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단풍 2제(二題) - 대둔산/내장산

소나무 01 2009. 12. 26. 00:26

 

  가을산의 유혹

 전라북도의 단풍은 단연 대둔산과 내장산을 꼽는다. 시월에 접어들면서 올해도 예외 없이 대둔과 내장의 단풍 얘기가 이곳 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한적한 산골을 찾아서 가는 가을을 그저 조용히 음미하겠는데 가을만 되면 언제나 요란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대둔산과 내장산을 그동안 빼놓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TV와 신문 같은 것에서만 이곳 단풍소식을 보고 들었을 뿐 전주에 내려와 있는 동안 내 눈으로 직접 이 두 곳의 가을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혹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이 두 군데의 단풍 얘기를 내게 물어오면 대답이 궁색해지는 점도 없지 않아 결국 단풍산행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도 2003년 7월부터 주 5일제 근무가 실시되면서 토요일에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았다. 시월도 하순, 한창 단풍철의 피크이고 보니 방향을 정한 대둔산도 오늘이 토요일이란 것과 관계없이 많은 관광객들로 붐빌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서두른다고 했으면서도 전주를 빠져 나와 고산을 지날 때에는 이미 8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대둔산 산행은 빨라야 8시 40분부터라야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를 때는 몰라도 정상에서 내려 올 때부터는 올라오는 사람들 행렬에 치어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한다는 예상을 해 야 했다.

 

 가능한 차를 빨리 몰았다. 사람들 등살로부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면서 완주군 경천면을 통과할 즈음에 오른쪽으로 ‘화암사 입구’라는 푯말이 스칠 듯 눈에 들어온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가 얼마 전 저녁자리에서 만난 지역신문 김영애 기자의 말이 번뜩 생각이 나 차를 급히 세운다. 내가 주말이면 혼자서 주로 산행을 한다하니 화암사를 한번 가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호젓하고 고즈넉하여 마음에 들 것이라고 하면서.

 순간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가는 길인데 잠시 화암사를 들렀다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나치고는 돌아오는 길에,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음 기회에 올 것인가를.

미루지 말고 기회가 되었을 때 실행하자는 결론이었다. 한 두 시간 늦어서 사람들에 치어 고생하더라도 느긋하게 대둔산에 오르기로 하고 그대로 후진하여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길은 포장되어 있으나 겨우 차 한 대가 드나 들 수 있을 정도의 협소한 편이었으며 사람들도 눈에 띠지 않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집집마다 곶감을 만드느라 감을 깎아 줄에 꿰어서는 기다랗게 매달아 놓았다. 줄줄이 늘여 뜨려 놓은 주황색의 감들이 보기에 좋았다. 몇 집 건너마다 집 마당에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감 깎는 기계를 돌리면서 속살이 들어 난 감들을 멍석 위에 잔뜩 쌓아가고 있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곶감 만드는 모습이었다.

 이곳 완주군 고산면과 동상면 일대 산야에는 감나무가 지천이어서 곶감 생산지로서는 경북 상주와 함께 으뜸이었다. 이곳 산골사람들에게는 주된 생업이 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힘들고 고역스럽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차에서 내려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싶고 기념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취재하는 것도 아니고 보니 아줌마들에게는 그런 내 모습이 호사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겠다 싶어 아예 포기해 버린다.

 샛길로 접어들어 10분쯤 왔을까? 화암사 주차장일 듯 싶은 곳에 차를 세우고는 카메라만 둘러메고 서둘러 걸었다. 화암사 가는 길은 김 기자 말대로 오랜만에 대하는 참 좋은 느낌의 오솔길이었다. 계곡의 물은 말라 있었지만 주변엔 거의 활엽수들로 들어 차 여러 색깔로 물든 나뭇잎들의 단풍이 여간 곱지가 않았고 바닥에 적당히 떨어져 있는 낙엽들로 인하여 깊은 산의 가을 운치를 더 하고 있었다.

 또 한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어디에서 끝날지 모르겠지만 사찰로 이르는 길이 시멘트 포장길이 아닌 정감 넘치는 오솔길이라는 점이었다. 사그락~ 사그락~ 흙과 낙엽을 밟는 발의 감촉이 여간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독특한 건축양식의 화암사

주차장에서 잠시만 걸으면 금새 나타날 것 같았던 화암사는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행인데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도대체 가늠하기가 힘들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와 나의 가쁜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암벽으로 이뤄진 협곡을 지나 이후 물이 떨어지는 작은 폭포 쪽으로 난 급경사의 철계단을 오르고 난 20여 분 후에야 코앞으로 절문이 나타난다. 우화루(雨花樓)다. 이곳에서 비가 내리면 그 모습이 꽃비처럼 보이는 것일까? 석가가 성불할 때 꽃비가 내려 우화루란 이름이 널리 쓰였다는데 오래 된 육중한 느낌의 나무기둥과 함께 마음을 끌어당긴다.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런 좁고 닫힌 공간에 절집을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난리를 피해서였을까?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그럴 만은 하였다.

