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치명자(致命者)의 길 - 치명자산(승암산)

소나무 01 2009. 12. 26. 01:15

 

 

순교자와 순례자

 전주시가의 간선도로를 관통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치명자산 성지’라는 이정표가 간간이 나타난다. 우선 산 이름이 독특하다는 것 때문에 눈길이 가고 한번쯤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기린로라고 이름지어진 넓은 도로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목대와 한벽루를 지나 전주시가지가 남쪽으로 끝나는 그 지점에 치명자산이 있다.

 전주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로 완주군 비봉면에 있는 천호성지와 김제 이서면에 초남이 성지가 있으나 접근성 측면에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진북동 숲정이 성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이 치명자산 성지다.

 

전주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 위에 세워져 있는 치명자산 이정표. 

 

 치명자산(致命者山)의 원래 이름은 승암산(僧岩山)이다. 그러다가 이 곳에 천주교 성지가 조성된 이후로는 주로 치명자산으로 불린다. 한벽루를 지나고 좁은목 약수터 바로 앞에서 좌회전하여 승암교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주차장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치명자산의 높이는 해발 360m인데 용머리라 불리는 성지가 있는 곳까지의 높이는 284m에 불과에 등산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산책을 위한 장소로서 좋은 것 같고 신자입장에서 볼 때도 차분히 기도하며 명상의 시간을 갖는 산으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으로 이해된다.

 

치명자산 입구의 피에타상.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초입부터 정상 부근의 순교자 무덤이 있는 곳까지는 비교적 가파른 길이나 일정한 간격 으로 14처를 만들어 놓았고 주변에 동백나무가 긴 행렬을 이루도록 꽃길을 조성해 놓아 초봄이면 꽃만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가 않다. 꽃이 질 때 시들지 않은 채로 추하지 않게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은 가톨릭에서 순교를 의미하지만 여기에 심어진 동백은 모두 연분홍의 겹동백이어서 그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그리고 14처란 예수가 사형을 받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타 산에 오르기까지의 수난과 고통의 흔적을 14개 장소 형태로 구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예수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서 골고타 산까지 800m 정도의 거리를 12시간 동안 가시관을 쓴 채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걸어가야 했으나 고통에 못 이겨 3처에서 넘어지고 7처에서 두 번 째 넘어지며 마침내는 14처에서 무덤에 묻히게 된다.

 예수의 이 마지막 12시간 수난 장면을 너무 사실적으로 만들어 화제가 된 바 있는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 채찍질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참혹한 장면 등이 전율을 느낄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어 그 영화를 보면서 소리내어 우는 관객들이 적잖았다. 당시 예수가 겪은 육체적 고통과 죄지은 자들을 대신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은 거룩한 희생을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14처를 지나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성당 앞에 이르면 왼쪽 산자락으로 빨간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가 눈길을 잡아끈다.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는 피라칸사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선연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어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데 한겨울에도 열정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서 보기에 흡족하다.

 전신이 비추이는 대형 거울 앞에서 잠시 몸을 추스린 후 동굴 형태로 되어있는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전면에는 흔히 대하는 예수의 고상(苦像) 대신 한복 차림의 남녀 모습을 모자이크 형태로 장식해 놓은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이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순교 동정(童貞) 부부다. 이름은 유중철과 이순이, 세례명은 요한과 루갈다이다.

 

두 사람은 1754년 김제 초남 마을에서 태어나 1784년(정조 8년)에 성사를 받고 호남에서의 첫 사도로 활동하던 유항검의 큰아들이자 며느리가 되며 이들은 평생동안 동정으로 지내기를 맹서하고 1797년 결혼식을 올린 후 1801년 순교할 때까지 4년 동안을 동정을 지키며 오누이처럼 생활했다고 전한다. 한 방에서 함께 지냈던지라 육체적인 유혹이 왜 없었을까만 오직 신심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니 종교의 힘은 그런 것일까. 동정녀 이순이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당시의 박해를 피해 위장 결혼생활을 하며 지냈던 셈이다.  

 

치명자산 동굴성당 위에 안치되어 있는 순교자 유항검

  친족의 묘소.                                                   

 

 성당 위 양지 바른 곳에는 큰 규모의 무덤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여기에는 이들 동정부부를 포함한 유항검의 처와 조카 등 유항검 일가 가족 7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이른바 해괴한 사학을 신봉하고 퍼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일시에 멸족을 당해 버린 수난을 겪게 된 것이었다.

 생각컨대 예수의 수난이 어쩌면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험난한 길을 몸소 걸었기에 이후 이 천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여기 유항검 일가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무수한 사람들이 예수가 겪은 고통의 길을 용감하게 따라 가며 순교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스스로를 성지의 산지기로 부르며 몸을 낮추는 치명자산 성당의 김봉희(세례명 요한) 신부는 “이들 동정부부가 아직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해 그렇지 조만간 시성(諡聖)을 받게 되면 세계적인 성지로 각광받으면서 전주 치명자산에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이 찾아들 것”이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치명자산에서 내려다보는 전주시가지가 일품이어서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 것이라고도 들려준다.

