통행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정읍을 지나자 입암산 줄기가 눈에 가까이 다가온다. 해발 626m가 되는 입암산 줄기의 또 다른 산에는 넓은 바위가 마치 산성처럼 둘러 서 있어서 예전부터 이 부근을 지나칠 때마다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입암산(笠巖山)은 정읍 밑에 있는 노령역 쪽에서도 올라갈 수 있으나 너무 가파르고 험하다 하여 사람들은 거의 장성 남창계곡 쪽을 택한다. 나도 물론 지금 장성 쪽으로 향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리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출발한 입암산행. 멀리 산 정상이 보인다. 

 

  백양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사거리 시가지로 들어선다. 수 십 년 전의 한적한 분위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양사 역 앞쪽으로 늘어서 있는 몇 대의 택시 행렬이 색다르다. 누가 탈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곳에서도 택시 한 대로 충분히 밥벌이가 가능한지 기사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

 백양사역의 옛 이름은 사거리(四街里)역이었다. 지금은 정년 퇴직한 큰 형이 40년 전쯤에 이곳 사거리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교사 생활을 했던 곳이라 나에겐 낯설지가 않는 곳이다. 큰 형은 익산(옛 이리)에서 제법 큰 규모로 장사하던 한 소금 집 딸을 만나 중매 결혼을 했고 그리고는 여기 사거리 땅에서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래도 큰아들인지라 어머니는 뻑 하면 나를 불러 그곳까지 반찬거리를 나르게 하였다.

 익산역에서 사거리역까지는 완행열차로 1시간 40분 정도를 가야했다. 김제 들녘의 드넓은 평야지대를 지나 정읍역을 벗어나면 험준한 노령산맥의 줄기를 만났고 그 산밑을 뚫어 남도 땅을 잇는 갈재터널은 어찌나 높고 길었던지 기관차도 사람도 너무나 힘겨워 했다. 열차가 터널에 진입하기 직전이면 빠른 동작으로 차창을 닫아야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탄 연기와 까만 분진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터널이 워낙 길다보니 창 틈으로 새어 든 매캐한 연기 냄새로 인해 한바탕 고역을 치러야 했다.

 열차가 터널을 빠져 나오면 곧바로 사거리역이었고 이곳에 도착하여 역사개찰구를 통과하면 그 때 어린 마음에 역 이름 그대로의 널따란 사거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거리가 사통팔달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수년이 지난 뒤에 알았고 호남선이 복선화 되고 새로운 역사가 지어지면서부터는 백양사역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져 있었다.

 사거리의 한 농가 주택에 세를 들었던 큰형 내외가 장작 때는 부뚜막에서 밥을 짓고 작두샘물을 마시면서도 신혼 기분에 알콩달콩 살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두 분은 어느 새 노년기가 되었다. 지금은 자식 걱정에 맘 편할 날이 없는 것 같아 보이니 돌아보면 인간사가 한순간이요 그저 꿈결같다는 것을 아마 당신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거리 시가지.

 

 사거리를 빠져나와 드넓은 장성호를 내려다보며 왼쪽으로 꺾어 들면 남창계곡이 시작된다. 깎아지른 절벽 밑 자갈밭으로 맑은 물이 흘러 여름이면 인근 광주사람들의 훌륭한 피서지가 된다. 광주에 살면서 80년대 중반 나도 가끔씩 피서를 왔었으니 근 20여 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셈이다. 운치 있었던 주변 풍광은 크게 변한 게 없으나 향수를 자극하던 비포장길이 번듯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어찌된 일인지 널따란 주자장에는 달랑 내 차 한 대 뿐이다. 날씨 영향이 크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전남대 임업수련원이 있는 곳까지 차로 올라갔을 것이다.

 계곡 안으로 들어선지라 산과 산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만으로는 날씨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장성호로 흘러드는 황룡천을 지나면 남창계곡으로 이어지고 입암산 초입이 된다.

 

 

폭우 속의 산행

산행은 10시 40분 경부터 시작되었다. 발아래 저 밑으로 흐르는 제법 거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40여분을 걸어 올라왔으나 사람이 없다. 그러나 등산로는 잘 닦여있는 편이었다. 때로 울창한 숲 사이를 걸을 땐 초저녁처럼 컴컴하여 잠시 불길한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잡초더미에 가로막혀 길이 끊겼다. 선명한 주황색의 하늘나리 몇 포기가 방황하는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도 길이 있겠거니 하며 희미한 흔적을 따라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니 다시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얼마 후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정읍 10Km’라는 엉뚱한 표지판이다.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잘 잡으면 새로운 등산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잔뜩 구름 낀 하늘에 정상부근도 보이지 않고 음산해 진 분위기로 하여 도무지 자신이 안 선다. 다시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초입 갈림길에 세워진 등산로 표지판을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내 직감으로만 행동하는 바람에 결국 1시간 정도를 허비하게 된 셈이다.

 되돌아 가 표지판을 다시 보니 분명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방향을 잡고 정상으로 향한다. 이미 12시를 지나고 있다. 산성 남문 터에서 내려오는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몇 사람 정도는 만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엉뚱한 길로 가버린 것이었다고 새삼 후회를 해 본다. 비가 오기 전에 가능한 빨리 올랐다 하산해야겠다 싶어 속도를 낸다. 주변 나무들이나 풍광에 눈길 줄 겨를이 없다. 바위들이 많은 능선 앞으로 돌로 쌓은 산성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불어 난 물 때문에 없어져 버린 길을 요리 조리 돌 끝을 밟아 이동하며 남문 터에 오르니 후둑후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바로 곁에 석성 보수공사용 간이 텐트가 있어 잠시 비를 피한다. 며칠동안 작업을 쉬었는지 취사도구며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입암산성(笠巖山城)은 삼국시대에 축조해서 이후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개축하여 사용했다 하는데 고려 말에는 대몽 항전지로, 조선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과 대치하며 격전을 벌인 요충지였다.

