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이야기

나의 애독서

소나무 01 2012. 6. 7. 11:39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자기 성찰

                                                     

 

                                                                 - 나의 애독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지음, 현암사)

 

 

 올 봄에도 두둑을 만들어 감자를 심었다. 아욱과 쑥갓 같은 채소 파종도 준비해야 하는 바쁜 계절, 밭을 꾸미면서 흙에 섞는 거름 냄새가 제법 구수해 진걸 보면 나도 이제 얼치기 농사꾼은 면하지 않았나 싶다. 산자락에 터를 잡아 텃밭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어 가꾼 지 5년째가 된다. 가능한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살겠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실천에 옮겨보고 있는데 이런 게 행복 아니겠냐고 자문(自問)해 보곤 한다.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가고 있는 지금 나의 시골생활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전우익 선생과의 인연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스무 해 전 쯤 하얗게 쇤 머리와 골 깊은 주름이 잔뜩 패어있는 당신의 얼굴 사진이 표지에 붙은 책을 서점에서 일별했을 때 고집쟁이 농사꾼으로 불리는 그의 올곧은 삶의 기록이겠거니 짐작했는데 사실이 그랬다. 생각보다 쉽게 읽혀져 단순한 수필집 같은 게 아닌가 여겨졌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특별한 여운이 남아 그냥 가볍게 읽어 갈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씨앗에 대한 고뇌 없이 그저 종묘상 등에만 의지하며 손쉽게 농사지으려고만 하는 요즘의 현실, 지금까지는 비바람과 병충해만 막으면 되었으나 이제는 외국농산물을 이겨내야 한다는 절박함, 인간이 물건보다 우선이어야 하는데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처럼 물건 때문에 사람이 바뀌어버린 인간성 상실 시대에 사는 가치전도의 세태, 소중한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데도 자연의 리듬을 거부하며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람들··· . 그는 그런 모습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가슴 아파해 한다. 그러면서 잎을 떨구는 가을나무처럼 사람도 가진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좋은 나무는 그 키만큼 뿌리가 뻗어 있음에 평소 나무만 보려 하지 말고 뿌리의 깊이까지 생각해야 한다며 타이른다.

 

 

                                                                                               생전의 전우익 선생

 

 한편으론 뜰박을 처 엎어 샘물을 퍼 마시기도 하고 맨발로 흙과 교감하면서 채소를 가꾼다든지 산수유 씨를 뿌려 묘목으로 길러낸다든지 하는 이야기나 잉걸을 화로에 담아 겨울밤을 보내는 등의 산골 농사꾼으로서의 평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적고 있어 내 어렸을 적 봤던 시골 정경 그대로의 아련한 모습들을 책속에 되살려 놓고 있다. 식자인체 하며 여기저기에서 옮겨오거나 덧칠하거나 해서 뻔질나게 쓰지 않은, 다만 산골 촌부일 따름인 자신의 생활 속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단편들을 가식 없이 써 내려가며 순수함과 투박함 그 자체의 잔잔한 울림으로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의 생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 프로그램화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봉화 쪽에 전화를 걸어 거처를 수소문했더니만 대뜸 “그런 좌익을 왜 만나려 하느냐”고 시큰둥해 했다. 해방 후 청년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전력 때문에 지금껏 고집불통 좌익으로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이름은 우익인데도. 그렇다면 파란만장했던 젊은 날의 삶에 대한 기록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할 텐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철저한 자기성찰이다.

 결국 그는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일은 오직 농업 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줄곧 농사에 빗대어 가며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혼돈의 우리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는 방송을 거절했지만 서로 사는 곳을 오가며 인간적인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다. 맘씨 좋은 이웃집 장형같고 아저씨 같은 뿐이었다. 그는 고사목으로 필통과 작은 책상 같은 것을 손수 만들어 나에게 선물해 주기도 했다. 내가 대접하는 식당 밥 보다는 담배 선물을 반가와 할 만큼 담배를 맛나게 피우며 책에 담지 않은 세상사는 얘기를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다.

 

 그 후 여러 해가 흐르고, 그가 쓴 책은 한 방송사 TV프로그램에 의해 좋은 책으로 선정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을 것이다. 그는 방송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TV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에 미안해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건 정말 잘하신 결정이었다고 축하했다. 그의 참된 생각과 경험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옮겨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혼자만 잘 살면 재미없으니 무엇이든 여럿이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주자던 그 마음, 우리는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야 하는데도 돈이나 지위와 권력 같은 욕심들이 마음속의 찌꺼기가 되어 그 흐름을 막고 있으니 그것을 뚫어 보다 넓은 세상으로의 소통으로 이어져야 한다던 그 이.  

 나 같은 사람에겐 좀 더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어우러져 경독(耕讀)이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던 그는 좀 더 살아서 이 시대의 탁류를 맑게 하지 못하고, 세상을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자기성찰을 다만 책으로 남아 새삼 일깨우고 있다.

 

 

                                                                                        - 2012. 4.28(토)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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