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이야기

큰스님의 누더기

소나무 01 2009. 12. 30. 19:52

 

 

 

 

 


 2년이라는 세월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해인사를 찾은 것이 이년 전 성철스님의 다비가 있을 때였고, 찬바람이 일던 그 곳에서의 인연은 그렇듯 ‘죽음` 과의 만남이었다.

 일주문 쪽에서 평소 성철스님이 주석하던 백련암으로 올라가다 보면 인적 없는 왼쪽 산자락에 부도 세 기가 있다. 낙엽이 이미 깊게 깔려 쓸쓸한데 바람은 계속 불어 나뭇잎은 속절없이 떨어지고, 그 가운데 몇 잎은 이끼 낀 부도 위에 내려앉아 인생의 무상함을 뼛속 깊이 느끼게 했다. 

 

 그동안 숱한곳에서 부도를 봐 왔었지만 그 때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죽음` 의 자태와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순간적으로 사무치도록 숙연한 마음이 되었고 껍데기와 같은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했다.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야 내 존재가 드러나는 냉엄한 조직 사회에 몸담고 있는터라, 그 앞에서 갑자기 스스로가 왜소해져서 그 동안 너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뛰며 사욕만 채우지 않았느냐는 자각이 일었다.


성철스님의 ‘죽음` 은 어떤 것일까.
큰스님의 다비 취재는 그의 열반처럼 갑작스런 것이었다. 가까운 함양에서 함양박씨의 시제(時祭)가 열릴 예정이라서 사전 연락을 통해 그 행사를 취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결국 포기하고 급히 해인사로 떠났다.

 한정된 시일 안에 제작해서 프로그램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하느라 미적미적하는 바람에 성철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는 11월 4일 부터 사흘이나 흘러 버려 내심 초조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 것인지는 달리는 차 안에서 대강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지만 믿는 것은 7일장이라서 며칠의 여유가 있는것과 그 동안의 취재 경험, 곧 다비에 관한 조금의 상식뿐이었다, 그보다 일 년 반쯤 전에 같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주석하던 자운(慈雲)스님의 다비를 시종일관 지켜 본일이 있었다.
강원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영결식장이 치러지고 있는 해탈문 앞 너른 마당에서도 행렬은 마찬가지였다. 노란 국화로 장엄되어 있는 영정, 자비로운 모습의 성철스님은 “다만 마음의 눈으로 나를 들여다 보라”고 이르시는 듯했다.

 

 삶과 죽음이 따로 없다고 가르쳤고, 죽어 누더기 한 벌만을 남겼듯이 그 모두 원치 않을 의식일 테지만 사람마다 끝내 오열을 가누지 못함은 당신께서 드리운 그늘이 그만큼 컸던 까닭이리라.

 도대체 수행의 깊이가 어느 만큼이나 되기에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열반에 들었을까. 신라의 진감(眞鑑)과 낭공(郎空), 고려의 원웅(圓熊)과 보조(普照), 조선시대 서산과 사명대사가 그랬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원효는 땅에 난 띠풀을 열고 연화세계로 떠났으며 신라 광덕(廣德)스님 같은 이는 서방극락으로 등천했다고 하니 미천한 속인으로서는 그저 신비롭기만 할 따름이다. 근세에 범어사 동산스님의 상좌였던 도원(道圓) 선사는 스스로 불을 일으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다 하니 참으로 거룩한 열반이랄 수 밖에.

 

 성철스님의 수십 년에 걸친 묵언과 장좌불와 등 뼈를 저미는 수행자로서의 고행 정진은 백련암 앞마당에 집채만한 바위를 우뚝 세우고 불면석(不眼石)이라 이름 붙인 그 모습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른다며 스스로를 `퇴옹’ 이라 했고, 깨달았다는 아만(我慢)들을 향해 건달들이 왜 이리 많은가 하고 육두문자를 서슴치 않던 분, 사람들은 당신을 최고의 선지식, 마지막 선승, 살아있는 부처 등 듣기 좋은 수식어로 포장하여 추앙하고 있지만 당신께선 정작 이름없는 산승을 고집했으니 그 역시 고승의 경지로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큰스님의 법체는 비구니들이 섬섬옥수로 장엄한 연화대에서 육신의 옷마저 훌훌 벗어 버렸다.
스님께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본지풍광, 본래의 내 마음자리가 부처라는것, 늘 그 큰 말씀도 부질없는 망상이라 물리치시더니 한갓 미물 같은 나의 마음자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악하고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나는 그 앞에 추악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벌거벗고 있는 듯했다.

 방송 시간은 이미 정해졌고 그 한정 된 틀 속에 모든 것을 용해시켜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사흘동안 밤낮없이 편집하고 있는 사이에 습골 과정에서 모두 112과의 사리가 수습되었다는 발표를 들었다. 부처 이후 가장 많은 수효라 했고, 사람들은 대부분 경외심보다는 호기심으로 스님의 사리를 친견했을진대 만일 당신께서 이 소식을 들었다면 가없는 고행의 흔적을 어찌 사리의 수효로 가늠하느냐고 또 한번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스님은 열반에 들기전에 있던 퇴설당(堆雪堂)의 당호와 같은 흔적 없는 존재이길 바랐고, 실지로 죽은 뒤에도 이름없는 평범한 부도로 남길 바라셨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치고,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가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 뿜으며 푸른산에  걸렸다”는 스님의 열반송은, 그 모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 보라 이른 것이다.

 사람의 두눈 가운데 정작 중요한 것이 이 마음의 눈, 사실 겉으로 드러나 있어 우리 육안으로 볼수 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요,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 볼수밖에 없지 않는가. 비록 성철스님의 육신은 사라지고 없으나 우리 마음안에 가장 큰 모습으로 살아 있듯이.

 

 프로그램은 “붉은해 서산에 걸렸다”라는 제목으로 방송이 됐고, 부끄럽지만 완성도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본 것으로 안다. 그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 죽음을 위한 예비 과정에 불과하다. 지금 실행하고 있는 일의 다음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연계시키면 결국 맨 끝으로 죽음밖에 남지 않고, 궤변으로 이해될지 모르지만 그 중간 과정들을 모두 생략하면 실상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들은 죽기 위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사후 세계와 윤회에 대해서는 나의 무지함이 커 거론치 못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맞이하는 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지혜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 나라 최고의 권력과 부를 소유했다가도 결국 최악으로 떨어진 요즘의 한 가련한 정치인을 보면서 성철스님이 남긴 누더기 옷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나 자신 우리 문화 유산을 취재한다고 몇 년째 전국을 떠돌아 다니고 있지만 우리 문화 유산이 거의 불교문화인 현실이고 보면 참으로 많은 사찰들을 찾아 다닌 셈이다. 그때마다 가장 부럽게 다가오는 것은 스님들의 무소유를 지향하는 욕심없는 모습이다.

 어차피 운수납자이니 오히려 소유가 번거로울 따름일테지만, 물질이 많으면 그만큼 사유할 시간이 적어짐을 이 시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깨닫고 있을지.

 

                                                                                                (1995.12. 월간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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