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밭을 지나 무령고개로
나처럼 거의 혼자만의 산행을 즐기는 회사의 재원관리부장이 자신의 산행경험을 참고해서 가끔씩 나에게 다음 등산지역을 권해 주곤 했다.
“다 다음주일 정도에 장안산에 한번 가 보시죠”
“장안산이요? 어디에 있는 산인데요?”
“장수에 있어요. 거기 억새가 볼만하거든요”
“그래요? 어떻게 가야 됩니까?”
“장수 가셔서 무령고개라는 곳까지 차로 가시고, 거기에서 두어 시간 정도 걸으면 되요. 등산로도 완만해서 아주 좋고, 아무튼 거기 억새가 아주 좋아요”
“억새가 많은가 보죠? 괜찮은데… 그런데 장수 쪽이면 높은 산악지대일 것 같은데 산행 길이 괜찮은 가요?”
“정말 좋아요. 그러니까 가족 산행하는 사람들이 잘 옵니다”
장안산 행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10월 중순의 장수 들녘은 너무 평온하였다.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은 사과밭에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빨갛게 매달려 있어 풍요로운 가을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사과하면 흔히 대구나 영주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재배지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곡성과 예산사과가 등장하더니만 지금은 장수사과가 유명해 지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때에 따라 품절현상까지 빚어질 정도로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장수 사과는 주로 해발 450~500m 정도의 고산지대에 재배되면서 일교차가 큰 기후 특성 때문에 착색이 잘 되고 당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와 사과와 연관지어 가을이면 항상 생각나는 곳이 있는데 경북 풍기에서 부석사로 가는 도로 주변의 사과밭이다. 내가 취재 때문에 전국을 뒤지고 다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여행지를 한 곳 추천해 달라고 가끔씩 물어오곤 하는데 그 때마다 주저 없이 대답하는 곳이 영주 부석사(浮石寺)다. 그러나 그냥 영주 부석사만 보고 오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길이 편해졌지만 죽령에서 바라보는 황금색으로 변한 널따란 풍기들녘이 압권이고 고개를 넘어 풍기읍내에서 인삼 구경을 하고 부석사로 향하면 부석사 입구까지 산과 밭을 지나며 좌우로 끝없이 전개되는 붉은 사과밭의 행렬을 만나게 된다. 가을의 풍요로움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정겨운 풍광에 감탄하면서 우리 땅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지게 된다. 주로 부석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영주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3% 정도를 차지할 만큼 양이 많다 보니 재배면적 또한 그만큼 넓다는 의미가 된다.
부석사에 들어서게 되면 거기에서 만나는 노오란 은행나무 터널의 아름다운 분위기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되고 석양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책제목처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멀리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면 당신께서 표현한 것처럼 정말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서산으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차분해지고 감회가 새로워지지만 특히 여러 가지 형태의 곡선으로 교차되는 아름다운 소백산 줄기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뭔가를 대상으로 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심연으로부터의 충동을 느끼게 되고 바라보는 이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극도로 차분한 느낌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영주 부석사를 찾는 사람이면 석양 무렵에 그 곳에 당도하거나 그 때까지 머무르기를 나는 권한다.
장안산 갈대밭 일부. 긴 능선을 따라 갈대밭이 장관을 이룬다. 저 멀리로 덕유산이 보인다.
이 즈음 장수의 사과밭도 적당히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장계면 소재지를 벗어나 무령고개로 가는 길은 잘 닦여있는 풍광 좋은 산간도로다.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30년 전으로 돌아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정도로 때묻지 않은 정겨움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객석에 앉아있는 구경꾼 같은 존재일 뿐이다. 네가 보기에 그렇게 좋다하니 이곳에 들어와서 한번 살아 보라 한다면 나는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물론 이미 도시생활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어 산간오지의 생활이 답답하고 외롭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농사와 같은 경제적 생산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뙤약볕 밑에서 허리가 굽도록 일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한숨뿐이라는 것을 나는 채소나 과일을 살 때마다 피부로 느끼고 있다. FTA협정 때문에 현실은 더욱 그렇지 않은가. 장안산을 찾아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도시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무령고개로 올라서기 전 왼쪽 편으로 논개 생가를 복원한 유적지가 있어 지나는 이의 발길을 잠시 붙잡는다. 원래의 생가터인 장수 계남면 대곡리는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커다란 담수호가 여기에 만들어지면서 수몰이 되었고 그 때문에 보다 위쪽인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여 지난 1998년에 복원해 놓았다. 산자락의 넓은 공간에 전시관 같은 부대시설과 합하여 큰 규모로 꾸며 관광지화 시켜 놓았는데 아직은 너무 오지라는 이유 때문인지 찾는 이의 발길이 뜸하다.
