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분명 그렇게 따지듯 항의할 것이다.
내가 호박에게 늘 갑으로 군림한 대가를 지금의 참담한(?) 결과로 돌려받고 있다. 심을 때 딱 한 번 거름을 준 것 말고는 이후 나 몰라라 했으니.
올해 호박 농사를 망쳤다는 넋두리다.
해마다 모종을 구해 심었는데 올봄엔 지난해 수확했던 것 중에서 건강해 보이는 씨앗을 골라 적당한 간격으로 파종했었다. 생각대로 모두 싹이 잘 올라왔고 왕성히 자라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 나오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다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달고 나오는 암꽃순을 보면 그리 반가웠고.
그러나 다시 그 자리에 가 보면 아기 주먹만큼 커져 있어야 할 호박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두 개가 그러려니 하고 다른 일에 묻혀 계속 무관심으로 보내게 되었고.
저 아랫집에서 텃밭 한쪽에 온통 호박을 재배하고 있었고 넝쿨이 제법 잘 뻗고 있어 보기에 좋고 부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가 보니 모두 사라진 채 흔적이 없다. 호박이 달리지 않아 걷어 없애버렸단다. 왜냐고 다시 물으니 주위의 벌들이 사라져 수정이 이뤄지지 못한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새 봄 벚꽃이 개화하면 하얀 꽃도 장관이지만 이제 밖으로 나와 왕성하게 활동하는 꿀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멀리에서도 역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마약 이륙하려는 프로펠러기 소음처럼.
그렇게 많았던 벌들인데 요즘은 그 소리가 아주 희미해졌다. 꿀벌이 사라지면 우리 생태계도 사라질 만큼 큰 위협을 받는다고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하곤 했는데 산자락에 사는 미미한 나의 존재 앞에도 그 영향이 미치는 게 아닌지.
매우 늦었지만 딱 1개가 정상적으로 크는 것 같아 이나마도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늙은 호박이 되기 전에 서리가 내릴 것 같아 때깔 나는 노란 호박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도 내 이웃첨 똑같은 현상이었는데 차마 호박덩굴을 걷어내지 못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평소의 내 안이하고 소심한 성격 탓이다. 유튜브 채널에 흔히 널린 호박농사에 관한 정보도 찾아보고 잎과 줄기 상태를 보아 가며 가끔 거름이라도 주고 했어야 하는데 계속 방관해 왔다. 그러면서 모종 탓? 한 여름의 무더위 때문? 그렇게 남 탓으로 돌리고. 순전히 내 게으름 탓인데도. 무엇이든 이것저것 좀 힘들겠다 싶으면 아예 손대기를 귀찮아하는 나태함이 점차 못된 습관화되어 가는 것 같다.
이미 상강이 지났고 보면 머지않아 서리가 내릴 것이다. 이런 시기에 내 집 호박은 이제야 암꽃 순이 여기저기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대 부분이 어느 만큼 자라다 가는 시들해져서 낙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반가운 것이 완전 폭망(?)의 호박 농사가 아니라 다만 몇 개라도 건질 수 있다는 기대.
하지만 곧 서리 내리면 끝일 텐데 겨울 철에 호박죽이라도 쒀 먹을 수 있는 늙은 호박을 기대함이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서리를 맞으면 호박잎이 일순간에 초토화되어 버리고 모든 게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 버릴 테니.
푸른 호박 몇 개라도 얻을 수 있음에 그저 감사 감사.
지난해까지 모종 4개 정도만 구입해 가꾸었고 그 정도면 합당할 텐데 수확량을 늘려보자고 직접 씨앗을 받아 올봄에 열댓 개를 심었고 그중 상태가 좋은 7개를 선별해 기른,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내 욕심의 반증인 셈이 되었다.
분명 내 탓이니 반성해야.
"호박아, 올핸 너 왜 이모양이니?"
하며 호박에게 그렇게 묻는 건 순전히 못된 주인의 갑질 행위이다. 고약스러운.
그렇게 투덜거리는 나에게
"도대체 지금 이게, 이게 뭡니까 이게... 뭘 잘했다고. 이렇게 할 거예요?"
호박 줄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되물어 오는 것 같다. 부끄럽다. 마트에 가면 7천 원 1만 원 하는 늙은 호박이 가득 쌓여 있다. 다들 이렇게 잘 농사 져서 가게에 내놓았는데... 부럽다.
또 부끄러워졌다.
- 2024.10.30(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