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토양에 있어야 할 프로그램
3년 반이라는 제법 긴 세월동안을 지키고 있었다. 지난 90년 4월 “농기구”편을 시작으로 93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편을 마지막으로 방송했으니까. 그동안의 총 제작편수는 정확히 138편, 가히 나라 안에 있는 “한국의 美” 모두를 섭렵해 온 셈이다.
대개 6개월 남짓이 수명인 현실에 그만큼의 장수를 누린 것도 어쩌면 타고 난 복이라 하겠지만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 비움과 아이템의 고갈상태라는 조금은 타의적(?)인 해석으로 막상 끝내고 보니 마치 죽은 자식 뭐 만진다는 식으로 불쑥 예전의 제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편작의 묘방이 없음을 어이하랴. 시류에도 바람타지 않는 프로그램, 스스로가 지정문화재가 된 프로그램, 그리고 공영방송이라는 옷차림 때문에 대외적으로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 그게 “한국의 美” 얼굴이었지 않나 싶다.
프로그램 자체의 성분이나 함량, 또는 포장상태를 놓고 보면 소비자의 구매욕을 충동질 할 요소가 그리 없는데도 굳이 한쪽 켠에(방송 종료 때 까지 심야시간대인 밤 10시 50분에 편성되어 있었다) 진열해 놓았던 것은 그런 성격 규정 외에도 이 땅 곳곳에 한국적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많지 않은 시청자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율배반적 모습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청경향을 추종하거나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오락적인 것만을 추구해 가는 오늘의 풍토에 소리 없는 반기를 들면서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땅 구석구석을 찾아다닌 프로그램이었다고 자평한다. 그에 대한 반증이듯 고백컨대 시청률에 있어 “한국의 美”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두 자리 수를 넘겨 본 일이 없다.
자기 땅에 살면서 자기 것을 외면하는 이 아이러니, 저간의 구차스런 사정이나 변명은 그만 두고라도 프로그램이랍시고 만들 줄만 알았지 장사수완엔 쑥맥이었다.
작금의 우리 생활문화, 그 속에 뿌리박혀 있는 우리네 삶과 의식세계를 재인식 재창조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무감으로 나름대로는 열심이었으나 소재 선정과 접근방법의 어려움, 독특한 시각의 부재, 그래서 찬사도 비난도 면할 수 있기를 갈구하면서 어물쩡하게 쳇바퀴만 계속 돌려 온 것 같다.
다만 우리의 미(美)를 표피적으로 보거나 단순히 전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식의 복고주의, 혹은 감탄이나 미화 일변도의 국수주의에 빠져들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방송시간 45분이라는 용기를 근근이 채워왔다. 굳이 증거를 내 놓으라 하면 소리없이 격려를 보내 준 후원자, 이를테면 이런 저런 경로로 귀에 들어오는 “쓸만한 프로그램… ”운운하는 것들이나 대외적으로 한국언론학회에서 주는 한국언론상을 수상한 것, 방송위원회 선정의 “좋은 프로그램” 그리고 자체 비디오 판매부서의 판매 목록 가운데 그런대로 잘 팔리는 것 중의 하나로 리스트에 올라있다는 그런 정도 얘깃거리의 나열로 시청자들에게는 크게 누가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열매의 단맛만을 빨려하지만 쉽게 눈길 주지 않는 씨앗만은 소중히 간직해야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한 밤의 별 헤는 마음으로 되살펴 본다. 서해바다 줄포만, 길쌈, 단청, 평창아리랑, 잃어버린 색을 찾아서, 산촌시가, 토우, 장터, 숯불…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138개의 분신들이 소중하기만 하다.
("한국의 미"의 타이틀 카드)
도대체 “美”는 무엇이었는가. 그에 대한 해인사 시명스님의 어원적 해석과 당부는 지금껏 큰 감명으로 남아있다. 美는 “羊”과 “大”의 결합인 바 羊은 성서에도 등장하듯 다분히 희생적인 의미이고, 大는 뜻 그대로 크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 희생이 큼이 아름다움을 존재토록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상을 아름답다 표현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눈(마음)이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라는 논리와 상통한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와 평가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안에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모두 용해되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많은 모습들과 대면하게 된다. 전통이란 이름을 빌린 작위적인 아름다움, 또는 현대와의 접목이란 명분으로 겉포장만 요란한 기만과 가식… .
언젠가 돌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수많은 석조예술품을 가졌으면서도 소위 인간문화재로 대우받는 석장이 이 땅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그 원인규명과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으나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그 앞에 맥없이 꺼꾸러지고 만 슬픈 기억을 갖고 있다. 전통도, 정신도, 그래서 美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런 대물림의 부재상태,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으로 평가하려는 못된 가치전도, 도무지 속수무책이어서 프로그램이랍시고 그저 적당히 얼버무려 놓고는 스스로를 포함해 싸잡아 저주했던 아픔, 그래서 차라리 과거로부터 있는 그대로가 오히려 낫다 좀 더 했는지.
극단적인 한 예로 치부하고 싶으나 냉엄한 자본주의 또는 철저하게 이기주의화되어 있는 현실에 좀더 분명히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으나 역부족임을 인정하여 어느 땐가 있을지도 모를 긴 토론의 장으로 미룬다.
오랜 제약 속에서 살다보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공허해지고 탈진상태로까지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진정한 예술은 배고픔 속에서 탄생한다는 불변의 진리가 지금 이 사회에서도 통용되었으면 한다는 욕심이다. 배고픔의 의미와 앞에서 얘기한 희생의 의미, 이것이 나로서는 “한국의 美”를 만들면서 얻어 낸 때로는 크게 소리쳐 대고 싶은 값진 교훈이다.
나는 가을 개편이 임박하면서 “한국의 美”가 새 편성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거의 확정적인 전갈을 받으면서 후속타를 위해 영주 부석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앞에서 소백산 자락의 최순우님의 표현 그대로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며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서 있는가. 아름다운 것들을 위한 또 하나의 자각이었다.
그리고 석양은 아침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자문자답하면서.
지금까지 그래왔듯 “한국의 美”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려할 때 그쯤에 또다시 같은 타이틀로 복위되어 사랑하면서 체온을 나누던 살들과 반갑게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 토양에 있어야 할 바로 우리 프로그램이므로.
다시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고 그 “한국의 美”는 지금 예전의 내용과 특별히 다르지 않는 “한국재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옷차림을 바꿨다.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고, 새롭게 어필해 보겠다는 의도로 이해하여 주고 관심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촬영현장에서 잔뜩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을 동료, 그리고 지하 깊숙한 편집실에 쳐 박혀 또 한 개비의 담배꽁초를 짓이겨 가며 핏기 없는 얼굴로 모니터를 대하고 있을 동료, 해서 우리 다섯 식구 모두의 하고 싶은 얘기들과 고민의 흔적들을 다만 팀장이라는 나의 어줍잖은 자격으로 이러쿵저러쿵 일방통행 하였음을 용서 구한다.
또 서둘러야 한다. 내일 아침 무렵이면 난 갑자기(?) 열반에 든 성철 종정의 족적을 찾아 해인사로 가는 차안에 급히 올라 있을 것이다.
스님은 열반에 들면서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 뱉어서 푸른 산에 걸렸다” 했다는데… .
(1993.11월호. 방송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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