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산동네의 행복 - 관악산/삼성산

소나무 01 2009. 12. 26. 01:19

 

 

고시촌 풍경들

서울대 앞 신림동의 ‘녹두거리’라고 하면 웬만한 젊은이들이면 다 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오면서 1980년대에 이 일대가 유흥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 거리에서 동동주를 팔던 녹두집이란 곳이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가 된다.

 시내버스를 타고 대충 그쯤에서 내려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언덕길로 종점까지 가면 거기 산자락에 신림9동 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주변엔 전국에서 모여든 고시 준비생들로 북적대는 이른바 고시촌이다.

 

 작은 산동네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대략 5만 정도의 고시생들이 둥지를 틀고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그들이 집단으로 입주하여 생활하고 있는 고시원이란 곳을 들어가 보면 방이라고 해봐야 불과 서너 평 정도의 공간에 달랑 책상 하나에다 겨우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비좁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먼 훗날의 입신출세를 꿈꾸며 당장의 불편함을 인내하면서 머리 싸매고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고시 공부한답시고 한 보따리를 챙겨 인적 없는 깊은 산 속의 암자 같은 곳에 틀어 박혀 두문불출하였으나 오늘날은 서울이란 대도시 그것도 시장 안처럼 복잡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왜 하필이면 신림동에 고시촌이 형성되어 유명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짐작컨대 서민층이 밀집되어 있어 비교적 물가가 싼데다가 사법시험에 관한 정보 취득이 용이하기 때문이고 국내 제일로 손꼽는 서울대가 인접해 있기에 그러지 않나 싶다. 실지로 이 곳엔 고시생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 많고 한 곳에 3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고시원들이 수두룩하여 서로간에 정보교환이 용이하다. 요즘은 인터넷과 TV, 에어콘, 식당 등을 기본 편의시설로 갖춘 고시원이 경쟁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또 하나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은 소문난 족집게 고시학원이 요소 요소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 그곳에 있는 H고시학원 한군데에서만 50여명의 고시 1차 합격자를 냈고 옆의 T고시학원은 20명 가까운 합격자를 배출하여 장안에 화제가 된 바 있고 지금도 비좁은 골목을 지나다 보면 우리 고시원에서 이번 사법시험에 몇 명을 배출했다는 등의 자축 플래카드를 내 붙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전국의 고시 지망생들이 눈을 밝히고 이 동네를 찾아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관악산을 뒤로 기대고 있는 내 아파트는 산동네라는 것 때문에 어느 정도 무질서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아파트 출입구만 나서면 바로 등산로와 연결되어 아무 때라도 산책과 등산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고시생들도 좁은 방에 틀어 박혀 있다가 잠시 휴식을 취한다거나 식사 후에 가벼운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뒷산으로 올라 산책을 하거나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했고 드문드문 마련되어 있는 약수터와 보덕사와 같은 작은 사찰에서 약수를 떠가곤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주말이면 산책하는 수준에서 보통 1시간 정도의 산길을 걷곤 했는데 그 영역 안이 모두 관악산 줄기였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관악산의 한 줄기면서도 별도의 이름이 붙여진 삼성산 일대가 등산을 겸한 산책코스였다.

 

                                  내가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했던 신림9동의 

                           한 아파트. 교통은 불편한 편이었지만 산자락에 파묻혀

                           있는 게 좋았다. 

 

 삼성산(三聖山)은 관악산의 북서쪽에 위치하는데 높이가 455m에 불과해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찾고있는 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엽적으로 호암산(虎巖山)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르고 경복궁을 축조할 때 그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이곳 호암산의 형상이 호랑이를 빼 닮아 혹 화를 입을까 걱정되어 호암산의 정기를 다스리겠다는 취지로 사찰을 세웠는데 그 사찰이 조선 태조 2년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는 호압사(虎壓寺)다. 실지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삼성산(호암산)을 바라보면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여 기(氣)가 센 산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데 그래서 평소에도 능선이 좀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 보기도 한다.

 

 삼성산이란 이름은 어떤 연유로 붙여졌을까. 여기에서 삼막사라는 절을 빼놓을 수가 없다. 삼막사(三幕寺)는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사람의 고승이 마치 천막과 같은 허름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면서 삼막이란 이름이 붙고 삼성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말에 불교계를 이끌던 나옹, 무학, 지공의 세 스님이 수도했다 하여 삼성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삼막사는 찾는 신도들을 위해 안양에서 이곳까지 미니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을 정도로 서울 신림동보다는 안양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일요일에는 점심으로 국수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나도 한 그릇 얻어먹었지만 산행으로 인한 시장기 때문에 별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막사에는 망해루(望海樓)라는 누각이 있다.

