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이야기

아버지의 꽃

소나무 01 2023. 5. 16. 13:06

5월 중순에 접어들며 붓꽃이 피기 시작한다. 붓꽃이란 이름이 좋다. 붓끝에 물감을 묻힌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져서 그 앞에서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은 요즘 그 좋은 이름을 놔두고 아이리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래전에 인기를 모았던 그 이름 '아이리스'라는 드라마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꽃밭에 심은 이 붓꽃은 "아버지의 꽃"이다.

5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긴 과거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집 꽃밭에 키웠던 이 붓꽃 몇 포기를 떼어 내어 할아버지의 산소에 옮겨 심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먼 산에 잠들어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셨을 것이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면 아버지를 따라 대전 외곽의 어느 양지바른 산자락을 찾아 그곳에 모셔져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했고 그럴 때면 어쩌다 한 번씩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여기 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양아버지시다. 어릴 때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다. 부모 다 돌아가신 상태에서 나를 거두어 주셨고 꼴을 베며 일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겨우 초등학교를 나와 가진 것 아무것도 없고 분별력도 없는 상태에서의 결혼, 그리고 철도원양성소에 합격하여 평생직장으로 일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셨다."

아버지는 다른 선조들의 성묘에서는 담담했지만 이 양아버지의 묘소 앞에서만큼은 숙연한 모습으로 한참 동안 먼산을 보시곤 했다. 

나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으로 추석 때마다 성묘길에 따라나섰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산소를 찾았고, 어느 날은 집 화단에 심어져 있던 붓꽃 몇 포기를 가져 다 그 앞에 옮겨 심으신 모양이었다. 

그 50년 전쯤에 심어졌던 붓꽃이 어느새 묘소 잎에 밭을 이루고 있었다. 포기 번식을 잘하는 화초지만 해마다 연중행사로 진행되는 성묘길에서 이 붓꽃을 대할 때마다 아버지의 애틋한 연모의 마음을 읽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이 붓꽃이 피어있을 때의 모습은 본일이 없다. 개화 시기가 5월이었기에 가을날 추석 성묘 때의 내 눈에 보일 까닭이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저 여름 초입에 노란색 꽃이 많이 피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모습을 연상해 볼 뿐.

 

지난가을 끝 이 양할아버지 묘를 포함한 선조들의 이장 작업을 마무리했다. 15기 분묘를 모두 자연장으로 했다. 개장신고와 파묘, 화장, 다시 지자체 운영 묘원으로의 자연장 등 그 과정이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었지만 선조께서 모두 시대 흐름을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집으로 모셔 와 합장 형태로 자연장 했다. 생사불이(生死不二)라 했으니 이렇게 함께 지내고자 함이 억지스러움은 아닐 것이다. 산자락에 이미 좁지 않은 터를 마련한 상태였고 보면 이 역시 억지스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옮겨 심었던 그 붓꽃을 그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 포기 떼어 와 내 집 꽃밭에 심어 놓았다.

 

 

그 한 포기가 겨울사이에 땅밑에서 자라며 서너 포기로 불어 나 지금 2개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 와 보니 노란 꽃이 아니라 자주색이다. 그랬었었구나.

꽃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본다. 아버지도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좀 더 포기가 불어 나면 아버지가 바라보시는 바로 앞으로 다시 옮겨 심을 생각이다.

 

아버지, 살아 보십니까.

어머니도 같이요?

아들 정원에 피어있는

이 꽃 보시고

그리고 저기 저 꽃도 보시고 

더러는 바람으로 

더러는 구름으로 

온 세상 두루두루 구경 다니시길요....

 

                                                                                          - 2023. 5.16(화)

 

* 아버지는 어느 해 성묘길에서 "산소에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하셨다. 아버지 가슴 안에 응어리져 있는 가슴 아픈 사연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사진은 나에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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