 인기척이라고는 뭔가를 준비하는 오십대의 표정 없는 보살 한사람이 처음 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쁜지 낯선 사람이 찾아들었는데도 눈길 한번 주질 않는다. 이 곳의 낮은 유난히 짧을 것이 뻔했다. 아마도 오전 11시쯤에 해가 보이면 3시쯤에 해가 사라질 것 같았다. 참 답답한 공간에 절을 지었다는 생각이 계속 따라 다녔지만 건물들은 하나같이 고풍스러워 정감이 갔다.  

 

완주군 경천면의 화암사 우화루. 단청이 없어 그야말로 고색이 창연하였다.                            

 

 이곳 화암사 극락전이 한국 유일의 하앙구조라는 설명이 독특하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공포 외에 하앙(下昻)이라는 또 하나의 지붕 부재가 쓰여진 것으로 서까래를 밖으로 길게 뺄 수 있게 한 백제계 건축 양식이라고 하는데 고려 이후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이 집 외벽 밖으로 나와 있어 중국 남부 지방과 같은 강우량이 많은 지역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비가 꽃처럼 보인다는 앞쪽의 우화루와는 특별한 상관 관계를 갖는다.                                                                 

 

화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하앙구조.공포 위에 기둥을 덧대어 서까래를 길게 뺀 백제 특유의 양식을 보인다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의 불명산 화암사(花岩寺)는 통일신라시대 처음 세워지고 두 번에 걸쳐 소실된 후 1605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은 대둔산 산행이 목표이고 보니 언제고 다시 오리라는 마음 안으로의 기약만 한 채 서둘러 나선다.

 

 

현란한 색채의 대둔산

그럭저럭 한시간 이상을 지체하여 대둔산 주차장에 차를 댄 것이 오전 10시가 지나서였다.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른 듯 버스와 승용차들로 넓은 주차장이 가득 찼다. 멀리 산 정상에서부터 아래로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어느 새 깊은 가을 속에 빨려들어 와 있음을 느낀다.

 해발 838m의 대둔산(大屯山)에는 대략 600m 정도의 높이에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산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등산로는 나 같은 사람에게 조용히 할애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웬걸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이 정도의 등산객 숫자라면 케이블카 타는 순서를 기다리는 것에만 아마 1시간 이상은 족히 기다려야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아름답게 물든 나뭇잎들을 바로 눈앞으로 구경하며 발길 닿는 대로 여유 있게 산행하는 것이 단풍 관광객들에게는 오히려 현명한 판단일지 몰랐다.

 어떻든 나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떠밀리듯 산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케이블카 탑승장을 조금 지나면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유적비’라는 거대한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주의 서예가 여태명 선생이 쓴 독특한 한글서체다.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 톨게이트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한옥형태로 지어진 멋들어진 요금소 건물을 보며 칭찬을 하고 건물 가운데 커다란 현판에 '전주'라고 쓰여진 독특한 서체에 또 한번 칭찬을 보내는데 그 글씨체가 여태명 선생의 솜씨다. 대둔산 초입은 임진왜란 때도 왜군과 싸운 격전지였다는데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이 일본과 관군에 말려 이곳까지 내려 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고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예상대로 가파르다. 거의 암석으로 형성된 산이고 보니 등산로는 수많은 돌계단의 연속이다. 약수 떠 마시며 목을 축이면서 적당히 쉬어갈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 조금 쉴만한 곳이면 휴게소랍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터를 잡아 생수와 어름과자, 칡즙 같은 것을 비싸게 판다. 깜빡하여 물병을 잊고 산에 올랐다. 땀을 꽤 흘리게 될 것이고 갈증도 만만치 않을텐데 그래서 뭔가를 사야되지 않을까 싶어 잠시 망설이다가 단련하는 셈치고 하산 때까지 물을 참기로 마음먹는다.

