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가득하다 싶은데 바람이 많이 분다. 텃밭농사 준비 이미 끝났으니 산에 꽃구경 가고 싶어졌다. 울안의 생강나무꽃 이미 피었으니 산에도 많이 피었으리라. 지금의 이 터에 처음 둥지 틀었을 때 뒷산 미륵산에 오르니 그때 노란 생강나무 꽃이 여기저기에 많이도 피어 있었다.
미륵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군데 있으나 생강나무 꽃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산길은 미륵산 다듬재에서 우재봉으로 오르는 동쪽 길이다. '다듬재'라는 고개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다. 이 쪽 길의 산행 선택은 그로부터 1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생강나무 꽃 보고 싶어 일상의 옷차람으로 갑자기 나섰다. 4백 미터 급 산이고 보니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이라는 표현이 맞지 아닐는지.
초입에서 조금 오르면 거대한(?) 석성이 나타난다. 기준성(箕準城)이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準) 왕이 남하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후 백제시대까지 성곽이 잘 유지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많은 돌들을 어떻게 자르고 날라 쌓았을까. 물론 외부 공격으로 부터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나 참으로 얼마나 고난하고 암울한 작업이었을 것인가. 목숨 부지를 위해 밥 먹는 일 말고는 수년, 수십 년 동안 매일 반복해서 잘라내고 나르고 맞춰서 쌓고... 그래서 또 다른 목숨들을 지키도록 해야 하는...
복원작업이 마무리가 된 곳 위로부터의 산길도 성곽길이다. 일정한 크기가 네모 난 돌들이 무너져 내린 채 바닥에 무수히 깔려 있다. 산성 축조에 동원된 석공이나 노역꾼들의 한숨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곳 미륵산에 산성을 구축해야 했음은 이 산이 돌산 그 자체로 돌이 풍부한 데다 적의 동태를 쉽게 조망할 수 있는 등의 입지적 조건 때문일 것이다.
바로 앞의 너른 들은 물론 용화산을 비롯해서 천호산, 위봉산, 운장산 등 일대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달래는 아직 이르나 생강나무 꽃은 생각대로 주변에 많이 피어있다. 봄꽃들은 대개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눈길을 끌고 사랑을 받는다. 생강나무 역시 노란 눈송이 같은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이름이 그렇듯 나뭇가지를 잘라야 생강냄새를 맡을 수 있어 애꿎게 수난을 당하는 나무이기도. 소나무나 노간주나무 외에는 늘 푸른 모습을 볼 수 없고 아직은 삭막하기만 한 주변이어서 노란 생강나무 꽃이 더욱 돋보인다.
날을 잘 선택한 것일까. 거의 날마다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뿌옇기만 한데 오늘은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능선과 봉우리들. 한 때는 내가 다 올랐던 곳이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여기 오르면서도 생각했다. 아직은 내 몸이 산행을 허락하고 있어 고맙다고. 얼마쯤 후엔 팔공산에 오르리라. 저기 앞으로 보이는 진안 장수 쪽의 1천m 급 산이다. 벌써 20년 전, 그때 겨울 능선 따라 오르다가 갑자기 등산로가 끊겨 되돌아서야 해서 항상 아쉬움이 있는 산이다.
미륵산 동편 정상인 우재봉(405m)에도 생강나무 꽃이 보였다. 신선하고 환한 기운 받았으니 이 봄 한결 가볍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달래 만개할 때 한 번 더 오를까? 아니.
그냥 울 안의 진달래로 항상 만족하곤 했는데 올봄에도 그리되지 않을까 싶다.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 2023. 3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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