“아니 이 산중에서 바다가 보인단 말인가?”

 서울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뿌옇게 흐려있어 시야가 좋지 않다. 삼막사는 해발 400m 정도 높이에 자리하여 앞이 시원하게 탁 트였지만 내가 찾았던 어느 날이고 바다를 볼 수는 없었다. 스모그현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망해루 앞쪽으로 제법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날에는 아예 시야가 가려 버린다. 비 개인 날 오후 청명한 날이면 나뭇가지 사이로 분명 바다가 보일 것 같기도 하지만 망해루 건물의 본래 취지를 살린다면 사찰에서 나무를 제거해줘야 옳을 것이다. 그제서야 고승들이 이곳을 찾아 입산 수도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삼성산에서는 바다가 보인단 말이야- ”

참으로 맑은 날을 택하여 삼성산에 올라 바다를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삼막사 망해루. 그러나 누각 앞의 무성한 나무로 인해 정작 보여야 할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삼성산 망해루 현액. 글씨는 전주에서 활동했던 서예가 강암 송성룡선생이 쓴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천주교적인 입장에서 삼성산의 의미를 더 부여하고 있는 편이다. 삼성산에는 세 분의 순교자 묘지가 있다. 조선 헌종 5년인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때에는 대략 70여명의 천주교도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주교 앵베르와 모방, 샤스탕 세 신부의 유해가 삼성산 중턱에 안장되어있는 것이다. 이들 세 분 성인과의 인연으로 삼성산에 대한 의미가 나에게는 더욱 각별하다는 뜻이다.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지로 정하여 1992년 가까운 신림동에 삼성산성당을 건립하게 되는데 나는 그 뒤 2년 뒤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면서 삼성산과는 더욱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부활절과 같이 예수 수난 의식이 있는 날이거나 봄부터 가을까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주 일요일마다 실시되는 산중 성지 미사에 참여하면서 아무 때고 삼성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삼성산과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여 필연적으로 묶여져 버린 셈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길이 등산로로 좋은지 또 어떤 곳에 약수터가 있는지 이젠 훤하게 되었다.

 서울 인근의 이름난 산들을 대부분 올라 다녀봤고 보니 지방의 1박2일 코스를 빼면 서울 인근에서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한 발자국 앞인 이곳 삼성산을 더욱 오르고 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서울의 이름난 산과 잘 알려진 등산로의 경우는 휴일의 경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느 때는 산보다도 사람 구경만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고 맑은 공기 마시러 갔다가 사람들에 떠밀려 잔뜩 먼지만 뒤집어쓰고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과 인접해 있는 관악산의 경우도 사람들이 주로 찾는 서울대 입구 쪽과 과천 방향에서 오르게 되면, 그것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드는 대개 오전 11시 전후가 되면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게 된다. 암반으로 된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좁은 통로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에 밀려 한참동안 기다려야하는 경우가 있어 짜증이 나는 경우가 생기고 메마르고 건조한 날의 경우에는 푸석푸석해진 땅 때문에 자칫 흙먼지만 마시고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그런 여건에 비해 내가 기대어 사는 삼성산은 주변의 인가가 들어서 있는 영향도 있지만 공개된 등산로가 아니어서 아무래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적어 좋았다. 삼성산도 관악산처럼 주로 바위와 마사토로 이뤄져 있고 수종도 소나무와 신갈나무 일색일 정도로 건조하고 삭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봄이면 어릴 때 시골에서 보던 여러 야생화를 볼 수 있어 좋고 봄의 화신인 진달래도 흔히 볼 수 있어 좋았다.

 5월이면 척박한 땅에서도 집단으로 자란 아카시아가 일시에 꽃을 피워 주변 일대를 온통 진한 향내로 가득 퍼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여름 비 가 많이 온 다음 날이면 작은 계곡에 꽤 많은 물이 흘러 내려 심산유곡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물소리에 깨어 새벽 일찍 눈을 뜨게 되면 그 날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새벽 3시경에 눈을 떠 산에 올랐다가 너무 컴컴하여 잠시 방황하다가 물소리 를 방향 삼아 다시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또 쉬는 날이면 아예 밥과 찬거리를 챙겨 채 5분 거리도 되지 않는 작은 계곡을 찾아 맑은 물에 발 담그며 맛있게 점심을 먹는 재미도 우리 네 식구에게는 행복이었다.

