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생애에 대한 소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꾸며 놓은 오죽헌을 둘러 보며 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사대부 집안이라고 하지만 당시 전통적 유교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한계를 타파하고 문장가로, 화가로 그렇듯 훌륭한 족적을 후세에 까지 남길 수 있었는지.
물론 그 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남편의 작용도 없지 않지만 그 녀 스스로에게서 우러 나온 남다른 생각과 행실이 오늘 날 그 녀를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추앙받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상도 신사임당같은 현모양처 형이다. 아내와 어머니는 꾸며진 듯한 겉모습에 일시적으로 매료되어 선택되어 지고 잠시 함께하는, 그래서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갈 수록 깊은 정이 배어 나오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오죽헌 전경.
신사임당이 거처하면서 아들 이 이를 낳고 길렀다는 오죽헌.
오죽헌에 모셔져 있는 신사임당 영정. 1504년에 태어 나서 1551년에 타계했으니 48살에 운명한 셈이다. 어느 자료를 보면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이 17세 정도라고 하니 그렇게 단명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전에 남편 이원수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인 율곡 이 이선생도 그 정도의 나이인 49살에 타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임당은 타계하기 전 남편에게 당부하길 자녀는 7남매로 족하고 이제 이들을 어떻게 잘 교육시키느냐가 중요하므로 자신이 세상을 뜨더라도 새로운 아내를 얻지 않았으면 한다는 희망을 전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아내가 나에게 전해 준 말이다. 신사임당 자료전시실에서 아내의 발길이 유난히 느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으니 자료 설명문을 꼼꼼히 읽어 봤다는 것이다. 기념품 판매대에서 사임당의 생애와 행적을 담은 책을 한 권 사오는 것인데 그 생각을 못했다면서....)
살펴보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있는 신사임당 관련 자료들이 하나같이 획일적인 것들이어서 별도로 관련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아내에게 선물하고 나도 탐독해 보려 생각하고 있다.
우선은 5천원권 뒷면의 도안으로 채택되어 있는 그 녀의 초충도를 눈여겨 새겨 보면서... .
오죽헌 주변의 오죽(烏竹). 간간히 푸른 대나무도 섞여 자라고 있었다.
이 이(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
문성사에 모셔져 있는 율곡 선생(1536-1584) 영정.
오죽헌을 나서며 아내와 함께.
그늘에서 잠시 쉬며 오죽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딸이 찍어 줬다.
- 2006. 8. 8(화)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마산 미황사 (0) | 2007.07.28 |
---|---|
공세리 성당 (0) | 2007.05.20 |
동해 안인해수욕장 (0) | 2006.08.12 |
돌담이 있는 외암민속마을 (0) | 2006.08.01 |
소나무 숲길따라 봉곡사에... (0) | 2006.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