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산자락에서 노후 보내겠다고 터 잡고 집지어 살게 된 것은 은퇴 몇 해 전부터였다. 그리고는 어느 새 햇수로 18년째의 시골 생활, 뒤돌아보니 20여 년의 세월이 휙 지나가 버렸다.
처음, 맨땅에 씨 뿌리던 얼치기 농사꾼은 이제 배추 무 등 여러 채소를 자급할 정도로 실력이 불었고 집 주변의 나무들도 잘 자라줘 제법 푸르러졌다. 화초들도 계절 따라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는지라 그동안 애써 가꿔 키운 보람을 안긴다. 비록 작은 땅뙈기라도 얼마 전 퇴비 스무 포대를 구입해 흙과 뒤섞어 놓고는 텃밭에서의 수확을 미리 생각하며 배불러한다.
그런 기쁨 때문에 해가 갈수록 재배 면적이 늘어나고 있고 나의 노동력을 쏟아 넣어야 하는 수고를 즐겁게 보태고 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씨앗이랄지 농자재 등을 챙기고 있지만 그런데 얼마 전부터 좀 찜찜한 기운이 들어 잠시 숨 고르고 있는데.,,
경제력이나 이웃과의 교분 같은 그런 문제들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강상의 이유에서다. 그동안 내 땅에 심고 가꾼 생명체들이 건강하게 커가는 모습만 좋아 보였을 뿐 같은 세월 동안 사실 나의 건강문제에 대해서 신경 써 본 일이 없었다. 아무래도 황혼기로 접어든 나이 때문이라 생각해 보지만 어떻든 부지불식간에 약간의 이상 징조들이 몸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아무래도 좀 서글퍼진다.
진즉 봄 농사를 서두른 편인데 밭 꾸미면서 삽질이 좀 과하다 싶으면 허리가, 쇠스랑으로 오래 땅을 파다보면 팔이 아프거나 숨이 가빴다. 풀이라도 뽑아야겠다고 쪼그려 앉으면 쉽게 다리가 저려오고. 예전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해도 피로감이란 걸 거의 느끼지 못했었는데 가는 세월 앞에 “아, 나도 어찌할 수 없구나”하는 가벼운 탄식. 그래서 “이거 내일 할까?” “이건 안 해도 되지 않나?”하는 기피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밥 늦게 먹더라도 이건 끝내자는 근성이었는데 말이다.
이건 농사의 육체노동과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가끔씩 뒷산 산책에서 좀 빠른 걸음을 하면 처음 얼마동안 기도가 쐬- 한 느낌이 들고 좀 넓은 간격의 계단이라도 오를라치면 다리가 당긴다. 확실히 근력이 약해졌다는 증세다. 그것뿐인가. 잠자리에 들면 곧바로 골아 떨어지면서도 중간에 꼭 한 번 이상은 깨어 화장실에 가야 한다. 또 있지. 잇몸엔 임플란트가 이미 여러 개 박혔고 피부에는 주름, 머리와 눈썹의 하해 지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UN에서 어쩌고저쩌고 하며 당신은 장년에 속한다고 안도하라 하지만 아니 틀림없는 노인이 맞다. 서울 쪽 볼일있어 지하철을 타면 노인석으로 직행하고, 입장료 받는 곳에 가면 경로 무료 맞느냐고 확인한다. 거기에다 누군가가 어르신이라 호칭해 주면 은근히 좋아하는, 이미 그런 처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러하니 아직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만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지난날과 똑같이 괭이나 쇠스랑을 휘두를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 받아 지금껏 그저 앞만 보고 살아온 셈이었는데 올봄의 적신호로 인해 이젠 자신을 좀 돌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자문한다.
그래서 잠깐 뒤돌아본다. 텃밭 가꾸면서 그냥 내 몫만 잘 챙기면 될 터인데 어디서 보고들은 건 있어가지고 나누는 기쁨 실행한답시고 더 많은 양의 재배와 수확을 위해 몸을 혹사시킨 바가 있지 않은가. 어떤 수확물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입해 먹는 게 훨씬 효과적인데도 내 것은 유기농이지 하는 그 알량한 자존심 지킨답시고 사 먹는 것과 비교하지 말라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는가. 그런 허세 부리며 부지런히 땅을 파고 또 파고 그랬다.