장수군은 최근 사과 재배면적 확대와 함께 경주마 육성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논개가 태어난 충절의 고장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논개축제를 크게 벌여 관광객을 끌어 모으려 노력하고 있다.
어떻든 장수는 우리나라에서 몇 남지 않은 청정지역이라는 점에서 그 잠재력이 풍부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출렁이는 억새밭
여기가 해발 800m쯤 되는 것일까. 무령고개는 그 정도의 높이에 위치해 있었고 찾아드는 등산객을 예상해서 인지 상당히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지지계곡이다. 주변에 맑고 깊은 계곡과 기암괴석 그리고 숲이 울창하여 가을보다는 여름에 찾아드는 피서객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10시가 채 안되었다. 직장의 산행 모임인 듯 20여명 정도가 먼저 도착하여 또 다른 사람과의 합류를 기다리는지 모두가 고개 아래쪽을 응시하며 마치 나를 기다리는 듯 웅성거리며 서 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다. 억새를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너무 오지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장소를 택하여 울긋불긋한 단풍구경을 가서인지 의외로 등산객이 적다. 등산안내판에는 왼쪽으로 높이 1,297m의 백운산이 4Km에 3시간, 오른쪽으로는 장안산이 3Km에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적혀있다.
멀리서 본 산의 육중한 덩치에 비해 등산로는 무척이나 여성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탄하고 잘 정리되어있어 참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햇빛이 맑고 투명하여 마음은 가볍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키를 넘는 산죽나무 터널을 지나는 맛이 각별하다. 가족이 산행하면 좋을 것이라는 회사 재원관리부장의 표현을 실감한다.
숲길을 30분 정도를 걸으면 동쪽 능선으로부터 한눈에도 시원스런 널따란 초원지대가 나타나고 저 남쪽 끝까지 하얀 억새의 물결이다. 그야말로 하얀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다. 장관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나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모습인 것만은 사실이다. 왜 이렇게 널따란 곳이 나무가 자라지 않고 억새가 지천인 평평한 초원지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산불이라도 났던 것일까. 아니면 바람 때문일까. 오래 전에 가본 장흥 천관산 정상 부근도 이런 억새 밭의 장관이었다. 억새는 어깨 높이 정도의 키로 자라는 게 대부분인데 이 곳 장안산의 갈대는 내 키를 넘기는 것들이라 특이하다.
억새는 해를 마주보며 봐야 바람에 너울거리는 은색의 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역광을 이용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념 촬영을 하면서도 햇빛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단순히 억새 앞에서만 촬영하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야가 툭 터진 넓은 능선을 지나는 기분이 더없이 좋다. 이런 넓은 평원의 억새를 두고 옛사람들은 광평추파(廣坪秋波)라 했다. 넓은 들판에 너울거리는 가을파도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파도 자체가 주는 이미지가 파란색깔 이고 보니 나로서는 지금의 저 모습처럼 은색의 물결이라는 용어가 오히려 더 어울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광평은파(廣坪銀波), 아니면 가을바람에 일렁거리며 춤추는 물결이란 의미에서 추풍은파(秋風銀波)란 사자성어를 만들어 쓰고 싶어졌다.
잠시 뒤돌아보니 저 멀리에서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하얗고 누런 산 능선에 그들의 옷차림은 그대로 꽃이 되고 단풍이 되었다.
긴 행렬을 이루며 정상을 향해 오르는 등산객들.
정상에 거의 다 다를 무렵에 어느 정도의 급경사가 있을 뿐 장안산은 생각밖에 편안하고 정겨운 산이었다. 정상은 비교적 면적이 넓은 평지였다. 헬기장과 함께 높이 1,237m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정상 한 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다. 비교적 편하게 올라왔지만 나로서는 근래 드물게 찾아 온 높은 산이 된다. 함양 쪽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인지 한쪽으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나누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새 12시가 지나있다. 시장기를 느끼진 않았으나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이 초라해 보이고 동정심마저 들게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지라 하산 길에 적당한 장소에서 편하게 먹겠다며 바로 돌아선다.
