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내가 살아갈 땅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생활이 끝나면 어디에 안착할 것인가. 많은 생각 끝에 결정한 것은 역시 고향이었고 그래서 그 곳에 내가 살아야할 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구입한 땅의 위치는 미륵산이라는 듬직한 산이 뒤로 감싸고 있는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라는 곳이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 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 땅은 약간의 평지와 함께 소나무를 비롯한 이런 저런 나무가 자라고 있는 산지이고 그래서 앞으로 집이 들어서게 되면 적당한 넓이의 정원과 뒷산이 경계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땅을 사는 방법은 다른 사람과 좀 달랐다. 생전 처음 사 보는 토지이긴 하지만 중개업소를 통해 매물을 이리 저리 물색한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들어 온 땅을 나에게 팔도록 해 달라고 중개업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 곳이 지금의 미륵산 자락이다.
그러기까지에는 나름대로의 그만큼의 욕심과 수고가 있었다.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전주 인근을 수없이 뒤지고 다니며 소위 발품을 팔아야 했다. 나름대로의 기준은 일차로 도시와의 접근성 이었으며 주변에 적당한 인가가 서로 맞대어 있어서 너무 외롭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리고 산이 집을 받쳐주어 기댈 수 있도록 해 주고 마당에서 쳐다봤을 때 툭 트인 집 앞 풍광을 내 집 정원처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했고 집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지금의 터에서는 전주와 익산중심지까지를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고 10분 정도면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어 그런 대로 편리한 점이 있다. 바로 앞쪽 작은 야산하나 너머에는 넓은 금마저수지가 있고 새로 조성한 서동공원이 또 그 옆이며 지금은 복원공사 중인 한국 최고최대의 석탑이 있는 미륵사지와 백제 무왕 때 새로이 도읍을 정하고 천도했던 왕궁리 유적지가 인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해발 430m의 미륵산이 믿음직스럽게 받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륵은 장차 중생들을 구제할 내세불이니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지금껏 저질러온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 나도 구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인으로서의 바램도 있다.
내 터에서 가까이 있는 왕궁리5층석탑. 백제 무왕 때
도읍을 일시 옮겼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어릴 때의 미륵산은 불편한 교통으로 인하여 그저 먼 곳에서 쳐다만 보던 산일 따름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내가 마음을 붙이고 함께 살아야 할 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도로망이 많이 뚫리고 아무 곳이나 손쉽게 갈 수 있는 차가 나에게 생긴 이유도 있겠지만 그동안의 취재 생활을 통해 전국의 마을풍광을 수없이 접해 본데다 평소 산행을 즐겨했던 생활이 미륵산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미륵산은 차분하게 걸어도 40분 정도면 정산에 도착할 수 있다. 광활한 평야지대에 우뚝 서있어서 조망이 뛰어나다. 내가 주로 이용한 등산로는 내 집터에서 오른 쪽으로 난 오솔길이었는데 작은 계곡이 하나 있고 무성한 산죽밭이 있으며 바위 벼랑 밑에 위치한 사자사(獅子寺)를 지나 오르는 코스였다. 다른 코스를 이용해 여러 차례 올라갔으나 이 길이 늘 한적하여 마음에 들었다. 어느 비 개인 날 오후에 한번 올라갔더니 군산 앞 바다는 물론 멀리 부안 앞에 떠 있는 위도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한적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적당한 곳에 내가 살게 될 터가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며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더라고 잘 적응하면서 실아 보겠다는 생각이다.
미륵산자락에 터를 정하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식들 때문에라도 서울에 계속 눌러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어 수도권에서도 어느 정도 도시의 때가 덜 묻었다고 생각되는 곳을 자주 찾아다닌 편이었다. 우선 시간상으로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화성이나 당진군 일대를 겨냥해서 수 차례 현장 답사를 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머릿속에서 늘 떠나지 않는 곳은 고향 쪽의 미륵산 주변이었다. 마음의 평온함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서울과 익산과의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 때문에 매번 찾아갈 수 없는 형편이었고 보니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없었다. 인터넷 안의 부동산 정보도 너무 단편적이거나 부실한 것이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으니 나는 이를 호기로 삼아 주말이면 차를 몰아 미륵산 주변을 뒤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내 땅으로 만든 그 뒤부터는 서울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거의 주말마다 찾아갔다. 하루는 산에 가고 하루는 땅에 가고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주 5일제 근무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었다.
내가 기대어 살 미륵산. 누런 들녘이 끝나는 저 안쪽으로 터를 잡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익산시 금마면이 된다.
농사꾼은 못되지만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는 희열은 참 큰 것이었다. 제일 맘에 드는 것은 그 땅에 내가 좋아하는 제법 큰 자귀나무가 있다는 것이었고 군데군데 밤나무와 감나무 복숭아나무 같은 유실수와 함께 팽나무, 생강나무, 단풍나무, 쥐똥나무, 가죽나무 등등 여러 나무들이 크고 작은 형태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내가 소망하는 집
어떻든 나는 전주에 있는 사택인 아파트와 내 땅을 부지런히 오가며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담쟁이덩굴을 걷어낸다거나 나무들의 잔가지를 쳐낸다거나 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무성한 찔레나무 덩굴이나 미국자리공 같은 잡초를 쳐내는 일로 땀을 흘렸다. 미국자리공은 어찌나 번식력이 강하던지 내가 지쳐버릴 정도였다.