 쉬는 김에 스스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비가 뜸해진 틈을 이용하여 다시 길을 재촉한다. 정상 방향으로 20분 정도를 걸어 오르면 북문 터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계속 걸어도 산중 평지가 계속된다. 신기하게도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할 정도로 넓은 분지가 산성 안에 있었다. 사방의 산들에 에워싸여 아래에서는 전혀 감지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절묘한 요충지가 산중에 있는 셈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안에 연못이 9개에 샘이 14군데나 있었고 각종 무기와 군량 7,000석 이상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자의 유교를 숭상하는 갱정유도(更正儒道) 교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며 최근 1987년까지 마지막 한 가구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 데 과연 그럴만한 숨겨 진 땅 이었다.

 

 빗줄기가 점차 세어지고 있고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오리무중이고 더 이상의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결국 더 이상의 산행은 무모하다는 판단아래 하산을 결정하다. 이런 상황에서의 단독산행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더욱 조심하게 된다. 다시 남문터로 내려 와 비닐천막으로 하늘을 가린 간이텐트에서 사과 한 알을 씹으며 시장기를 달랜다. 도시락을 준비해오긴 했으나 도저히 먹을 분위기가 아니다. 한 두시간 더 참고 완전히 하산하여 차분하게 식사할 생각이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 진다. 결국은 우의를 꺼낸다. 배낭 속에 항상 넣고 다녔지만 거의 사용해 본 일이 없었다. 훌러덩 뒤집어쓴다. 지금의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본다면 아마 한 때 떠들썩했던 무장공비와 같은 틀림없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 퍼붓고 수시로 천둥을 동반한다. 산에 올랐다가 국지성 폭우와 벼락을 만난 사람이 우산을 쓰고 한쪽에 피해 있다가 그 우산 땜에 벼락을 맞았는데 다행히 죽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벼락 그 자체가 2억 볼트에 해당하는 전압이어서 500와트 짜리 가로등 800개를 8시간 켤 수 있는 전기량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그런 벼락을 맞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사고는 예고 없다 하지 않았는가. 나도 이미 산에 들어와 있고 보니 큰 나무 밑을 지날 때와 오른 손에 쥔 철제 스틱이 은근히 신경 쓰인다.

 

 그러나 6부 능선 정도의 숲길이고 보니 별일이야 있겠냐 싶다. 온통 빗소리와 천둥소리뿐이다. 등산화도 소용없이 신발 안까지 흠뻑 젖어 발을 내 디딜 때마다 절퍽 절퍽 소리를 내는 바람에 발이 무겁다.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빗속에 흠뻑 빠져 있는 상태인데도 오히려 후련하고 통쾌하다. 전혀 색다른 경험이다. 철철 퍼붓는 빗속에 오직 나 혼자인 그야말로 산중 유아독보(山中 唯我獨步)다. 혹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있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입구에 도달할 때까지 하산 길 40여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비는 그 때까지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비가 퍼붓고 있는 판국에 누가 산에 오르겠는가.

 믿는 것은 내 차 밖에 없었다. 차 밖에서 우비와 배낭을 벗어 신속하게 뒷좌석에 던져 넣고 잽싸게 운전석에 앉았는데도 그 사이에 옷이 흠뻑 젖는다. 유리창에 퍼붓는 비 때문에 밖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와이퍼 브러시를 작동시키며 순간 순간 비가 쏟아지고 있는 차창 밖 풍광을 본다. 차분한 상태이면서도 고독감이 엄습한다. 2시가 넘었다. 이제야 시장기를 느낀다. 몸을 비틀어 뒷좌석 배낭에서 찬밥과 반찬을 꺼내서는 꾸역꾸역 목안으로 집어넣는다.

 

 7년 전쯤 내가 2TV ‘생방송, 좋은아침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을 때 차분한 성격의 한PD가 여름 설악을 취재하겠다고 했었다. 맨몸으로도 만만치 않은데 그 무거운 촬영장비 둘러메고 참 고생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좋은 프로그램을 위한다는 것 때문에 말릴 수도 없었다. 며칠 후 돌아 온 그는 촬영기간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바람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낙담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정해진 날짜에 방송을 해야 했기에 빗속에서도 취재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단다.

 편집된 화면은 거의 비 내리는 모습 일색일 뿐, 고민 끝에 그는 프로그램 타이틀을 ‘우중설악(雨中雪岳)’이라 이름하고 그럴 듯 하게 꾸며 나갔다.

“그 친구, 그 때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

 

 입암산 남문터 옆의 성터 복원 현장 천막안에서 비에 젖은 옷을 손질하며...

 

 지금의 내 꼴을 보며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고 그 때문에 나로서는 우중입암이라는 신조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차안, 언제 그랬냐는 듯 햇빛이 쏟아진다. 비 끝이라서 인지 더욱 눈부시다. 힐끔 뒤돌아보니 저 멀리 입암산 정상의 형체가 완전히 들어 났다. 그냥 돌아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너무 준비 없이 나섰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비 흠뻑 맞고 고생했는데 다음에 다시 오라며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제기랄- .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절로 푸념이 나온다. 잇몸이 좀 더 부어오른 것 같고 여전히 욱신거렸다. 오늘은 아무래도 뭐가 좀 헛갈리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 치과는 모두 문을 닫았고, 동네 약국에서 소염제와 진통제를 사 먹고는 그대로 긴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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