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천등산과 하늘과...

소나무 01 2023. 7. 3. 12:39

높은 지명을 표기할 때 유독 하늘 天자가 들어간 경우가 많다. 天字를 붙여 하늘과 가까이하려는 신앙심 때문인지 "높다"는 그 자체를 단순한 비교 우위 개념에서 그리 붙인 것인지. 오늘은 천등산이다.

산행한 지 2주가 지났으므로 다시 산을 찾을 때가 되었다. 체력 향상이라기보다는 평소의 체력이라도 잘 유지해 보겠다는 생각이 크지만 오늘 폭염일 것이라는 예보가 있고 하니 아무래도 산은 좋은 피신처. 예전에는 꽃과 나무와, 바람과 구름과, 그리고 자유로움 뭐 그런 것들이 목적이었지만 화살만큼 빠른 세월이 생각을 바꾸게 만든다.

 

 

                                     천등산과 대둔산이 있는 산맥의 고산 준봉들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천등산(天燈山, 706.9m)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때문에 익숙한 이름이지만 검색해 보니 대한민국 안에 천등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몇 군데 있다. 완주 천등산은 후백제의 견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일 때 새벽인데도 하늘의 도움으로 주위가 환해져서 도움을 받았다는 전설로 인해 등잔 燈이 붙었다지만, 산행을 마친 다음에 생각한 것은 급경사(?)로 인해 나에겐 그 오름이 만만치 않았었기에 오를 登이 맞을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

 

 

                                        고산촌에서비리 본 저 멀리 고봉의 천등산

 

완주 운주면 산북리 고산촌 마을에서 시작하는 3.8Km의 산행 코스를 택하다. 대략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판을 봤었기에 적당한 해찰과 사진 찍기 그리고 그저 내 마음대로의 발걸음을 생각하면 아마 12시 반 정도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맘먹는다. 

여기 산행인은 오늘도 나 혼자. 한적함과 자유로움을 생각하면서도 굳이 오늘 같은 일요일을 택한 것은 그래야 다만 몇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사고는 예고가 없듯이 혹시나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서 휴대전화가 필수품이지만 휴일 같은 경우에야 산행 중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산행인의 발길이 뜸한 산의 경우 평소 평일을 택해 오르면 단 한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기에.

 

 

 

초입에서부터 작은 물줄기를 만나고 원추리 꽃도 여기저기 피어있어 깊은 산 답다는 생각. 이 일대는 산악지역이다. 그러나 이후부터 건조한 숲길이 계속된다. 경사도가 낮지만 계속 오르막길. 이후 경사가 급해진다. 산길 양 옆으로도 두세 걸음 내 밀면 저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급경사.

 

 

어느 한 곳에는 키만큼 자란 산죽이 2백 여 m 이어지는, 한 사람이 산죽을 헤치며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숲길이 이어지기도. 야생동물이 불쑥 뛰어들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신경이 곤두선다. 엊그제까지의 비 때문에 나뭇잎들이 쓸려 내려와 비좁은 산길은 몇 사람 되지도 않았을 산행인의 그동안의 흔적조차 모조리 지워 놓아 더욱 을씨년스럽다.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질까 봐 나무가지로 괴어 놓은 모습이 즐거운 해학이다.

 

올라 갈수록 경사는 급해지기만 하고. 길에 작은 돌들이 많아져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게 중심에 신경을 쓰며 조심하게 된다. 예전에는 몸이 흔들거려도 곧바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는데 지금의 운동 감각은 여전한 것 같으면도 마음 따로 몸 따로다.

거리상으로 대략 3분의 2쯤을 올라 온 너덜 바위에 이르렀을 때 저 위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을 볼 수 있었다. 깊은 산 중이고 보니 역시 사람이 반갑다. 대전에서 왔는데 산 넘어 다른 코스에서 8시 출발하여 내가 떠나 온 고산촌으로 가는 중이란다. 서너 시간 걸어왔나 보다. 가까이 대하니 내 또래쯤.

"오신 쪽 코스는 경사가 가파르다고 하던데 괜찮았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아니요, 그냥 다닐만하던데요?..."

바로 앞에서 사람을 깨우친다. 나는 힘들어하면서 속으로 "아이고, 무슨 산이 이렇게 험한고 - "하는 투정의 연속이었는데 아니 다닐만하다니.

그래, 왜 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할까. 마음먹기 달렸다는데.

"저 밑에 암벽수가 있던데 목 좀 축이고 가십시오"

땀 좀 식히고 가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목 좀 축이고 가자'던 예전 술 인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속인.

 

 

 

                        9부 능선 쯤에 올랐을 때 터진 왼 편의 대둔산 줄기

 

정상을 900m 남겨 둔 표지판부터는 군데군데 조망이 터져 가슴이 트이기 시작한다. 이 구간은 정상부의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어서인지 발길이 훨씬 부드럽다. 

아이쿠, 이젠 좀 살겠다 싶으면서도 그 '다닐 만하다'던 산행인의 말이 계속 되내어 진다. 

"그래, 이렇게 다닐 만 한데 그 얼마 동안을 못 참고..." 

 좋은 생각으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걸 다시 새김질하고.

저 앞으로 대둔산 줄기가 병풍처럼 서 있다. 오래전 저곳 마천대 정상까지 올라가면서도 산이 가파르고 험하다는 투정을 참 많이도 한 것 같은데. 멀리에서 바라 보이는 대둔산이 참 멋있다.

 

 

                                   정상부 능선에서 만난 딱 한 송이 노루오줌 꽃

 

정상이 거의 가까이 왔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긴 철제 계단을 만난다. 처음으로 대하는 인공 안전시설이다. 깎아지른 절벽 길이어서 꼭 필요한 시설이다 싶으면서도 몇 사람의 등산객들을 위해서는 호사스럽다는 마음도 없지 않다. 최근에 알려지고 있는 등산코스라고 하니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하면 잘한 일이다. 밧줄로는 안 될 것 같다.

 

 

드디어 정상.

먼저 올라 와 있던 두 사람의 산행인 그리고 한 참 후에 또 다른 코스에서의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상대방의 큰 몸짓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만큼 정상 부위가 좁다. 또 여기에서 사방을 조망하며 가슴을 뻥 뚫리게 할 수 있을 텐데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리는 아쉬뭄이 있다. 그런 아쉬움이 불만으로 쌓이면 머지않아 관할 기관에서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쉽게 나온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천등산이니 하늘로 더 오를 수 있는 탑을 만들어 세울 수도 있겠거니. 

이렇게 높은 곳에 올랐으니 나는 좀 더 하늘과 가까워졌을까?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가?

그것도 그렇지만 내가 이 산을 다시 힘들게 오르는 기회가 앞으로 더 있을까? 

......

몇 가지 미완의 상태로 천등산을 내려서다.

 

                                                                                           - 2023. 7. 2(일)

 

* "올라올 때 안 보였던 꽃이 내려갈 때 보일까?" 시인의 그 말을 뇌까리며 하산하는데 가파르다 보니 줄곧 발 밑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찍어 누르느라 앞 발톱이 걱정되기도.

그러나 힘든 산행 뒤의 기쁨을 얻다.

타래난초. 아! 얼마 만에 야생에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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