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위봉산성따라 되실봉까지

소나무 01 2024. 1. 8. 14:17

괜스레 마음만 바빠 얼마간 산행이 뜸했다. 간밤에 눈이 내린 바람에 아침 일찍 나서려 했던 1시간 남짓 거리의 완주 위봉산 산행에 제동이 걸렸다. 해가 올랐으니 눈이 좀 녹으면 나서는 게 좋겠다 싶어 10시 반쯤이 되어서야 집을 나서다.

 

 

살짝 내린 눈이었지만 산간지대 그늘진 도로는 군데군데 빙판 길이어서 조심 또 조심. 대아호의 드넓은 호수를 돌아 위봉사로 향하는데 휴일인데도 날씨 때문인지 통행 차량이 눈에 띄지 않는다.

위봉사에 도착해  뒤쪽으로 있는 것으로 알고 왔던 위봉산(威鳳山, 위봉사 입구 안내표지판에는 추줄산이라 표기)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웬걸 길이 없다. 조금 배회하다가 인근 주민 한 사람에게 물으니 지금은 등산로가 없어졌다는 것. 저 아래쪽 위봉산성 쪽으로 가면 어떨지 모르겠다고.

 

 

과거 지나치면서 차 안에서만 일별 했던 산성을 내려서 처음 대면하다. 총길이가 8.6Km에 달하는 매우 규모가 큰 성인데 

출입문이 있었던 도로변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조선 숙종 때(1675년)부터 8년 동안 축조했다고. 참 대단한 산성이라는 것을 산을 오른 후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변란을 피하기 위해 쌓았겠지만 이 엄청난 양의 무거운 돌들을 옮기면서 알마나 고역스러웠을까 하는 생각. 적어도 하루 수 백명의 사연 많은 인부들이 그저 밥먹는 시간만 빼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들은 정녕 나라와 가족을 위해  성곽을 튼튼히 쌓아야겠다고 했을까. 험한 산세에서 일하느라 적잖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축조된 후 옆의 진안 땅 산간지대인 이치나 웅치 전적지처럼 왜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그런 기록은 없다. 다만 동학농민봉기 때  전주에 있던 이 태조 어진과 전주 이 씨 시조 패를 이곳으로 피신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산성 안으로 들어서 조금 오르니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위봉산 방향으로 들어서다가 잠깐 멈칫했다. 거의 3Km 달하는 먼 거리라는 것도 그렇지만 누군가가 표지판에  ×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그것도 몹시 기분 나쁜 감정이 섞인 것처럼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나무판을 긁어놓았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사찰 측에서 후원(後園)처럼 여기고 있는 곳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을 달갑지 않게 생각해서 그럴 수 있겠다는 것과 또 하나는 누군가 이 표지판을 믿고 나섰다가 몹시 고생을 하게 된 악감정 때문일 것이라는 것. 난 후자 편. 산행을 하다 보면 잘못된 표지판 때문에 몇 차례 고생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퇴근 버스 이용자의 편의를 돕겠다고  책상에서 생각한 대로 줄 서기 표지판을 세웠다가 오히려 교통대란을 일으킨 서울 명동의 예 같은 것 아닐는지.

 

 

 

되실봉? 미리 정보를 얻지 못하고 대하는 생경한 이름이다. 그런데  2Km 정도의 거리인 데다 위봉산(524m) 보다 높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방향을 돌렸다. 

 

 

 

아직 녹지 않고 잔설이 많이 덮여있다. 왼쪽 편으로 석축의 흔적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신변의 안전이 일차 목적이 있겠지만 이렇듯 엄청난 양의 큰 돌들을 옮겨 와 이렇게 길게 길게 쌓아 올려야 했던 잘박한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는 것인가? 오직 인력으로만 쏟아부었을 가련한 노동력을 떠올려보니 한편으로는 참 무모한 일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지금 시대에 생각하는 배부른 생각일까?

 

 

어느 만큼 오르니 오른쪽 저 아래로 위봉산이 보인다. 나무 숲으로 가려진 데다 어느 정도의 미세 먼지로 시야가 가려져 주변 풍광이 그리 맑지가 않다.

두 사람 정도의 발자국이 보인다. 눈이 있는 날의 산행에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좋을 것 같아 평소보다 늦게 산행에 나선 이유도 있다. 하지만 나중 내려설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눈길일 것 같아 참 오랜만에 목이 있는 등산화를 꺼내 신었는데 이 신발이 참 고맙다. 20년을 훨씬 넘긴 아주 오래된 등산화이고 그래서 그간 수많은 산을 다녔지만 워낙 꼼꼼히 잘 만들어져서 지금도 새것 같다. 몸에 걸칠 것이라면 값을 더 지불하더라도 품질 좋은 것으로 선택하라는 아내의 평소 지론에 공감한다.  이름 있는 회사 제품인 것은 맞다.

 

 

 

1시간 정도를 걸어  정상에 섰다. 더 나아가면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며 줄곧 산성을 따라 걸을 수 있을 텐데 여기에서 멈춘다. 아주 낡아빠진 표지판의 글씨가 여기가 되실봉이고 해발 609m라고 표기해 놓은 것 같다.(지금의 공식 고도는 608m인듯) 말끔한 표지판 하나 세워져 있을 법도 한데 이쪽의 둘레길(산행길)을 두루 홍보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 모습을 외면하고 있는 행정이 참 무심하다. 오가는 이들이 하나 둘 쌓았을 것 같은 기념 표지 돌무덤과 그 위의 되실봉 글씨가 바랠 대로 바랜 표지석이 오히려 따듯하고 정겹다. "되실"이란 이름의 유래가 무엇인지 이리저리 찾아보고 물어보았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참 정감 있는 이름인데...

 

 

 

저 멀리 남서쪽으로 전주 시가지가 희미하게 잡힌다. 온 방향으로 산의 능선들이 겹쳐져 보이지만 나무들과 날씨 여건 때문에 시원스럽지 못하다. 나는 오늘 그저 또 하나의 산 정성에 서 있다는 것으로 만족. 산에 가야 되는데, 산에 가야 되는데... 했었는데.  

그래서 귀가하는 길 마음이 참 가볍고 홀가분했다. 나에게 산은 늘 그러한 느낌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 2024. 1.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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