장안산이라고 음각한 표지석 옆에서 기념 촬영을 끝내고 마악 발길을 돌리려는데 점심을 나누는 일행 중의 한사람이 나를 불러 세우며 막걸리라도 한잔하라며 권한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대전 구봉산에서도 혼자 걸어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떤 산악회원들의 간식 파티에서 어떤 이가 불쑥 고기 좀 먹고 가라고 권했었고 진안 내동산에서는 60대 초반의 어떤 이가 피로를 풀며 가라고 알사탕 두 개를 손에 쥐어 준 일이 있다. 산에서의 그런 호의는 유독 정겹고 고마운 것이었다. 마치 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바람 없이 이렇게 베풀어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그 때마다 느끼는 게 많았지만 나로서는 아직 그런 호의를 상대방에게 자주 베풀어 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늘 잊다. 기껏해야 길을 묻는 사람에게 조금 친절하게 답을 해주는 정도였을 뿐.
나는 부지런히 내려서고 있는데 그 때서야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룹을 이루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드문드문 산을 오르고 있다. 실지로 아이들과 함께 장안산을 찾은 가족들의 모습도 볼 수 있어서 퍽 행복해 보였다.
하산길에 떠오르는 상념들
등산로 초입까지 거의 다 내려와서야 저 멀리 대곡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서 늦은 점심을 들다. 그리고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기다란 의자에 누워 잠시 단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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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微)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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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높아 보인다. 그 파란 하늘에 그리운 모습들이 그려졌다 지워지고 다시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모습들. 나는 그리 살고 싶었는데…… . 바람이 간간이 지나면서 살갗을 간지럽힌다. 이제 그만 상념에서 깨어나라고.
갈대밭을 지나는 아내.
귀로에는 장수, 진안 쪽을 택하지 않고 임실의 비행기고개를 지나 전주로 빠져나가는 719번 지방도를 택한다. 언젠가 한번쯤 지나쳤던 것 같지만 대부분 생소하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겨나는 가을 색 짙은 시골의 정취가 마냥 정겹기만 하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그래서 가을이면 누구나 성숙해지고 의젓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전주에 다 와가면서 어느 정도 피곤함을 느낀다. 오늘 산행을 나서면서 예정했던 것처럼 죽림온천으로 들어선다. 전주에서 지척인데다 물이 좋다는 것으로 소문이 났고 보니 주차장은 외지 차를 포함하여 각양각색의 차들로 넘쳐난다. 이용요금이 5천원인데도 운동장 같은 탕 안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입욕객들로 북적댄다. 대부분은 요즘 유행하는 반신욕을 하는 자세로 조용히 물 속에 들어앉아 있고 황토, 보석사우나 같은 곳에 들어 가 인위적으로 땀을 빼는 사람, 넓은 냉탕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들대로 저들 나름대로 물장난을 치며 소란을 피운다. 넓은 공간 안이 마치 시장바닥 같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는 오늘 하루 일과를 차분히 되돌아본다. 차를 이용해서 가고 싶은 산을 찾아 등산을 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서 온천욕을 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아닌 것이지 자문해 본다. 나는 그저 자연과 어울리며 자연과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결코 자연을 즐기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행여 그것이 자만일지도 모르겠다는 자문도 함께 해 보는 것이다.
죽림온천수는 유난히 미끈거려 유황성분이 특별히 많은 것 같고 더운물 속에 몸 담그고 있으면 아무래도 피로가 쉬이 풀리는 것 같아서 사람 많이 모이는 다중지역을 싫어하는 편인데도 산행 후에 가끔씩 이용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내가 이용해 봤던 어느 온천보다도 가장 수질이 좋은 것으로 판단되어 어떨 때는 일부러 산행지역을 이쪽 방향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산은 나에게 언제나 의연하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누구에게나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는 것도 일깨워 준다. 더운물 속에서 지긋이 눈감으며 계속 생각에 잠겨본다.
그러던 중에 영화 ‘삼사라’에서의 보았던 선문답 한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
“한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 ………… ”
(바다에 던져 버리면 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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