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참고 삽니다.
-병원선 511호를 따라
병원선 511호는 부도에 도착한다.
부도는 여천군 남면에 속하는데 5만분의 1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작은 섬이다. 20가구 100여 주민이 생활하고 있는데 어느 섬이나 마찬가지 인 것처럼 접안시설이 빈약해 130톤의 병원선은 섬에서 멀리 떨어져서 종선을 댄다.
여수에서 뱃길로 2시간, 간단한 의료시설이 갖춰져 있는 선내 진료실에는 섬주민의 절반 쯤 되는 40여 명의 환자로 일순간 만원을 이룬다.
무료진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대개는 두통이나 신경통, 감기 등의 비교적 가벼운 통증을 호소하거나 더러는 발치를 한다든지 혈액검사, X레이 검진 등을 하는 환자들이다.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일반과목과 치과 담당의 두 의사와 임상병리사, X레이 기사, 간호원 등 6명의 의료진이 바쁘게 환자를 대하는데 환자에게 먼저 마이크를 건네 본다.
“평소에 아플 때는 어떻게 합니까?”
“참지요 뭐- ”
“치료가 급한데도 그렇게 합니까?”
“그래도 참아야제 어쩔 것이여- ”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든다.
이번에는 의사 쪽이다.
“보람이 있습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진료혜택을 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큰 보람입니다”
“오히려 의사 쪽에서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데- ”
“단 한 번의 진료로 끝내야하는 것 때문에 그게 못내 아쉽습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에 있는 병원에 가려면 시간 맞춰 여객선을 타야하고 오가는 시간만큼 일을 할 수 없기에 그러하며 병원선은 평균 석 달에 한번 씩 진료를 해 줬던 섬을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인근 수항도의 경우는 4가구, 소횡간도에는 7가구, 여수에서 5시간을 가야하는 광도에는 8가구가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참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인지 병원선이 접근해도 배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의료진은 병원선의 보트를 이용해 필요한 의료장비와 의약품을 싣고 가 직접 진료해 준다.
정 아프다 싶으면 병원선이 오기 전에 날을 잡아 도시로 나간다. 병원선이 찾아올 때 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고 한편으로는 병원선 안의 한정된 의료진과 시설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원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상충되는 면을 대하게 되는데 질병은 예고 없이 찾아드는 것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급환자 발생과 장기적인 치료를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정기간 동안 일정 도서지역을 순회하며 섬 주민들의 건강을 살펴주는 병원선은 분명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취재 당시의 의료진과 승무원들이 필요한 장비들을 종선에 옮겨싣고 있다.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다.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
전국의 1,994개 유인도서 가운데 전남지역에만 308개가 몰려 있으니 이들 도서민을 위한 3척의 병원선 운영은 사실 부족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 하면 도서교통, 교육, 소득··· 이런 것들이 그동안 눈에 띄게 나아진 것만은 틀림이 없다.
특히 문화적인 측면의 한 예로 어느 섬을 가든 전국의 각 지역과 통화할 수 있는 전화가 가설되어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의료문제의 경우도 보건진료소나 지소의 개설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고 병원선의 경우도 의료진과 시설이 더욱 보강되고 있는 추세여서 섬 주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지방시대에 부응하는 결과일 것이다.
지금의 섬은 그 옛날처럼 못살아서 한스러운 곳이 아니요 축복받은 땅을 위해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본다.
다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그저 참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섬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이든 찾아 나서는 진취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1987.11. KBS 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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