 

                        산동네에 사는 덕분에 관악산을 자주 오를 수 있음도 작은 행복이다.

 

 가을이면 신갈나무 사이로 푹신할 정도로 두툼히 쌓인 낙엽을 밟는 기쁨이 또 일품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짝 마른 나뭇잎의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너무 좋아 일부러 힘을 주며 어린아이처럼 걸어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삼성산 장군봉에 올라 오후 햇빛을 받은 관악산 팔봉능선의 단풍을 감상하는 기분도 빼놓을 수 없었다.

 또 겨울이면 겨울대로 나무마다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의 향연을 보면서 계절의 운행에 대한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을 새삼 느끼곤 했다.

 삼성산과는 그렇듯 한 몸으로 살았다. 지금 어느 곳에 가면 어떤 꽃이 피어있을 것이고 어느 약수터에 가면 어느 정도의 물이 나오고 있을 것인지 어느 곳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 와 있을 것인지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고시원이 많아 항상 복잡했지만 모두가 공부에 전념하는 젊은이들이어서 인지 비교적 조용하고 평화로운 편이었으며 주변에서 언제나 그들을 대하다 보니 나 자신도 젊어지는 것 같아 좋았다. 그렇게 한 10년 정도를 살았다. 그러던 중 삶의 작은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회사 방침에 따라 일정 직급 이상의 간부들은 연봉계약직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정년은 보장된 조처였지만 모두 사직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퇴직금을 지급 받기에 이르렀다. 나의 중간 퇴직금과 아내의 착실한 저축으로 인해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고 보니 조금 넓고 조용한 아파트로 옮겨가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되었다.

 일단 옮겨가기로 결정하였으나 서울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재테크를 한답시고 나중에 되팔 때 돈이 되는 곳으로 정하면 좋으련만 처음부터 그런 면에서는 도대체 쑥맥이었고 솔직히 아예 생각이 없었다. 다만 살기에 쾌적하고 조용한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처럼 마땅한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정들었던 곳이어서 인지 선뜻 신림동을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것 같은 강남 쪽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마포, 용산, 동작, 사당 등 몇몇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는 발 품을 팔아 봤지만 마음을 붙잡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내 집이 있는 신림동에 돌아오면 그저 마음이 푸근하고 좋았던 것이다. 그만 그만한 사람들이 맨살 부딪히며 살아가고 보니 무엇보다도 사람냄새가 나서 좋았다.

 

 결국은 살고 있던 곳에서 바로 보이는 신림2동으로, 그것도 이름도 같은 현대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삼성산 뿐 만 아니라 관악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데다 이곳 역시 아파트 출입구만 나서면 등산로와 연결되고 약수터도 있어서 예전 조건보다 모자랄 게 없었다. 이제는 그 삼성산을 남쪽으로 정면으로 바라보며 내 품안에 안게 되었다.

 지금의 아파트도 여전히 언덕에 위치해 있어서 대부분을 마을버스를 타고 오고 가지만 서울에서 이런 전망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또 있겠는가 싶어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곳에서도 집을 나서 능선을 따라 자주 삼성산을 찾는다. 그리고는 돌아 와 거실의 넓은 창 너머로 그 산을 다시 보며 확인한다.

“음, 오늘은 저기를 갔다왔군. 다음엔 저쪽으로 올라가야지”

거실 밖의 삼성산 전경은 그대로 대형의 살아있는 현황판이 된다.

“그래, 이제는 저 곳에 올라 바다를 보아야지. 저 너머 삼막사에 망해루가 있 었잖아- ”

2년 4개월 동안의 전주 생활에서 다시 서울에 올라 와 살면서 나는 어느 비 개인 날 아침 일찍 삼성산에 올라 가 인천 앞 바다뿐만 아니라 가능한대로 멀리 고향 쪽의 바다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야만 여기에 눌러 사는 보람과 삼성산의 참된 가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 밤늦게까지 적지 않은 비가 내리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창 밖을 봤을 때, 가시거리가 툭 트이고 화창한 기운이 감돌게 되면 아마 그 때를 D데이 삼아 새벽같이 삼성산을 또 오르게 될 것이다.

 

 산을 찾을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다.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강나무 꽃 피었을까  (0) 2023.03.16
용화산에 오르다  (0) 2019.10.27
치명자(致命者)의 길 - 치명자산(승암산)  (0) 2009.12.26
모악은 어머니외다 - 모악산  (0) 2009.12.26
향적봉의 겨울동화 - 덕유산  (0) 2009.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