 

전주 동쪽 부응산에서 바라 본 치명자산과 기린봉(우측 상단 삼각봉우리). 그 앞으로 인공 조성된 아중저수지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에서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전주시가지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한벽루(寒碧樓)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이 긴 곡선을 이루며 치명자산을 휘감아 돈다. 전주시에서도 이곳 치명자산과 9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동성당, 한옥마을 인근의 천주교 유적 등을 연결하는 순례코스를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성지 오른 쪽 바로 옆으로는 신라고찰 동고사(東固寺)가 한 걸음이다. 이곳에서 오른 쪽 능선을 따라 기린봉까지는 1Km 정도, 가는 길에 후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견훤성터도 둘러 볼 수 있고 드문드문 다양한 각도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의 휴일 산행코스로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애절한 사부곡(思婦曲)

   기린봉에 올라서면 동쪽 밑으로 아중저수지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 아중저수지가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곳에 애절한 사연을 지닌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외형상으로는 다른 봉분 형태와 다를 바가 없고 나와 특별히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찌하다 보니 마음이 끌려 찾아보게 되었는데 물론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이다.

 

 이 무덤 앞에는 방금 헌화한 것으로 보이는 싱싱한 국화꽃다발이 항상 놓여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지만 이 꽃이 누군가에 의해 매일 아침마다 새로 놓여진다는 것 때문에 관심을 끈다.

 어느 날 저수지 근처로 점심을 먹으러갔다가 이곳에서 민물 새우매운탕을 파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들은 사연인즉 매일 아침 8시쯤이면 50~60대의 중년 남자가 나타나 향기가 살아있는 신선한 국화 한 다발을 영전에 바치고는 망연한 모습으로 무덤 앞에 서 있다가 때로는 애절하도록 서럽게 우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러는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매일 아침 찾아오나요?”

“매일 여기에 지켜 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얘기 들어 보면 매일 그런데요”

“이 근처 사는 사람인가요?”

“시내에 사는 모양인데 어디에 사는지는 잘 모르죠. 차 타고 왔다가고 그러 니깐-”

“그러니까 부인 묘소에 들렀다가 출근하는 것이구나. 뭐하시는 분이래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 공무원이라고 그랬던가? 그렇게 얘기들은 것 같기도 하고… ”

 남편 되는 사람은 잘은 몰라도 직업공무원인 것으로 짐작되며 어디에 사는지 모르지만 날씨와 관계없이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들러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아내와 만나고 간다는 것이었다.

 

치명자산 뒷편 아중저수지가 보이는 곳에 있는 사부곡 주인공의 묘소. 묘 앞에는 항상 싱싱한 국화꽃송이가 놓여 있다.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사연인가. 이 가슴아픈 사부곡(思婦曲)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했다. 이후로 가끔 그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주인이 일러주는 방향으로 그 무덤을 찾아 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 보낸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것이었다. 그렇게 착하고 사려 깊은 심성을 가진 남편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어 주인공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었지만 아침 일찍 남의 묘소 앞에 가서 기다려본다는 것이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묘비명에는 무덤의 주인공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풍천 임(林)씨로 ‘임ㅇㅇ’라 음각되어 있었고 그 밑으로 ‘카타리나’라는 가톨릭 세례명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녀 역시 가톨릭 신자였고 보니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치명자산 성지와 묘한 인연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묘비 뒤쪽으로는 지난 98년 5월에 사망했다는 것과 박씨 성을 가진 두 아들의 이름이 새겨 져 있었다.

 남편 박씨는 그 후 지금껏 8년 동안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인의 묘소를 찾아 와 헌화했을 것이니 그 애틋한 사랑과 정성에 다만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그것은 부모를 기리며 무덤을 떠나지 않던 3년 동안의 시묘살이 보다 그 정성이 결코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하에 잠들어 있는 아내는 그토록 애통해 하는 남편을 위해 지금이라도 깨어나 남편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는가. 아내를 그리도 사모하는 이 외롭고 처량한 남편을 위해 마땅히 살아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 .

 

 

순리대로 산다는 것

 도대체 치명(致命)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좀 더 오랫동안 해로하지 못하고 그의 아내가 먼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면 그것이 바로 치명 아닌가. 그렇다면 억울해 하거나 서러워하지 말일이다.

 물론 가톨릭에서의 치명이란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에 성지에 묻혀 있는 순교자와는 그 의미와 가치가 많이 틀릴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이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일생의 순리로 운명지어지게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깝다는 이유도 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기에 자주 찾아가는 곳이 치명자산이었다. 14처가 마련되어있는 십자가의 길로 올라가기도 하고 아니면 그 옆으로 나있는 경사진 등산로를 이용해 성지를 거쳐 견훤성터까지를 가볍게 오가곤 하였다. 혹은 견훤성터를 지나 능선을 따라서 기린봉까지 올라 가 저쪽 북쪽의 산야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직선거리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논산 연무읍 금곡리의 작은 야산에 있는 외롭고 초라한 모습의 견훤왕릉, 이 땅 전주에 후백제의 왕도를 세웠다가 비운의 생을 마감한 견훤의 흔적을 돌아보며 인생무상과 세월의 덧없음을 새삼 느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대로’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더라도 순리대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자주 해 보게 되고 탐욕적인 사람들은 흔히 돈과 권력, 명예 그 모든 것을 욕심내고 거머쥐려고 하지만 나로서는 명예하나만이라도 소중하게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해 보는 것이었다.

 사실 회사에서의 내 직위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의식을 내세우고 자칫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항상 겸손과 예의를 잃지 말아야 했고 분수에 넘쳐나지 않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했다. 그게 너무 어렵고 힘들면 종교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 절대자에게는 속일 수 없기에 나의 잘못된 속마음과 지난 행적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고 모든 유혹과 악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도록 필요한 의지와 용기를 간구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가지에 나갈 때마다 자주 눈에 띠는 ‘치명자산 성지’라는 이정표는 나에게는 깨끗하고 순리대로 살아가라고 일러주는 일종의 경고문구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면서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따라 순리대로 순결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하도록 깨우쳐 주는 삶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