 급한 경사의 수많은 돌계단을 오른다. 숨을 몰아 쉬며 가끔씩 뒤돌아보면 그림 같은 산 능선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저 아래로 금강구름다리가 바위 봉우리와 바위 봉우리 사이를 절묘하게 이었고 사다리처럼 세워진 철계단이 아슬아슬하다. 사람들은 스릴을 느끼면서도 보다 편하게 산을 오르고 있음을 본다. 햇빛을 받은 고운 단풍잎들이 투명하게 빛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 경사진 등산로를 가쁜 숨 몰아 쉬며 걷고 있지만 대신 좋은 경관으로 당신에게 보상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대둔산의 단풍이 이리 곱구나!”

 이젠 누구를 만나더라도 파란 하늘과 기암괴석과 잘 조화를 이룬 대둔산의 가을을 빠뜨림 없이 잘 표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쯤인가에 약수터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정상 가까이 오는 동안 찾을 수가 없었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가서 한꺼번에 마시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발 밑만 살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다. 허리띠에 붙어있는 시계를 들춰본다. 산행 때에는 거추장스러워 손목시계를 차지 않는 편인데 아직 12시가 채 안되었다. 1시간 30분 정도를 오른 것 같다. 눈앞으로 정상에 서 있는 기념탑이 보인다.

 

대둔산의 가을 단풍. 한 폭의 채색 산수화 그대로의 풍광이다.

 

 산 정상은 마천대(摩天臺),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뜻으로 원효대사가 이름 붙였다고 한다. 우뚝 서있는 기념탑은 스테인리스 소재를 이용해 10m 정도 높이로 만들었는데 개척탑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사연을 읽어보니 1970년에 완주군민들이 자재를 직접 운반하여 콘크리트 탑을 만들어 개척탑이라 이름하고는 대둔산의 상징으로 삼았다는데 이후 1989년에 스테인리스로 덧씌웠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던 1970년 당시로서는 개발과 고속성장이 최대 목표였으니 ‘개척’이라는 이름을 이곳에 사용한 것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드넓은 개간지도 아닌데 꼭 산꼭대기에 이런 탑을 세웠어야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소재도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어서 굳이 필요하다면 자연스런 돌탑 같은 것으로 교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상에서 보는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단풍은 힘들게 올라 온 피로를 일시에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사방으로 보이는 산 능선들이 절묘하다. 마이산, 천등산, 덕유산, 계룡산… 다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름 있는 산들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런데 대둔산 남쪽으로는 경사가 급하고 다양한 형태의 바위 봉우리 군상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산 북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북 완주군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는 가파르고 험한 편이며 충남 논산군 쪽에서 올라오는 코스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편이었다. 산행하면서 승용차를 갖고 다니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어 언제나 그게 불편하다. 북서쪽의 안심사 방향으로 내려가면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 듣긴 했지만 언젠가 또 다른 기회로 미뤄야 했다.

 

 내려서면서 사람들의 행렬을 피해 단풍이 고운 나무 그늘을 어렵사리 찾아 내서는 배낭을 내리고 시장기를 때운다. 홀로 조용히 산행을 하는 것은 좋으나 상대 없이 혼자 밥 먹는 것만큼은 옆에서 보기에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구태여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있겠는가 싶어 혼자만의 전망이 확보된 좋은 공간을 찾게 되는데 대둔산은 그게 쉽지 않았다.

 반찬으로 오이김치를 가져 온 덕분에 그런 대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연일 술로 찌든 편이어서 시원한 국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이런 때는 떨어져 지내고 있는 아내 생각이 절로 나곤 한다. 그래도 산은 언제나 변함 없이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산 안에 감춘 단풍의 바다

일주일 후 아내가 내려 왔다. 내장산 단풍을 둘 다 본격적으로 본 일이 없어 산행을 약속한 것이다.

달이 바뀌어 11월 첫 주말이었지만 아직 내장산은 단풍이 절정이라는 소식이다. 역시 아내는 달랐다.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준비하면서 도시락을 챙겼다. 내장산은 대둔산보다 분명 더 북새통일 것이다. 그래서 서두른다 했으면서도 아내와의 출발은 언제나 늦기 마련이었다.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한참을 달려도 차도가 한산하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 넘어서고 있다.

“히야, 그래도 서두른 보람이 있네.

사람들이 한 10시 정도부터나 몰려오겠지?

조금 일찍 오길 잘했네. 오더라도 아마 정읍시내 쪽 길로 올 거야.

우리가 이쪽으로 오길 잘했어.

