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병자일기'(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의 부인인 남평 조 씨가 4년간 쓴 한글 일기)를 읽고 그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공주박물관에 가 보고 싶어졌다. 국문학적 가치가 큰 것으로 여겨지나 세종시의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상태로 기증된 것이어서 전시공간에는 실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본관 옆에 충청남도 기증품 수장고가 있어 들렀으나 토기류 같은 것만 들여다볼 수 있게 해 놓았을 뿐 문헌자료들 역시 볼 수가 없었다.
박물관은 대체로 무령왕들 발굴 유물이 중심이었다.
아쉽지만 공산성으로.
그동안 공주 유적지를 둘러볼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냥 스쳐 지나가곤 했었다. 차창 밖으로 그저 힐끔힐끔 쳐다보며 '저기가 산성인가?' '금강에 무슨 한강철교 같은 것이 있네.. ' 그런 정도의 일별이었다.
공산성은 이런저런 매개체로 그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직접 찾아온 것은 그래서 처음. 산은 야트막하나 바깥쪽으로는 경사가 급해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올리면 적의 침입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요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터진 한 쪽으로는 강물이 막고 있으니.
공산성의 주 출입문인 서쪽으로 난 금서루(錦西樓)
공산성(公山城)의 성곽길. 당시엔 토성이었으나 조선 인조 이후 석성으로 축조
발굴 작업중인 추정 왕궁지. 금서루 쪽에서 오르면 서쪽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 험한 산세가 아니어서 3km가 채 안 되는 능선을 따라 성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성에는 동서남북에 모두 4개의 문루가 있었으나 주차장 쪽의 금서루로 들어서다. 경복궁이나 창경궁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통치자가 있었던 곳이니 그에 걸맞은 건축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던 바람은 허황된 생각. 정상부근에 '추정왕궁지'라 하여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나당연합군에 무참히 짓밟힌 나라에 도대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무엇 있을까 싶다. 지나 온 금서루는 30년 전에 복원된 것이고 석성은 조선 시대에 개축된 것이라고.
성은 경사가 급한 산을 이용하여 요새처럼 둘러 쌓았으나 멀리 보이는 평지의 공북루(拱北樓) 단 한 방향으로는 금강 줄기와 맞닿아 있다.
공북루가 있는 분지 형태의 평지에 궁터와 여러 부속 건물이 들어서 있던 것으로 발굴 조사된 바 있다.
성곽길은 둘레길은 걷는 편안한 느낌이었지만 마음 안은 시대를 건너 뛰어 옛 백제가 패망하던 여러 모습들로 점철되어 가볍지가 않다. 금강 쪽으로 난 공북루를 제외하고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만 분지 형태로 된 옛 생활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이런 곳에 왕궁과 부속 건물 그리고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의문. 의자왕이 18만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사비성에서 이곳으로 몸을 피신했다 하니 당시엔 그런대로 피난처로서의 구색을 갖춘 규모 있는 성이었나 보다.
의자왕은 이 공산성에서 닷새를 버티다가 자신을 지켜주던 무인 신하의 배신으로 결국은 당나라로 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비참한 말로의 군주가 된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시킨 인물로 재조명된 바 있으나 주색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끝내는 나라를 멸망케 했으니 아무런 연민의 정도 생기지 않는다.
공산성에서 바라 본 공주 신 시가지.
좌측 편으로 보이는 두 다리가 금강을 가로질러 공주의 옛 시가지와 신 시가지를 이어 주고 있다.(파노라마 촬영)
대략 백 미터 정도 높이의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신시가지 모습이 평온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하얀 백사장 등의 주변 경관 또한 저으기 안온하고 평화롭다. 초기 한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지를 능히 옮겨올 만한 터다.
백제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이곳에서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가.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들이 닥친 나당 연합의 공격으로 철저히 패망하여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하여 그렇게 그렇게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오늘날 어쩌다 땅 속에서 나오는 무령왕릉 관장식이나 금동향로 등 극히 한정된 유물들 만으로도 감격하여 당시 상황들을 꿰맞춰 보는 비운의 나라.
공산성에 서서 무연히 바라보는 공주 땅은 그래서인지 다만 조용할 뿐 이었다.
- 2023. 3. 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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