이윽고 새봄이 되자 전주에 있는 모래내 시장에 가서 상추와 고추, 호박 같은 채소의 모종을 구입해서 밭을 꾸미고 옮겨 심었다. 잡초가 무성한 땅을 괭이와 삽으로 파고 부드럽게 고르는 일은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평소 진정한 육체 노동의 경험도 없었거니와 농사요령도 터득해 놓은 게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단지 막고 뿜는다는 식의 의욕하나만으로 덤벼들었는데 단 5분만 삽질을 해도 팔이 아파 오고 땀이 쏟아져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심코 들어왔던 ‘땀이 비 오듯 한다’라는 표현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나무그늘에 앉아 준비해 간 도시락을 까먹고 곧바로 묘목시장에서 구입한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호두나무 자두나무 등 여러 과실나무를 심었다. 적어도 10년 정도 후면 튼튼한 유실수로 이 땅에 버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힘드는 줄 몰랐다.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갈 때면 작은 그릇으로 한 바구니를 따 모아 술 담그는 재미도 쏠쏠했다. 조금 지루하다 싶으면 산자락을 따라 산책을 하고 인근 마을에 들어 가 농가 살림살이도 살펴보고 그리고 산에도 오르고...
문제는 집을 짓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나의 집은 소나무로 지어진 통나무집이었다.
언젠가 제주도 여행 중에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이 있다. 방안 가득한 진한 소나무 향 때문인지 매우 기분이 좋았고 그 좋은 기분은 숙면을 취한 다음 날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때 마음에 둔 것이 소나무 집이었다.
거기에다 경북 봉화 땅에 사셨던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선생의 말씀에도 영향을 받았다. 오래되고 좋은 소나무에서는 분명 기(氣)가 있다는 것이고 향수의 나라 불란서에서 만들어지는 향수 중에서 가장 고급 향수로 치는 것은 소나무에서 뽑은 향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목조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소나무 재목으로만 지어졌다는 말씀이었다. 소나무에서 인체에 유익한 기와 향이 나오니 얼마나 좋겠는가.
전우익 선생님은 나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어 날 보시겠다고 전주의 방송국까지 찾아 오셨고 방송사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오면 나가도 되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쇠못하나 쓰지 않고 소나무로 직접 만드셨다는 작고 귀여운 책상을 하나 보내 왔다. 볼품은 없는 것이었지만 선생님의 정신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지금도 소중히 사용하고 있고 나중에 소나무로 집을 지어 이것과 셋트를 이루게 되면 그 때 모셔서 내가 담근 술이라도 대접하려 했건만 안타깝게도 작년에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올곧게 사신다고 고생만 하시다가 당신이 쓰신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이 모TV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상당한 인세수입을 얻었고 그로 인해 좀 여유 있게 사시나 했더니만 그만 작고하시고 말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소나무만으로 집을 지어 보겠다는 것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지만 깊은 산중도 아니면서 도심과 가까운 곳에 그런 집을 짓고 살면 전체적인 외관상 주변 건물에 비해 눈에 튈 것은 뻔하다. 말하자면 주변경관과 너무 부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므로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적갈색 벽돌로 쌓은 적당한 외벽과 한국의 산 능선과 같은 적당한 선(線)을 유지한 지붕과 같은 아담한 느낌의 집을 짓겠다고 맘먹고 있고 다만 거실과 같은 곳을 넓게 하여 소나무 목재로 내벽을 처리하겠다는 욕심이다. 시간이 될 때마다 남들이 살고 있는 전원 주택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며 나만의 공간을 설계해 보기도 한다. 1층은 30평정도 그리고 나무계단으로 이어지는 2층은 10평 정도를 지어 아뜨리에와 함께 아내가 늘 기도하는 아담하고 차분한 방으로 꾸밀 것이다.
내친 김에 좀 더 말하라면 담장은 나지막하게 하여 경계 정도만을 표시할 것이고 가능한 한 생나무 울타리로 두를 것이다. 마당에는 알맞은 크기의 연못 하나와 적당한 넓이의 잔디를 심어 가까이 녹색지대로 꾸며진 시야를 확보하고 군데군데 여러 종류의 꽃나무를 심되 겨울이 삭막하지 않도록 하얀 눈에 빨간 열매가 유독 돋보이는 피라칸사는 꼭 심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리고 뒷동산에는 적당한 높이의 성모상을 세우고 야생화와 과수를 심어 아름다운 꽃과 과일을 보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아직 내 머리 속에 있을 뿐이다.
설사 집을 지어 놓는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생활 근거지가 서울이고 보니 평상시에 거의 빈집처럼 놓아두어야 할 형편이기에 더욱 그렇다. 주말에 시간을 낸다해도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가 고작 아니겠는가 싶고 이제는 직접 핸들을 잡고 3시간 정도 운행하는 것에도 피로를 느껴 오고 가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집을 지어 별장처럼 살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결국 내 욕심이자 허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일단 중단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유보상태일 뿐인지 포기해버린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일정한 성취를 이루어 안정된 생활기반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흔히 지향하는 전원생활과 건강에 대한 욕심 같은 탐욕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나는 그 보다는 자연 속에서의 보다 생산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이른바 자연귀속본능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 본능에 따르겠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나이 60을 넘게 되면 인생의 황혼기가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내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연과 어울려 살아 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다시 누구에겐가 변화된 환경에서의 나의 얘기를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내 계획대로의 실행시기가 가능한 빨리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언제나 나의 작은 소망일 따름이다.
(2005.11. 산행산문집 '혼자 걷는 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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