그래 좋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방식대로 잘살아왔었다는 자기주장과 만족을 인정한다 치자. 그러나 이제부터는 타협하며 일하자. 올봄 바깥일부터는 무리하지 말며 맞닥트리고 있는 건강문제를 염두에 두자. 재배 면적을 줄여가고 한꺼번에 내리 몰아쳐야 했던 작업은 며칠씩의 일거리로 나눠 경량화 하자. 단순한 노동으로만이 아닌 노동과 운동 요소를 잘 접목해 보자(농사의 운동방향이 늘 한쪽으로 만의 일방통행인데 다른 방향과 형태를 시도해 보자는 뜻이다). 또 더 이상은 쪼그려 앉아 일하지 말고 접이식 캠핑의자를 상시 사용하자.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비록 소소한 것일지라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요령이 생겨날 것이다. 처음엔 불편하겠지만 차츰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어느 새 예전 습관대로 회귀하게 되고 후회가 될 터이지만 그래도 노력하며 잘 지켜보자는 나름대로의 다짐.
보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지인의 부고가 날아왔을 때의 당혹스러움, 어떤 이는 암수술로 고생하고 있다하고 또 누구는 허리가, 다리에 고장이 생겨 정상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당신도 대상자일 수 있다”는 요즘의 그 겁주는 광고 문구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일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또 있다. 백수 신세에다 멍 때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보니 카톡으로 날아드는 것들이 죄다 노년기 질병에 대해서다. 암과 치매 예방을 위해 음식은 이런 거 운동은 이렇게,.. 등등 필수 숙지사항이라며 수시로 퍼 날라주는데 이제 지겨울 정도로 피로감과 짜증을 주지만 방심하는 사이 정말 어느 한순간에 훅 갈 수도 있으리라는 불길함 때문에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아이러니. 20년간 노후화(?)가 진행된 몸, 이따금씩 까탈을 부리는 내 집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과도한 사용과 내구연한 초과로 부품 교환이 아닌 용도 폐기 선고라도 받게 되면 누구를 탓할 것인가. 무섭다.
하여 수시로 소심한 근성이 스물 스물 올라온다. 자연과 어울리려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는 것인가? 저 좋다고 이렇게 일만하다가 결국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기우라 치부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다들 잘 먹고 잘 쓰자며 부지런히 여행들 다니고 그러는데 나도 그런 부류에 합류해야 되지 않겠는가? 사실은 쥐뿔도 없으면서.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또래의 지인과 통화하며 잘 지내느냐 했더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 하고 싶은 대로”라고. 서로 낄낄대며 웃어 넘겼지만 그 말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살만큼 살았잖느냐”는 절친의 또 다른 대답은 이미 비수가 되었다. 이 친구 목회자인지라 저는 이미 천국행 티켓이 예약돼 있을지 몰라도 나는 내가 믿는 절대자로부터 아직 어떠한 언질도 받은 바 없으니 마냥 서글플 수밖에. 20년이 화살처럼 지났으니 남은 세월은 분명 총알일 테지. 그 표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몸을 최대한 사려야 할 판이다. 그만하자. 거참, 내일 당장 아침 옥수수 심어야 하고 마늘밭 잡초 뽑고 해야 하는데 새삼스럽게 건강 타령하면서 한가하게 나불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우유부단의 모습이려니.
“건강? 통과의례 과정이야. 남들이 형보고 소처럼 일한데. 그 말 맞아. 그러니까 노예처럼 하지는 마, 전문농사꾼도 아니면서. 자연에 순종한다는 거 그거 좋지. 엉뚱한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순리대로 살아”
엊그제 만난 후배가 스승처럼 일갈한다. 속으로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했지만 틀린 말 한 거 아니다. 그래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지.
바빠야 할 시기다. 내일은 전형적인 봄 날씨여서 밖에서 활동하기 좋을 것이라는 예보다.
밖에서 활동하기 좋다고? 그거 잔말 말고 평소처럼 밭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얘기 아닌가.
- 2023. 4.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