오늘 날씨도 좋고-”

아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혼자 신이 나서 이 말 저 말 해 대며 쾌재를 불렀다. 진입로가 온통 주차장으로 변했다느니 전국에서 모여 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느니 하는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인 TV뉴스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웬걸 고개 하나를 넘어서니 앞쪽으로 이미 많은 차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내장사 입구까지는 아직 먼 거린데… 다른 뭐가 있는 모양이지?

조금 있어보지 뭐”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계속 가는 거지. 정체가 아니라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은데… ”

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차량 증가로 인한 정체 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찔끔 찔끔 움직여 20여분쯤 진출하니 멀리 정읍 쪽에서 오는 차량들의 긴 행렬들이 보인다. 그 쪽 방향 행렬도 거의 움직임이 없다. 두 길이 어딘가에서 만나는 삼거리에서 심한 병목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아예 차를 포기하고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얼마나 걸어가야 해?”

아내도 이미 걷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나도 모르지. 한 20~30분 정도만 걸으면 되겠지 뭐”

 어차피 서 너 시간은 걸어야 할 텐데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고 길가 적당한 빈터에 차를 세우기로 작정한다.

 아예 걷기로 한 판단은 잘 한 것 같았다. 생각한 데로 대략 20여분을 걸으니 서래봉 입구 등산로가 나타난다. 그 때까지도 차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 채 모두 그 자리에 서있다. 바로 못 미처에 식물원과 동학혁명기념탑이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정읍 고부에서 출발한 동학군이 우군치를 넘어 전라도 땅에서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하는데 대둔산 산행 초입의 기념탑과 함께 비슷한 느낌을 준다.

내장산 집단시설지구가 있는 곳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내장저수지가 있고 제2주차장이라 부르는 이곳부터 산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정했다.

 

 농사 도구인 써래처럼 생겼다 하여 서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관리사무소 쪽으로는 벌써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곳 서래봉 입구 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산을 오르고 있다. 대개가 대여섯 명 정도에서 10여명 정도까지의 그룹 등반이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등산을 좋아했을까. 아마도 단풍을 눈으로 확인하고 즐기겠다는 일시성 등산객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산을 선택하여 찾아 온 사람들이고 보면 모두들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들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지 않을까 여겨진다.

 초입의 10여분 정도를 제외하면 서래봉 등산길은 대부분 경사가 급했다. 거의 정상부근에 이르러서는 급경사를 이룬 사다리 형태의 철계단이 많아 계단을 오르면서도 중간 중간에 잠시 쉬며 가쁜 숨을 돌려야 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지 어떤 곳은 왕복으로 두 개의 사다리 계단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쉬엄쉬엄 1시간 정도를 올라 드디어는 622m 정상에 서다. 올라 올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왜 내장산 단풍을 으뜸으로 꼽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발 아래로는 그야말로 곱디고운 단풍의 바다다. 저 아래 내장사는 분지 형태의 한 가운데 자리한 듯 하고 내장사를 중심으로 여기 서래봉을 비롯해서 연자봉, 신선봉, 망해봉, 불출봉 등의 그만그만한 봉우리들이 한 능선을 이루며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능선을 타고 한바퀴를 돌면 내장산 단풍의 원경을 실컷 구경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뒤쪽으로는 내장저수지가 맑은 하늘 때문에 더욱 푸르러 보이고 멀리 정읍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래본 정상부에서 내려다 본 내장사 원경.

 

 서래봉 자체가 워낙 뾰쪽한 형태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머무를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비좁은 어느 한 곳을 택해 끼리끼리 점심상을 벌여 놓기도 했지만 편한 자세들이 아니어서 어줍잖은 모습들이다. 아내와는 좀 더 내려와 비교적 한산한 곳에서 신발 끈을 풀고 편한 식사를 즐기다.

 먹으면서 주변 경관을 음미한다. 단풍은 그저 빨강과 노랑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색깔로 아기자기한 형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 고운 단풍을 긴 능선의 울타리 안으로 감추고 있으니 내장산(內藏山)이라 이름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단풍을 보고 싶고 단풍터널도 봐야 할 것 같아서 관리사무소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올라왔던 등산로에 비해 반대 방향이 되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훨씬 수월하다. 나무들도 각종의 활엽수들로 차있어 단풍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와! -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내도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다.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나무 전체가 노란색으로 변한 사람주나무는 수형 자체도 아름답지만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비치는 노란 나뭇잎들이 거의 환상적이다. 넓은 나뭇잎 자체가 아무런 흠집도 없이 너무 깨끗하고 예쁘다. 한 때 우리나라 떡갈잎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그들의 찹살떡(모찌) 포장재료로 각광을 받았다고 하는데 문득 그 생각이 난다.

“저 잎을 몇 장 따다가 하얀 접시에 깔고 그 위에 음식 같은 것을 놓으면 보기도 좋고 맛도 참 좋겠다”

“아유 별 생각을… , 그럼 몇 장 따봐- ”

“아니,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

아내는 내가 별 생각을 다한다 하면서도 평소 산행에서 습관처럼 내 뱉는 말이어서 인지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내심 미안해하는 눈치다. 등산로보다는 정취 있는 산책로라 표현함이 좋을 정도로 느낌이 좋다.

 내장산에는 내장단풍, 아기단풍, 당단풍, 털참단풍 등 10여 가지가 넘는 단풍나무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봄이면 칼슘이 많은 단물을 제공하는 고로쇠도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다. 바람이 불면서 날개 달린 씨앗이 바람개비되어 멀리 퍼져 나간다.

 

 

서래봉을 내려 서며

단풍을 감상하며 전혀 지루함 없이 1시간 정도를 내려 와 벽련암(壁蓮菴)에 도착한다. 서너 명의 동자승들이 재잘거리며 암자 마당을 휘젓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여간 귀엽지가 않다. 어린아이 그 자체로 맑고 순수한데 머리 깎고 승복까지 입었으니 그리 맑고 순수해 보일 수가 없다. 배낭에서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는데 그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 요놈들 봐라, 금새 사라져 버렸네”

 귀여운 모습을 놓쳐 아쉬웠다. 그 때 눈을 들어 암자 뒤편을 보니 내가 올랐던 서래봉이 장엄한 모습으로 병풍처럼 서있다. 마치 닭 벼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논을 고를 때 쓰는 써래 그 모습이다. 어떤 이는 서역에서 달마스님이 이곳으로 건너 와 서래(西來)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보면 볼수록 써래에서 연유된 것임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오후 2시쯤, 평지에 내려서니 사람 물결로 넘친다. 단풍도 볼만하지만 사람들의 옷차림도 형형색색이어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 마음의 눈으로 단풍을 들여다보는 것일까. 시설지구 안의 단풍나무들은 거의가 인위적으로 심고 가꾼 것들이어서 인지 산에서 본 것들과는 느낌부터가 사뭇 다르다.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말이다.

 대둔산 가는 길에 들른 화암사에 우화루가 있었는데 여기 입구 호수 안에도 우화정(雨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단풍이라는 공통점과 입구의 동학기념탑과 함께 또 한번의 인연을 만들어 준다. 바람불고 비가 오면 단풍잎들이 꽃비가 되어 흩날릴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아름답다.

 들어오는 초입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갔으면 했는데 기다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어 아예 포기하고 계속 걷기로 한다. 하산코스를 반대방향으로 잡은 바람에 차를 세워둔 곳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은 족히 걸어야 할 것 같다.

 상가 음식점에도 사람들이 많다. 가만히 보니 전주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점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전주식당, 새전주식당, 원조전주, 원조새전주, 옛날전주… 해서 7군데가 확인된다. 그 가운데 원조는 딱 한 군데일텐데 말이다.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면 음식점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전주’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970여 개가 되어 랭킹 1위였고 다음이 ‘부산’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부산이란 상호는 대개가 횟집이었다는 통계발표를 전주 국제발효식품엑스포 측에서 내놓은 일이 있다. 전주의 음식 맛이 그만큼 자랑할 만하다는 얘기가 된다. 아이스크림, 산나물과 도토리묵, 동동주, 민물고기 튀김 류 등 갖가지 음식물을 파는 거리 행상들이 또한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도로를 따라 평지를 걷는 것은 무료하고 쉬이 피로하다. 입도 심심하고 하여 구운 은행 알을 산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봉지 하나로 4천 원을 받는다. 이 사람들도 오늘 같은 날이 대목일텐데 싸네 비싸네 할 것이 못된다.

 아내는 다리 아프다 하면서도 모처럼의 가을 나들이어서 인지 묵묵히 보조를 맞춘다. 산모퉁이를 돌고 나면 길은 다시 이어지고… 해서 얼만큼을 더 걸어야 할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그래. 아내와는 이렇게 언제나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라면 이 세상이 끝나고 또 다음 세상에서도.

오후의 가을볕이 따갑지만 그래도 만져질 듯 정겹고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